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과 대승화엄일승법계도주병서(본문제5구~10구)

2008. 9. 29. 22:04법성게

 

제3과 대화엄일승법계도주병서(본문제5구~10구)


『第5句』

眞性 甚深 極微妙(진성심심극미묘)

0.진성(眞性)은 매우 깊어 아주 미묘(微妙)하다.


만약 대화엄경에서 말하는 무한한 중첩적 구조의 존재세계(重重無盡法界)를 논할진대 그것은 입술에서 한마디 말이 나오기 전에 이미 설명이 다 되어버린 것이고 經典을 인용하기 전에 벌써 해석되어 있는 것으로서 언어와 문자에 의하여 규정되기에 앞서 자명한 것이다. 설사 시냇물 소리가 長廣舌이 되고 산의 모습이 부처의 신체가 되고 산하대지의 대 자연이 講論의 장소가 되고 모든 생명 있는 것(有情)과 없는 것(無情)들이 집회의 구성원이 되어 전체적인 規模(규모)의 해명이 이루어진다고 想定하더라도 결국 언어를 수단으로 하는 한 규명할 수 없는 한계가 있는 것으로서 그저 찬탄만 하기에도 부족한 형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상법사가 그와 같이 天眞의 자연세계에 관하여 무리하게 思辨的(사변적)인 천착(穿鑿)을 가하고 있는 것이므로 이야말로 속담에서 말하는「멀쩡한 살에 부스럼을 낸다」고 함에 해당한다고 할 것이다.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한편 화엄경의 방대한 내용이 언어에 의한 해명을 거부하는 입장과 兩立하지 않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의상법사가 포괄적인 입장에서 아무 구애 없이 뜻대로 표현한「존재와 그 본성이 모순 없이 일체와 되어 별개의 형상을 가진 것이 아니니(法性圓融無二相)/ 여러 존재들은 변동함이 없어 본래 고요하다(諸法不動本來寂)/개념과 형상을 초월하여 무엇이라고 규정지을 수 없으니(無名無相切一切)/완성된 지혜로서의 부처만이 아는 것이지 아무나 아는 경지가 아니다(證智所知非餘境)」의 四句로서 집약하였던 것으로서 마치 佳人(가인)은 화장(化粧)하지 않은 소안(素顔) 그대로가 아름다움인 것처럼 더 이상의 수식을 요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렇다 치고 말해보라. 이러한 四個의 구절에 대체 그대처럼 사유하고 유추하거나 분석하고 인식한 점이 있는가. 석가모니부처가 정각을 성취하면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전승되어온 문제에 관한 한 그대로가 한 개의 통짜인 무쇠처럼 주둥이를 대어 뚫어볼 무른 데가 없듯이 일체의 思辨的(사변적)인 접근이 허용되지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상법사가 연민(憐憫)의 정을 이기지 못한 나머지 자신에게 돌아올 비난과 책임을 무릅쓴 채 사변적 차원에서 주저 없이 말하기를「진성이 매우 깊어 아주 미묘하다」고 한 것으로서 이와 같은 말을 한 것만으로도 벌써 충분하리만큼 진흙과 물을 묻혀가며 세속의 수렁에 빠진 것이라 할 것인데 내가 오늘 다시 주석까지 붙이고 있으니 그 허물이 매우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앞서 말한「존재의 본성(法性)」이란 깨끗함(淨:정)과 더러움(穢:예)을 아우르고 참된 것과 俗된 것에 공통된 것으로서 이른바「취할 수도 없고 버리지도 못 한다」고 함에 해당된다. 따라서 여기서 一切性 이라고 하는 측면을 배제하는 경우에는 존재세계의 본질(法界)을 살리지 못하게 되고 거기에다가 한 개의 차별적 현상(一事)이라고 덧붙이는 경우에는 순수세계(淸淨法界)라는 명칭을 붙일 수 없게 된다.

