제5과 대화엄일승법계도주병서(본문제21구~30구)

2008. 10. 1. 23:37법성게

 

제5과 대화엄일승법계도주병서(본문제21구~30구)


『第21句』

雨寶益生 滿虛空(우보익생 만허공)

0.보배의 비를 쏟음에 중생을 이익함이 허공에 가득하니.


이 한 개의 여의주가 수많은 여의주를 反映(반영)하여 流出(유출)하듯이 이 하나의 해인삼매라는 빛의 三昧(삼매)가 수많은 같은 삼매를 유출한다.

그러나 이 해인삼매라는 빛의 삼매는 단지 十位의 부처들과 같은 大人의 경지라야만 證驗(증험)하는 것은 아니고 일체의 중생이 각각 그와 같은 대인의 경계로서의 해인삼매라는 빛의 삼매를 가지는 것으로서 나서부터 죽기까지 일생동안 아침부터 저녁까지 성내든가 기뻐하든가 말한든가 말하지 않는 하나하나의 순간마다 각각 하나하나의 해인삼매가 있어 그 하나하나의 해인삼매가 중생의 煩惱群(번뇌군)을 流出하고 그 하나하나의 번뇌에 不可變的(가변적)인 존재의 본질이 내재하여 一體로서 정연한 상태에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 허공과 같이 한량없는 이익을 단지 분명히 밝혀서 확실하게 알려주기만 하면 그만인 것이다.


『第22句』

衆生隨器 得利益(중생수기 득이익)

0.중생은 그릇대로 이익을 얻는다.


대부호의 집안이 그릇마다 다 금이듯이 해인삼매 가운데서도 존재(法)마다 다 진리(眞)인 것이다. 다만 크고 작음, 모나고 둥금, 물들고 깨끗함의 차이가 있을 따름으로서 그 얻은 바 이익에 있어서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法)인 것은 아니다.

단지 큰 것에 대하여는 크다 하고 작은 것에는 작다고 하며 모난 것에 대하여는 모났다고 하고 둥근 것에 대하여는 둥굴다고 하며 물든 것에 대하여는 물들었다고 하고 깨끗한 것에 대하여는 깨끗하다고 할 뿐이지 작은 것을 넓혀서 크게 한다거나 모난 것을 깎아서 둥글게 한다거나 물든 것을 고쳐서 깨끗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알겠는가.


『산이 비었으니 바람이 돌 위를 구르고

누대(樓台) 고요함에 달빛이 문안에 스며드네.』

(山虛에 風落石(산허에풍낙성) 하고 樓靜에 月侵門(누정에 월침문)이로다)


『第23句』

是故 行者 還本際(시고행자 환본제)

0.그럼으로 수행자가 근원으로 돌아감에 있어.


근원(本際)을 알고자 하는가.

『禪이 무엇인가 물을 때 禪 은 실체를 잡을 수 없는 것. 본질이 무엇인가 찾을 때 본질과는 멀어지는 법. 설사 깊이 契合(계합)한 바 있다 하더라도 또한 눈속에 낀 먼지에 지나지 않는것.』

(禪問 禪是妄(선문 선시망) 求理 理非親(구리 이비친)

直饒玄會得(직요현회득) 也是眼中塵)(야시안중진)


@본제本際: 모든 현상의 근거로서 本源. 圓覺經에「平等本際圓滿十方」이라는 말이 있다.


@眞實無妄한 것으로 말하자면 천하에 理보다 實한 것이 없지만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는 것으로 말하자면 천하에 理보다 虛한 것이 없으니 無極임과 동시에 太極이라는 一句만 보더라도 알 수 있는 것이다./퇴계 이황


『第24句』

叵息妄想 必不得(파식망상 필부득)

0.관념의 조작을 그치지 못하면 필연코 되지 못할 것이다.


과거 현재 미래의 여러 부처들이랬자 별수 없이 주검이나 지키는 보잘 것 없는 귀신이요, 역대의 선사들이랬자 형편없는 밑바닥의 범부이다. 설사 부처가 解說하고 보살이 해설하며 空間으로서의 국토가 해설하며 시간으로서의 과거 현재 미래가 일시에 해설하여 존재세계자체가 동원된다고 하더라도 끓는 주전자의 김새는 소리나 다를 것이 없는 것으로서, 어차피 궁극적인 하나의 것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다(向上一着了沒交涉).

