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의 의미

2007. 6. 8. 00:20야단법석

 

<향일암의 해조관음>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의 의미

                                                                              

보(寶)란 보물이란 뜻이다. 보물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여러 가지 중요한 의미를 지닌 것이다. 보물은 값지고, 희귀하고, 불변하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이다. 값지고 희귀한 것은 재화성(財貨性)을 말하고, 불변 하다는 것은 역사성과 예술성이 배어 있기 때문이다. 그럼으로 가정에는 가보(家寶)를 두고 대를 이어 전하고 있고, 국가에는 문화재로서 국보(國寶)로 지정하여 보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불교에서 말하는 보(寶)란 범어로 마니(mani)라 한다. 중국인들은 이를 보(寶)라 번역하였다. <마니>라는 이 말은 때로는 구슬(珠), 이구(離垢: 번뇌를 여윔), 여의보주(如意寶珠), 여의주(如意珠)라고도 번역된다. 여의주라고 명명한 것은 보배구슬(寶珠;보주)이 구하는 것을 뜻과 같이 만들어 줌으로 여의(如意)라 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마음먹은 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여의라 한 것이다. 전설에 의하면 이 구슬은 용왕의 뇌 속에서 나온 것이라 하며, 사람이 이 구슬을 가지면 만 가지 독(毒)에 해를 입지 않는다고 하고, 또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는 공덕이 있다고 한다. 혹은 제석천이 가진 금강저(金剛杵)가 아수라와 싸울 때에 부서져서 남섬부주에 떨어진 것이 변하여 이 구슬이 되었다고도 한다. 남섬부주란 우리들이 사는 중생세계를 말한다. 그럼으로 제석천이 좋은 신이라면 악마는 나쁜 신이다. 그 사이에 존재하는 인간은 신의 선물로서 혜택을 받았다는 뜻이 된다. 또는 지나간 세상의 모든 부처님의 사리가 불법(佛法)이 멸할 때에 모두 변하여 이 구슬이 되어 중생을 이롭게 한다고도 한다. 마니주는 일정(日精)마니, 월정(月精)마니 등의 종류가 있다. 그리고 마니주는 범(梵), 한(漢)의 명칭으로 반야지혜(般若知慧)라고 일컫기도 한다.


언제가 KBS의 명화극장에서 「아틀란티스(atlantis)의 보물」이란 영화가 반영된 적이 있었다. 아틀란티스란 플라톤의 저서(著書)에 나오는 섬으로 지중해에 있는 지브롤타해협의 서쪽에 있었다고 하는 전설 속의 섬이다. 이 도시를 지배한 아틀란티스 족은 한때 서유럽과 북 아프리카까지 통치한 거대한 제국을 형성했었는데 지진으로 인하여 물 속에 가라앉았다고 한다. 영화의 스토리는 사라진 전설상의 이 섬을 배경으로 하여 그 도시에 숨겨진 보물을 찾기 위해 고대 역사학자와 마피아 갱단이 암투를 벌이는 것을 주제로 삼고 있다. 그런데 인상적인 것은 마지막 장면이었다. 갖은 고초 끝에 아틀란티스 섬을 찾아 그 섬에 감추어진 보물 상자를 찾아 상자를 열고 보니 거기에는 다이아몬드나 진주 에메랄드와 같은 무수한 값진 귀금속이 아니라, 낡아빠진 수천 권의 두루마리의 무수한 고서(古書)들뿐이었다. ― 그것이 아틀란티스의 최대 보물이었다.  


불교에서는 삼보 즉 3가지 보물을 두고 있다. 그 3가지 보물이란 무엇인가?

이는 불법승(佛法僧)의 3가지를 가리키는 말이다. 간략히 말하면 불보(佛寶)란 모든 부처님을 가리키는 말이고, 법보(法寶)란 부처님이 설한 가르침 즉 교법(敎法)을 말하며, 승보(僧寶)란 그 교법에 따라 수행(修行)하는 자를 말한다. 부처님을 가리킨다는 불(佛; Buddha)이란 말의 뜻은 각지(覺智)한다는 말이다. <각지>란 <깨달은 지혜>를 말하는 것이다. 그 깨달은 지혜는 위없는 진리이기 때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하고, 무엇과 비교할 수 없는 큰 깨달음이라 하여 <대각(大覺)>이라 하고 또 삿댄 도리가 아닌 바른 깨달음이라 하여 <정각(正覺)>이라 한다.