 

그런데 이곳에서 말하는「眞性」이라는 것은 별도로 인간존재(有情門)라는 입장으로부터「證悟하여 들어 간다」對象的 측면을 취한 것으로 일보 후퇴하여 편의상「眞性」이라는 개념을 차용한 것일 뿐이지 앞서 말한「존재의 본성(法性)」이외에 별개의 실체로서의 진성이 실재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만일에 소승에 속한 사람의 경우에는 점진적인 과정을 거쳐서 이해하기 마련이라고 하는 직관적 통찰력을 갖춘 사람(圓頓機)의 경우에는 일거에 이해하게 되어있다고 하든 어느 것이나 진작에 틀린 생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점진적으로 이해되는 것도 아니고, 직관적으로 통찰되는 것도 아니라면 한번 대답해보라. 이것을 무엇이라고 해야 옳은가. 점진(漸進)이니, 일거(一擧)이니 하는 문제는 우선 접어두고 어떤 것이 여기에서「매우 깊다」고 한 의의인가.


진실이라고 생각할 적에 실은 그것이 완전한 환상(幻想)이고 가상(假像)이라고 생각할 적에 실은 순수한 實相인 것으로서 본질이니 형상이니 하는 것도 부정되며 진실이니 가상이니 하는 것도 부정되는 것이지만 본질임과 동시에 形相이고 진실임과 동시에 가상(假像)이기 때문에「매우 微妙(미묘)하다」고 한 것이다.


문수보현의 속성인 미묘한 지혜(妙智)에 일치함에 이르렀다는 經過(경과)에도 다름없이 그것이 구도를 시작하였을 때의 初心(초심)인 것이므로「깊다」고 함이 있을 수 없는 것이며 보현보살의 영역인 깊은 수행의 관문을 통과한 경우 그것이 별개의 주체가 아닌 자기 자신인 이상「얕다」고 함도 있을 수 없다. 止揚(지양)된 것으로「有」는 이를 얻었다는 경우에도 단순히「있다」고 함에 속하는 것이 아니므로 진실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는 것이고 지양된 것으로서「空」은 이를 얻는다는 경우에도「空하다」고 함에 속하는 것이 아니므로 假像(가상)이라는 것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원래 통일적 본질(理)이 개념(名)과 언어(言)에 의하여 무엇이라고 규정되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근원적인 지혜는 수행과 오증(悟證)을 초월하는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아주 미묘하다」고 하는 것이니 대체 알기나 하는가.


『본질적 의미에서 부처를 있다가 없다가 하는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한 소리가 다른 한 소리를 이어 오는 것이 결국은 전체로서 한 소리인 것이니까.』

(莫謂如來成斷滅(막위여래성단멸) 一聲還續一聲來(일성환속일성래)


@시냇물 소리가 云云; 溪聲便是廣長舌(계성변시광장설) 山色豈非淸淨身(산색기비청정신)

 夜來八萬四千偈(야래팔만사천게) 他日如何擧似人(타일여하거사인)/소동파의 詩에서 인용.


『第6句』

不守自性 隨緣成(불수자성 수연성)

0.일정한 본성을 지키지 않고 상황(緣)에 應하여 성립한다.


일체의 존재(一切法)는 본래 일정한 본성이 없으며(無性) 일체의 본성(一切性)이란 일정한 지속을 가진 것이 아닌 까닭에(無住) 상황에 응함에 있어 제약을 받지 않는 것이고(隨緣不碍) 상황에 應함에 있어 제약이 없는 까닭에 일정한 본성(自性)을 지킴이 없이 上下, 四方 등에 미치는 十個의 공간(十方)과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三世)을 형성하는 것이다.

따라서 일정한 본성(自性)이라고 할 때도 그것은 여러 가지 존재들(諸法)이 본질상 형상(相)을 초월하여 원초적인 순수성임을 개념상 실체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니 알고 있는가.


『지난 해의 매화나무 이번 해에는 버드나무.

겉모습을 보거나 소리와 향기를 대하거나 옛날과 똑같구나.

(去年梅(거년매) 今年柳(금년류) 顔色 聲香 摠依舊(난색성향총의구)』


『第7句』

一中一切 多中一(일중일체 다중일)

0. 하나 가운데서의 一切이고 많음 가운데서의 하나이다.