온 對象界가 바로 근본적 無知로서의 의식주관의 전개로서 광막(廣漠: 망망함)하기만 할뿐 아무런 실재성이 없는 것이니 무슨 까닭인가.


『단지 편의상 만든 개념과 문자로써 중생을 인도할 따름』

(但以假名字 로 引導於衆生)


@叵息妄想必不得: 必不得 은 必不得還本際의 略. 이는「망상을 끊고 다시는 얻음이 없음으니」의 뜻이 아니고 「관념의 造作(조작)을 그치지 못하면 틀림없이 根源(근원)에 回歸(회귀)하지 못한다」라는 의미. 즉 不得의 得은 「얻는다」가 아니고 가능을 표시하는 조동사.


@向上一着了沒交涉(향상일착료몰교섭): 向上의 「上」은 「形而上」의 뜻, 向은 「관한」의 뜻. 「向一路」↔ 一路는「요체(要諦)」, 一着子나 마찬가지로 「구체화 할 수 없는 그 무엇」으로서의 하나를 말함. 결국 궁극적인 진리.


『第25句』

無緣善巧 捉如意(무연선교 착여의)

0.본질자체에서 울어나온 훌륭한 솜씨로 여의주를 잡아서


자체에서 內在한 것으로 상황에 應한 작용이 아닌 본질적 生起로써(以眞如 性緣起之無緣) 본래 집안에 있던 無形의 여의주(家中 無相之如意)를 꺼내는 것이야말로「훌륭한 솜씨(善巧)」라고 일컬을 만 한 것이다. 그「훌륭한 솜씨」란 본래 속된 재주로 미칠 수 없는 것이니 알겠는가.


『江 위에 비낀 황혼의 풍경 그림만 못하지 않은 곳.

어부는 도롱이 한 장 걸치고 돌아가는 모습』

(江上晩來(강상만래) 堪畫處(감하처) 漁人(어인) 披得一蓑歸(피득일사귀)로다)


@眞如性緣起之無緣: 진여란 주관-객관의 규정에 先行하는 實相으로서의 卽自的 존재. 의식주관의 건너편에 있다는 점에서 物自體이면서 그 자체가 일체의 현상으로서 현현한다는 점에서(자기가 자기를 규정한다는 측면) 포괄자(包括者)이며, 존재인 것.

우리가 시간과 공간을 범주로 하여 인과적 계기(繼起)로서 상황의 轉變(전변)을 인식하고 物(물)을 도구로 사용한다든가 수행에 의하여 佛智(불지)를 성취한다든가 중생으로서의 고통을 받는다든가 하는 것은 현상적 세계를 바깥에서 볼 때의 입장 즉 實證主義(실증주의)의 세계관에 속한다.

그러나 다름없는 현상적세계(연기)이지만 그것이 주관-객관을 벗어나면서 그와 같은 주관-객관을 성립시키는 진여자체의 안쪽에서 볼 때에는「本來 그러한 것(性)」이 「그러한(起)」일 뿐이다(性起者 唯眞如法性 自起而爲諸法). 이러한 입장(진여와의 합치)에서는 현상을 규정하는 시간은 시간이 時化하는 것이며, 物은 物이 物化하는 것이며 佛이란 佛이 佛化하는 것으로서 연기란 곧 본질적 生起(性起)로서의 현상(性起萬法)이 외에 별개의 세계가 아닌 것이다. 이것이 일대긍정으로서의 화엄의 종교적 세계인 것으로 肉身이 法身이며 無明實性이 곧 佛性이라는 논리의 근거인 것이다. 이와 같은 화엄의「性起」에 대하여 천태의「性具(성구)」는 같은 발상위에 서면서도 화엄의 기능적 측면보다 오히려 본체적 측면에서 종교적 세계를 설명한 것이라 할 것이고 이러한 태도에서 필연적으로 화엄(적어도 法藏이전)에 없는 性惡의 설이 성립하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법화현의참조).


