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조국사 지눌의 무심(無心)공부(2)

2008. 7. 10. 22:33조사어록과 잠언

 

 <통영에서>

 

 보조국사 지눌의 무심(無心)공부(2)


첫째는 깨달아 살피는 것(각찰:覺察)이니,

공부할 때에 항상 생각을 끊고 일어나는 생각을 막는 것이다.

즉 한 생각이 겨우 일어나거든 곧 그것을 깨달아 부수는 것이니,

망념이 깨달음에 부서지면 다음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므로

깨달은 지혜마저도 버려야 한다.

망념과 깨달음을 함께 잊어버리면 그것을 무심이라고 한다.

그럼으로 조사는

『생각이 일어남을 두려워하지 말고

다만 깨달음이 더딤을 두려워하라.』고 하였다.

또 게송에 말하기를

『진심을 찾으려 하지 말고, 다만 견해를 쉬게 하라』고 하였으니

깨달아 살피어 망념을 쉬는 공부이다.


둘째는 쉼(휴헐:休歇)이니

이른바 공부할 때에 선도 악도 생각하지 말아 마음이 일어나면 곧 쉬고,

인연을 만나거든 곧 쉰다는 것이다. 옛 사람이

『한 가닥 흰 비단인 듯, 차가운 땅인 듯, 옛 사당 안의 향로인 듯하여

바로 망상을 끊고 분별을 떠나, 바보와 같고 말뚝과 같이 되어야 비로소 진심과 합한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망심을 쉬게 하는 공부이다.


셋째는 마음을 없애고 경계를 두는 것(민심존경: 泯心存境) 이다.

공부할 때에 모든 망념을 다 쉬어 바깥 경계를 돌아보지 않고

다만 스스로 마음을 쉬는 것이니,

망심이 이미 쉬면 경계가 있다고 무엇을 거리끼겠는가,

 즉 옛 사람이 『사람만 빼앗고 경계는 빼앗지 않는다.』는 법문이다.

그럼으로 어떤 이는 『여기 꽃다운 풀은 가득한 데 성안에 친구가 없다.』고 하였다.

또 방공(龐公:방거사)은

『다만 스스로 만물에 무심하면 만물이 항상 나를 둘러싸고 있다하여 무엇이 방해되랴』하였다.

이것이 곧 마음을 없애고 대상을 두어 망심을 쉬는 공부다.


넷째는 경계를 없애고 마음을 두는 것(민경존심:泯境存心) 이다.

공부할 때에 안팎의 모든 대상을 다 비워 고요하다고 관하고,

다만 한 마음만 두어 외로이 뛰어나고 홀로 서는 것이다. 그럼으로 옛사람이

『모든 법과 짝하지 않고 모든 대상과 상대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만일  그 마음이 대상에 집착하면 그것은 곧 망심이다.

지금에 이미 대상이 없어졌는데 무슨 망심이 있겠는가.

즉 진심이 홀로 비추어 도에 걸리지 않는 것이니, 옛사람이 이른바

 『경계를 빼앗고 사람을 빼앗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이는

 『동산에 꽃은 이미 다 떨어졌는데 수레와 말은 아직도 붐빈다.』고 하였다.

또 『삼천검객(三千劍客)은 지금 어디 있는고? 홀로 계획한 장주(莊周; 장자)가 태평 이룩했네』하였다.

이것이 바로 대상을 없애고 마음을 두어 망심을 쉬는 공부이다.


다섯째는 마음과 대상을 없애는 것(민심민경:泯心泯境)이다.

공부할 때에 먼저 바깥 대상을 비우고 다음에 안에 있는 마음을 없애는 것이다.

이미 안팎의 마음과 대상이 함께 비었는데 망심이 무엇을 좇아 일어나겠는가?

그러므로 관계(灌溪)스님도

『시방에 벽이 없고 사면에 문도 없어 발가벗었고 맑디 맑다.』 하였다.

즉 조사들의 사람과 대상을 함께 빼앗는 법문이다. 그럼으로 말하기를

 『구름이 흩어지고 물은 흘러가니 온 천지가 적적하게 비었구나.』 하였다.

또 『사람도 소도 모두 볼 수 없으니 정히 달 밝은 때로다.』하였다.

이것은 마음도 없애고 대상도 없애 망심을 쉬는 공부다.


 <불암산에서>

 

여섯째는 마음도 두고 대상도 두는 것(존심존경:存心存境)이니,

공부할 때에 마음은 마음의 제자리에 머무르고, 대상은 대상의 제자리에 머물러,

때로는 마음과 대상이 맞서더라도 마음은 대상을 취하지 않고, 대상은 마음에 오지 않아,

각각 서로 부딪치지 않으면 저절로 망념이 생기지 않아 도에 장애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경에 『이 법이 법의 자리에 머물러 세간의 모든 상(相)이 항상 머문다.』하였다.