왜냐하면 일정한 본성(自性)을 지키지 않고 상황에 應(緣)하여 변화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존재(一法)가 일정한 본성(自性)을 가진 것이 아닌 까닭에 일체의 존재(一切法)를 그 안에 갖추면서 하나의 존재를 이루고 있는 것이며 일체의 존재(一切法) 또한 일정한 본성(自性)이 없기 때문에 하나의 존재(一法)를 가지고 일체의 존재(一切法)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一) 가운데서의 일체(一切)로서 많음(多)이 하나에 대하여 제약이 되는 것이 아니고 일체(一切) 가운데서의 하나(一)로서 하나가 많음(多)에 대하여 제약이 되지 않는다. 이러한 이상 한 가닥의 터럭 끝에 과거 현제 미래의 여러 부처들(三世諸佛)이 어디에서고 중생을 구원(救援)하는가 하면 무한히 넓은 국토에서 일체의 중생이 빠짐없이 열반에 들기도 하는 것이지만 터럭끝같이 미세한 공간이든 국토처럼 광대한 공간이든 눈병 때문에 나타난 헛꽃(空花) 속의 대상일 뿐이고, 여러 부처들이든 중생이든 幻想 속의 事象(사상)(夢幻中物色)일 뿐이다. 비유하자면 허공이 비록 일체의 공간에 편재(遍在)하는 것이지만 또한 한 개의 티끌(一塵)처럼 작은 공간을 떠나서 있는 것이 아님과 같으니 허공이 建立하는 그 무엇을 알고 싶지 않은가.


『처마에 기대인 山色은 구름에 이어져 푸르르고

난간을 벗어난 꽃가지는 이슬을 둘러 향기롭다.

(의첨산색 依簷山色 연운취 連雲翠 출함화지 出檻花枝 대로향 帶露香)』


『第8句』

一卽一切 多卽一(일즉일체 다즉일)

0.하나가 곧 일체이며 많음이 곧 하나이다.


왜냐하면 하나(一) 가운데서의 일체(一切)이며 많음(多) 가운데서의 하나(一)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존재(一法)가 있음으로서 곧 일체의 존재(一切法)가 있는 것이고 일체의 존재(一切法)가 있음으로서 바로 하나의 존재(一法)가 있는 것이며 중생이 있음으로써 곧 여러 부처들이 있는 것이고 여러 부처들이 있음으로서 곧 중생이 있는 것이다.

 

허공과 같이 본체가 무제약적인 것인 이상 중생과 부처라는 것이 실은 同一性의 自己限定으로서 본질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며, 상황의 變容(변용)으로서 거기에 일정한 지속이 있음이 부정되는 이상(緣生 無住하야) 원인과 결과가 실은 同時存在인 것이므로 무수히 많은 원인들이 지금 이 순간(當念)을 떠나서 있는 것이 아니며 무한히 넓은 결과 또한 現存의 의식을 벗어나는 것이 아닌 것이니 허공이 동작하는 그 무엇을 알고 싶지 않은가.


『대나무 그림자 섬돌을 쓰는데 먼지 일지 않고

달빛 못 바닥에 잠기는데 물은 고요할 뿐』

(죽영소계진부동(竹影 掃階 塵不動) 월천담저수무흔(月穿潭底水無痕)


@緣生無住(연생무주): 緣生은 상황에 응한 상대적 전변. 연기와 같은 뜻이지만 연기가 원인쪽에 줌점을 둔 명칭임에 반하여 緣生은 결과쪽에서 전변을 보는 정도의 차이가 있다. 결국 상대적 전변의 현상 일뿐 실체적인 지속이나 고정함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第9句』

一微塵中 含十方(일미진중 함시방)

0.하나의 작은 티끌 가운데 상하 사방 등 열 개의 공간을 포함하고.


별것 아닌 한 개의 먼지(一微塵) 가운데 끝없이 전개된 존재세계가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서 수없이 많은 중생 및 부처가 정토(淨土)와 예토(穢土)의 하나 하나마다 가득차고 하나 하나마다에 퍼져 있지만 크기나 넓이에 過不足함이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이상 한낱의 먼지에 대하 대체 이러니 저러니 量적인 규정이 있을 수 있으며 헤아릴 수 없는 존재세계에 이러니 저러니 하는 조작 따위가 무슨 의미를 갖는단 말인가. 쯧쯧.