@性緣起之無緣의 性緣起는 性起. 다만 연기라는 용어는 心識의 대상에 관계하는 현상을 표현하는 것으로서 能緣과 所緣을 전제로 하는 것임에 반하여 性起는 性이 바로 起이고 그 起가 性인 것으로서의 自起인 것이므로 김시습이 사용한「性緣起」라는 용어는 적절하지 못하다. 性起라는 용어는 화엄학이 진여의 二元化 내지 實體化를 피하고자 어디까지나 기능적 측면에 서서 苦心한 흔적이 보이는 용어임에 유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起」는 顯現(현현), 無緣은 性起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의 연기의 否定을 말한다. 결국 이 句의 취지는「연기의 현상적 입장에서는 그와 같은 현상을 현현하는 전모(全貌)를 파악할 수 없고 性起의 진여와 일치함으로써(本有의 입장) 비로소 현상의 전모와 意義(敎義)를 있는 모습 그대로 파악하게 된다.」고 함에 있다. 그리고 이것이 前句에서 말하는 망상을 그치는 요건이 된다는 것이다.


@家中無相之如意: 如意는 如意寶珠. 帝網(제망)의 여의주와 같이 일체의 현상을 反映流出 (반영유출)시키는 진여(존재)에 비유한 것. 그러나 여의주 자체에 분별현상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無相의 如意라고 한 것이다. 家中은「다른데서 얻거나 들어오는 것이 아니고 本有의」라는 뜻( 無緣善巧者 無分別也, 如意者 敎也(총수록 상)


@是名善巧(시명선교): 善巧는 方便. 솜씨. 현상적 연기를 이용하는 것이 人巧(인교)인 기량이라면 본질세계를 본질로서 이용하는 것은 天巧(인위적인 면을 초월한)이고 이러한 의미에서 바깥에서 배우는 것이 아니고 자기 내부의 자각을 통하여 이룩하는 것이야말로「훌륭한 솜씨(善巧)」에 해당한다. 예술의 本領이 여기에 있다. 우리가「창조」라 함은 바로「善巧」인 것이다.


@江上晩來堪畵處 云云: 晩來의「來」는 온다는 뜻이 아니고 助字. 만래는「느즈막」「저녁무렵」의 뜻. 堪畵處는「그림과 못하지 않게 아름다움 장면」의 뜻. 披得一蓑(피득일사)는 「걸친 것은 도룡이 한 장 뿐」의 뜻. 披得의 得은 助字, 「얻는다」가 아님. 披는 被와 互用.


『第26句』

歸家隨分 得資粮(귀가수분 득자량)

0.귀가함에 분수대로 필요한 양식을 얻는다.


歸家(귀가)했다고 해서 그 살림에 별다른 것이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자기의 본연의 모습을 회복함으로써 본래 無爲하던 상태로 돌아가기만 하면(但以本地風光 得本來閑田地) 이것으로 그 집의 살림에 충분한 것이다. 여기서 귀가에 소요되는 양식이라 함은 37종의 수행덕목이 바로 그것이지만 배고픔에 밥 먹고 목마름에 장을 마시며 추움에 불쬐이고 더움에 바람 쏘이는 것 같아서 그와 같은 일상적 단순함 속에 별다른 무슨 의의랄 것이 있겠는가.

비록 그렇기는 하더라도 외이를 심어서 오이를 얻듯이 원인이 되는 수행의 단계 속에 결과로서의 果德이 이미 내포되어 있는 것으로서 화엄의 순수한 존재세계(一乘의 淸淨法界)에 발을 내딛어 種子(종자)를 내렸던 이상 어찌 거기에 심오한 의의(玄談)를 말할 것이 없겠는가. 어른 말해보라(速道).


『객을 보내는 마당으로 해서 언제고 집을 떠난 그때를 추억하기 마련』

(長因送客處(장인송객처) 하야 憶得別家時(억득별가시) 로다)


@本地風光: 造作이 없는 본연의 세계의 모습. 진여 곧 존재세계의 실상을 말함.

 閑田地(한전지)는 無事田地. 곧 차별이 현상이 지양된 상태, 그 경지.

@玄談(현담): 현담은 奧義(오의). 懸談이라고도 쓴다.

@長因送客處 云云: 長은 <언제고>의 뜻. 別家時는 집을 떠나 있던 시절.

결국 귀가(본지풍광)의 입장에서 別家의 시절을 회상한다는 말.

@速道(속도);「얼른 말하라」速은 단순히「빨리 말하라」고 시간적으로 재촉하는 말은 아니고「너 자신속에서 울어나오는 그대로를 말할 것이지 이리저리 構思(구사)하면 그럴수록 진실과는 멀어지니 머뭇거리지 말라」는 뜻. 결국 虛僞意識의 개재를 배제하는 師匠(사장)들의 방편.