 즉 조사가 말하는 사람과 대상을 모두 빼앗지 않는(인경불구탈:人境不俱奪) 법문이다.

그러므로 『한 조각 달이 바다에서 나오니 몇 집의 사람이 누각에 오른다.』고 하였다.

 또 『산꽃 천만 송이에 노는 사람 돌아갈 줄 모른다.』 하였다.

이것은 대상도 두고 마음도 두어 망심을 없애는 공부이다.


일곱째는 안팎이 모두 전체인 것(내외전체:內外全體)이니

공부할 때에 산과 강, 땅덩어리와 해와 달과 별, 안의 몸과 바깥 세상 등

모든 법이 다 진실의 본체이므로 고요히 비고 밝아 털끌 만큼도 다름이 없어

대천세계의 모래처럼 수많은 세계를 한 덩어리로 두드려 만든 것이니,

또 어디서 망상이 오겠는가? 그러므로 승조법사도

『천지가 나와 한 뿌리요, 만물이 나와 한 몸이다.』하였다.

이것이 곧 안팎의 전부가 본체로써 망심을 없애는 공부다.


여덟째는 안팎이 모두 용(用)인 것(내외전용:內外全用) 이니,

공부할 때에 일체 안팎의 몸과 마음과 세계의 모든 법과,

또 일체의 행동과 기타 쓰고 베풀고 하는 일들이

모두 진심의 묘한 용(用)이라고 보는 것이다.

온갖 생각이 막 일어나기만 하면 곧 그것이 진심의 묘한 작용이 앞에 나타난 것이니

모두가 그 진심의 묘한 작용일진댄 망심(妄心)이 어느 곳에서 발붙이겠는가?

그럼으로 영가스님은

『무명에 가린 우리 실성(實性)이 곧 불성(佛性)이며

허깨비 같은 빈 몸이 바로 법신(法身)이다.』하였다.

또 지공(誌公)의

『십이시가(十二時歌)에는 “새벽 인시(寅時)여,

미치광이 기틀 안에 도인의 몸이 숨은지라 앉거나 눕거나 그것이 원래 道인줄 알지 못하고

다만 허덕이며 고생만 한다.” 하였다.

이것이 바로 안팎의 전부가 다 진심의 用이라고 보고 망심을 없애는 공부이다.


아홉째는 체(體)와 용(用)이 뗄 수 없음을 알고 공부하는 것(즉체즉용:卽體卽用)이니

공부할 때에 비록 진심의 체에 고요히 합하여 오직 한 맛으로 비고 고요하나

그 가운데에 안으로 신령한 밝음이 숨겨 있으니 체가 곧 용인 것이다.

그러므로 영가스님은

『언제나 또렷하면서도 고요한 것(惺惺寂寂)은 옳지만,

또렷하지만 망상이면(惺惺妄想) 잘못이요,

고요하면서 또렷하면(寂寂惺惺) 옳지만,

고요하면서 벙벙하면(寂寂無記) 잘못이다.』하였다.

이미 고요한 상태에서는 벙벙한 것을 용납하지 않고

또렷한 상태에서는 흩어진 망상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어늘 망심이 어떻게 생기겠는가?

이것이 바로 체(體)가 곧 용(用)임을 알아 망심을 없애는 공부이다.


열째는 체와 용이 함께 튀쳐 나오는 것(투출체용: 透出體用) 이니,

공부할 때에 안팎을 나누지 않으며, 동서남북도 가리지 않고

사방팔방을 다만 하나의 큰 해탈문으로 만들어,

원만한 자리에서 體와 用을 나누지 않는다.

그리하여 털끌만큼도 빈틈이 없이 온 몸을 한덩이로 두드려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망심이 어디서 일어날 것인가?

옛사람도 『온 몸에 꿰맨 자리가 없고(통신무봉하:通身無縫罅)

위 아래가 온통 둥굴다(상하특단란:上下忒團圝)』고 하였으니,

이것이 곧 체와 용이 함께 튀쳐 나옴으로써 망심을 없애는 공부이다.


 <장흥 천관산에서>


이상의 열가지 공부하는 법은 전부를 다 쓸 필요는 없고

다만 한 가지 문만 택하여 공부를 성취하면 망심은 저절로 사라지고 진심이 곧 나타난다.

그 근기와 과거에 익힌 버릇이 어느 법과 인연이 있는지 그것을 따라 익혀가라.

이 공부는 공부한다는 생각이 없는 공부이므로 무슨 목적을 두고 그것을 따라 애쓰는 공력이 아니다.

이 망심을 쉬는 법문이 가장 긴요하기 때문에 치우쳐 많은 설명을 했으나 글에는 번거로움이 없다.


~<진심직설(眞心直說)에서/보조국사(普照國師) 술(述)/이기영 역(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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