 

커야할 데서는 크고 작아야 할 데서는 작은 것으로서 한 개의 티끌안에서 상하사방등 열개의 공간(十方)을 따질 적에는 그 열 개의 공간이 작다고 하는 것이니 열 개의 공간을 가지고 한 개의 티끝의 크기를 헤아리는 것이므로 한 개의 티끌이 큰 것이 되는 것이다. 상황의 전변이라는 측면이 부정되기 때문이며(無緣起故) 동시에 일정한 본성이 있다는 측면 또한 부정되기 때문이니(無自性故) 어째서 그러한 것일까.


『어제밤 태양은 바다 속으로 날아들었는데

새벽하늘에 전날처럼 둥근 모습 날고 있네』

(昨夜(작야)에 金烏(금오) 飛入海(비입해)러니

曉天(효천)에 依舊一輪飛(의구일륜비)로다)


@一微塵 : 一塵과 같음. 極微塵(극미진=隣虛塵인허진), 極微의 7배가 微塵, 미진의 7배가 一塵임.

@無緣起故無自性故: 무연기는 繼起的 측면의 부정을, 무자성은 독자성의 측면을 부정한 것으로 상대성의 입장을 취한 것. 一塵과 十方은 공간의 크기임과 동시에 계량의 단위임을 표현한 것.


『第10句』

一切塵中 亦如是(일체진중 역여시)

0.일체의 티끌 가운데서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일체의 공간내에 편재한 존재세계(十方法界)는 그 하나하나가 모두 한 개씩의 작은 티끌(微塵)에 불과한 것일 뿐만 아니라 한 개의 작은 티끌조차 독자성을 가지지 못하는 것이다. 마치 빛과 같고 그림자와 같으며 또한 인다라의 망(網)을 구성하는 보주(寶珠)들이 각각 자기 속에 他者를, 他者 속에 자기를 서로 투영하여 반영을 계속함으로써 하나 하나의 寶珠 가운데에 여러 가지 모습이 끝없이 전개되어 있는 것과 같은 것으로서 하나 하나의 佛國土가 일체의 공간에 가득 차는가 하면 일체의 공간이 하나의 불국토에 들어가더라도 넘침이 없는 것이니 思慮(사려)에 의하여 인식되지도 아니하고 지혜로운 안목이 있다하여 관찰될 성질의 것도 아니다. 무슨 까닭인가.


『求道와 日常의 起居동작이 그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經行(경행)과 及坐臥(급좌와)  常在於其中(상재어기중)


@경해급좌와 운운; 법화경권5 분별공덕품의 게송. 다만 게송에는

「佛子住此地 則是佛受用 常在於其中 經行及坐臥」로 경행급좌와가 뒤에 온다.


@『말해보라, 행주좌와 이것이 무슨 상인고, 졸지말라』

(且道 卽今行住坐臥(차도 즉금행주좌와)  是甚麽相 休瞌睡)(시심마상 휴갑수)/야보


@『맑고 맑은 물 가운데 노는 물고기는 스스로를 모르며, 밝은 날 중에도 눈이 어두운 자는 보지를 못한다. 항상 그 가운데 있어 두루 다니며 앉으며 누우면서 사람들이 스스로 미혹해 밖을 향해 공연히 찾는다. 몸이 바다 가운데 있으니 어찌 물 찾는 것을 수고로이 하며 날마다 山嶺에 다니니 어찌 산을 찾을 것인가? 꾀꼬리와 꾀꼬리 소리가 둘이 아니며, 제비와 제비의 말이 한가지다. 다만 물건과 물건이 다른 물건이 아님을 알면 千差와 萬別을 묻지 말라』(淸淨水中 遊魚自迷 赫赫日中 盲者不覩 常在於其中 經行及坐臥 而人自迷 向外空尋 身在海中 何勞覓水 日行山嶺 豈用尋山 鸚與鸚吟 聲莫二 燕與燕語 語一般 但知物物非他物 莫問千差萬別) / 冶父頌 涵虛說誼/금강경 여리실견분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