『第27句』

以陀羅尼 無盡寶(이다라니 무진보)

0.다라니라는 無盡한 내용의 보배로써


이 다라니라는 보배 창고는 부처의 영역에 있는 것도 아니고 중생의 영역에 있는 것도 아니며 깨끗한 영역에 있는 것도 아니고 물든 영역에 있는 것도 아닌 것으로서 어느 곳이든 가리지 않고 그 하나하나의 영역마다 뚜렷이 밝아 하나하나가 서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니 이러한 包括者(포괄자)로서의 존재세계가 가진 끝없이 신비한 보배를 알고 싶지 않은가.


『그대 밤낮으로 24시간 동안 보고 있는 것이지만 소리를 만나고 물질을 만나며 順境을 만나고 逆境을 만남에 있어 바야흐로 다른데서 얻는 것이 아님을 알 것이다.』

(你看十二時中(이간십이시중) 하대 遇聲遇色(우성우색) 하고

遇逆遇順(우역우순) 하야 方知不從他得(방지부종타득) 하리라)


@陀羅尼(다라니): 모든 것을 그 속에 包攝(포섭)하면서 포섭되어 있는 것의 規定(규정)을 통하여 규정되지 않는 것. 다라니는 따라서 그저 다라니(總持:총지)일 뿐인 포괄자로서 意識一般이며 精神이며 實存(실존)이며 存在世界이며 眞如이며 圓覺(원각)이며 實相이며 向上一着(향상일착)이며, 途上(도상)이며, 超越(초월)이다. 이미 認識(인식)은 無力하고 그것이 보내주는 暗號(암호)를 해독할 따름이다.

 

@你看十二時中 云云(이간십이시중 운운): 여기서 聞聲見色(문성견색)이라 하지 않고 遇聲遇色(우성우색)이라고 한 것은 그것이 이미 인식은 아니고 바로 자기와의「만남」이기 때문이다.


『제28구』

莊嚴法界 實寶殿(장엄법계 실보전)

0.존재세계라는 참다운 보전을 장엄하게 한다.


인다라망을 구성하는 보배구슬의 影像(영상)이 상호 反映(반영)하여 한없이 전개되는 것은 粧飾(장식)으로 인한 것도 아니고 수행에 의한 證悟(증오)로 인한 것도 아닌 것으로서 본래부터 충족된 것이며 완성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참답다(實)」고 한 것이다. 또한 이 「참답다」는 글자는 그저「참답다」고 할 뿐이지 달리 어떻게 건드릴 수 없기 때문에 건드리면 禍根(화근)을 만든다고 말하기도 한다.(這介實字(저개실자) 不得動着(부득동착) 動着 則禍生(동착즉화생)


@動着則禍生: 건드리면 본질로서의 생명을 잃어버린다는 뜻


『第29句』

窮坐實際 中道床(궁좌실제 중도상)

0.궁극에는 참다운 근원(實際)로서의 중도의 평상에  앉았으니


깊숙히 존재의 본질에 들어가(深入法性海) 더 이상 다다를 데가 없기 때문에「窮極(궁극)」이라고 한 것이고, 要衝(요충)을 점거하여 凡(범인)人이니 聖賢이니 하는 갈림길에 들어서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앉았다(坐)」고 한 것이다. 또한 진실이니 허망이니 하는 차별이 부정되어 현상적인 작위에 좌우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참답다(實)」고 한 것이고 일체의 凡人이나 성현이 발을 붙일 수 없는 곳이기 때문에「根源(근원)(際)」이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어떤 것」이라고 부를 뿐 무엇이라고 규정지을 수 없는 것을「中」이라고 한 것이고 능력과 수준의 차이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이 밟아가는 것을「道」라고 한 것이며 마침내 본연의 상태에 이르러 操作(조작)을을 요하지 않게 되었음에「平床(평상)」이라고 한 것이다.

비록 그렇기는 하더라도 이러한「연화장세계」는 오염됨이 없이 순수한 것인데 이에 관하여 어찌 위와 같은 사변적인 이해가 허용될 수 있을 것인가. 만약 이 같은 思辨的(사변적) 이해의 대상이 되는 것이라면 어찌 현재까지 그 순수성이 유지되고 있겠으며 만약 그와 같은 사변적 이해가 허용되지 않는다면 十個의 보편적인 존재세계(十法界)는 어디에 근거하여 성립하는 것인가.