그런데 그 지혜는 어떤 것인가?

영원한 우주의 궁극적 실체요, 인간이 존재하는,

그리고 가야할 궁극의 도리를 말하는 것이다.


<지도론>二에서는『불타(佛陀)는 번역하여 지자(智者)라 하며, 유상(有常)과 무상(無常)등 일체 제법(諸法)을 보리수 아래에서 요요각지(了了覺知) 함으로 불타라 한다.』라고 했다. 또 대승이장(大乘二章)22에『불(佛)은 덕(德)으로 그 이름을 세운 것이다. 불(佛)은 각지(覺知)로 인하여 이에 따라 이름을 붙인 것이다. 각(覺)에는 2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각찰(覺察)>이니 이는 사람이 집안에 든 도적을 알아 체는 것(覺)과 같다. 둘은 <각오(覺悟)>이니 사람이 잠에서 깨어남과 같은 것으로 관찰(觀察)의 각(覺)은 번뇌장(煩惱障)에 대한 것으로 번뇌가 일을 침해하는 것이 도적과 같으며 오직 성각(聖覺)만이 그 해(害)가 되지 아니함을 각지함으로 <각(覺)>이라 한다고 했다. 주인이 도적이 온 것을 알면 도적이 능히 주인을 해할 수 없는 것과 같이 불(佛)도 그러하며, 각오(覺悟)의 <각(覺)>은 지장(智障)에 대한 것으로 무명이 혼침 하는 일이 잠자는 것과 같아서 성혜(聖慧)가 한번 일어나면 확연히 대오(大悟)함이 잠에서 깨어남과 같으므로 각(覺)이라 한 것이다. 이미 능히 자각하면 당연히 타인을 깨우칠 수 있으며 각행(覺行)이 궁만(窮滿)하므로 불(佛)이라 한다. 그 자각하는 것이 범부와 다르며 각타(覺他)하는 것이 분명히 이승(二乘)과 다르며 각행(覺行)이 궁만(窮滿)하여 보살과는 확연히 다르다』 고 했다.


법(法; Dharma)이란 말은 법궤(法軌)란 뜻이다. 법(法)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삼보(三寶)에서 말하는 법이란 부처님의 가르침(敎法)에 나타나 있는 진리, 열반을 의미한다. 軌(궤)란 규범이나 규칙을 뜻하는 말이다.


승보의 승(僧)은 범어로 상그하(saṁgha)라고 한다. 이는 화합한다는 뜻이다. 그럼으로 승보란 깨달은 진리에 화합하는 자라는 뜻이 된다.

 <감악산의 관음불>


2. 삼보의 종류


삼보란 전술한 바와 같이 불법승(佛法僧)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이 삼보에 대한 해석은 시대적으로 다소 차이는 있다. 말하자면 소승의 불교학자는 불법승을 하나로 분류하는데, 대승의 불교학자들 간의 분류는 이를 셋으로 설명하기도 하고, 또 넷으로 나누어 설명하기도 하고, 또 여섯으로 나누어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불법승의 궁극적 의미를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불법승을 더 세분한 것에 불과 한 것이다. 그럼으로 난삽(難澁)한 분류를 피하고 삼종삼보를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가. 삼종삼보

삼종삼보란 동체삼보, 현전삼보, 주지삼보를 말한다.


1)동체(同體)삼보


동체삼보라고 한 것은 본체론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진여법신을 본체로 삼고, 이것을 3방면을 나타내는 것이 동체삼보다. 다시 말해서 불(佛)은 우주의 진리이고, 법(法)은 만상차별의 법칙이고, 승(僧)은 만물이 서로 조화됨을 상징한다. 이를 철학적으로 말하면 삼보는 곧 동일(同一)과 이별(異別)과 조화(調和)라는 세 가지 원리가 된다.