내가 왼손으로 한번 坐床(좌상)을 치고 나서「모든 차별적 현상 그대로가 진리의 모습이라고 보는 입장에서는 한 개의 존재도 배척하지 않는다(佛事門中 佛捨一法)」라고 하고, 오른손으로 한번 坐床을 치고 나서「한개의 존재도 긍정하지 않는 입장이 다름 아닌 본질적 의미에서의 부처이다(不見一法卽如來)」라고 말하는 바이니 대체 알기나 하는가.


『廣闊(광활)한 우주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세계는

바다 가운데의 거품같고 일체의 賢聖은 번개가 번쩍함과 같은 것』

(大千沙界(대천사계) 海中漚(해중구) 一切聖賢(일체성현) 如電拂(여전불))


@法性海: 존재의 본성이 가진 包越性(포월성)의 특징을 보이는 것이 海이다.


@不見一法卽如來: 영가선사의 증도가의 句.「한개의 존재도 독자성이 있음을 긍정하지 않는 것이 본질적인 깨달음의 입장이다」의 뜻. 앞의 不捨一法은 理.


@大千沙界海中漚(대천사계해중구) 云云: 영가선사의 증도가에서 인용. 大千은 삼천대천세계, 沙界(사계)는 갠지스강의 모래알처럼 많은 세계. 海中漚와 電拂은 모두 지속성이 없는 순간적인 현상.


『第30句』

舊來不動 名爲佛(구래부동 명위불)

0.일찌기 변동한 적이 없는 것을 이름하여 부처라고 한다.


살피건대 천태교는 六種의「不可分離」의 이론(六卽)으로써 총합적 진리의 입장(圓敎)을 判釋(판석)함에 있어 부처가 이르기를「一切의 중생이 모두 부처의 본성을 가지고 있다(一切衆生皆有佛性)」고 함은 부처가 있든 없든 본질과 形相이 중단 없이 지속하고 있어서 낮은 지위에서 점차 높은 지위에 이르기까지 아무런 차별이 없이 동일성을 가지고 있음을 부처라고 이름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法界圖叢隨錄(법계도총수록)이라는 책에서 마치 어떤 사람이 침상에서 잠이 들어 꿈속에 들어 꿈속에서 三十餘驛(삼십여역)을 돌아다니다가 깨고 나서야 비로소 움직이지 아니한 채 침상에 그대로 있었음을 아는 것과 같이 본래의「存在의 本姓)(法性)」으로부터 30句를 거쳐 다시「존재의 본성」(法性)으로 돌아오기까지가 그래도 하나로서 변동함이 없음을 비유하기 때문에「일찌기 변동한 적이 없는 부처(舊來不動佛)」라고 한다.


그러나 종합적 교리(圓)이니, 직관적 통찰(頓)이니 하여 개념적인 설명(名)에 의하여 부처를 형상화함은 잘못을 범하였음이 당장 들어나 있는 것으로서「일찌기 변동한 적이 없는 부처」라고 부를 것이 못된다. 그러니 누구든 經論의 설명이나 조사의 言句에 의존함이 없이 (敎網과 갈등을 여의고) 막바로 祖師가 제시한 난제(玄關)를 통과할 사람은 없는가. 청컨대 한 구절을 말해보라. 그럴만한 사람이 없다면 내 스스로 말해버리겠다.


『山에 뜬 구름 바다에 잠긴 달의 含意 남김없이 말해주었건만

알지 못하기는 마찬가지 공연히 시무룩해 있구나』

(說盡山雲海月情(설진산운해월정) 이어늘

依前不會(의전불회)하고 空惆悵(공추창)이로다)


@六卽(육즉): 理卽(이즉), 名字卽(명자즉) 觀行卽(관행즉) 相似卽(상사즉)

分證卽(분증즉) 究竟卽(구경즉)(법화현의참조)

@법계도기총수록: 대정신수신대장경권45에 No.1887 B/고려대장경영인본 권45補遺2.에 수록됨. 의상대사가 신라화엄학을 연구함에 일차적인 자료집이다.


       法界圖 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