우주만상은 그 체(體)에서 보면 모두 동일하고, 그 상(相)에서 보면 모두 이별(異別)이 있다. 그 다른 모양들이 서로 동일한 체를 가졌기 때문에, 서로 의지하고 의지되며, 주고받고 하면서, 조화를 이루는 것이 우주의 묘한 작용(妙用)이다. 그러기에 이 셋은 셋이면서 하나요, 하나이면서 셋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동체삼보의 뜻이 된다. 예를 들어 꽃과 나비를 생각해 보자. 꽃은 식물로서 생명을 지니고 있고, 나비는 곤충으로서 생명을 지니고 있다. 그럼으로 생명의 근원으로서 본다면 같지만 형상으로 본다면 나비와 꽃은 엄연히 다르다. 그런데 꽃은 꿀로서 나비를 유혹하여 번식하고, 나비는 꽃의 꿀을 먹기 위해 꽃의 번식을 도와주고 있다. 생명의 체(體)는 같지만 그 상(相)에서는 다르다. 그러면서 서로 서로가 상부상조하면서 어울러 살아가고 있다. 원리와 형상과 조화의 세계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2)현전(現前)삼보


이 동체삼보의 진리를 체득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분이 현전의 부처님(佛)이요, 현전의 부처님이 가르쳐 주신 것이 현전의 법(法)이며, 이 현전의 부처님에게 나아가 현전의 법을 듣고 그대로 수행하는 제자들을 현전의 승(僧)이라 한다. 다시 말해서 처음 깨달음을 이룬 자가 부처요, 그 깨달음의 모든 가르침이 법이요, 그 깨달음의 가르침대로 따르는 모든 자가 승이라는 뜻이다.


3)주지(住持)삼보


이러한 불법승(佛法僧) 삼보를 후세에 머물러 가지기(住持))위해서 불상(佛像)을 봉안하니 그 불상을 <부처(佛)>라 하고, 경전(經典)을 모셨으니 그 경전을 <법(法)>이라 하며, 승복(僧服)을 입고, 머리를 삭발하고, 출가한 사람들이 있으니 이분들을 <승(僧)>이라 한다.

 

 <내장산의 미륵불>

 

3. 삼보가 주는 메시지


삼보란 불교 교학에 있어서 중추가 되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모든 불교의 교설은 이 삼보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전문적 불교학자나 출가승이 아니더라도 삼보는 중생의 삶의 있어서도 그 의미를 지니고 있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진리는 속(俗)과 비속(非俗)을 분리하여 등져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면 삼보가 주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불보(佛寶)가 의미하는 궁극적 의의는 진리와 내가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을 알려 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내 마음이 우주의 실재임을 자각(自覺)하는 것, 그것이 바로 불보(佛寶)임을 뜻하는 것이다. 이는 모든 사물의 원리, 궁극적인 도리가 분리되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마음의 실체가 곧 불(佛)임을 뜻하는 것이다. 그럼으로 궁극적 도리는 바로 먼데서 시작할 것이 아니라 가까이 있는 이 마음을 아는데 있다는 것이 된다. <반야심경>에서 관자재보살이 『오온(나)을 관찰하니 모두 실체가 없다.』고 한 말이나,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한 말들은 곧 모든 진리의 근원이 <나>로 인하여 시작이 되고 있음을 알려주는 메시지인 셈이다. 대승에서 참 선(禪)을 주장하는 것도, <이것이 무엇인고?>하는 일체 화두(話頭)도 모두 나를 중심으로 하고, <나>를 테마로 하여 제시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 기인된 것이다. 모든 진리는 밖에서 찾지 말라. 그대 안에서, 그대의 진실한 자각을 통해서 이룩하라는 이 말은 곧 삼법인이 제시하는 불보의 의미다.


법보(法寶)란 상대적인 차별을 수용하고 의식의 편협적인 집착을 버리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내 마음이 삼라만상의 차별됨을 알고 인정하고 받아 드리는 것이 법(法)의 의미인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문자와 말로 된 경전만이 진리가 아니라 모든 진리가 다 부처님의 가르침이요, 부처님의 가르침이 모든 진리인 것처럼 꼭 문자만이 아니라 동체삼보의 원리에 입각하여 상대적인 모든 존재와 그 차별성의 의미를 수용하라는 뜻이다.


삼라만상은 모두 상대적으로 차별되어져 있다. 모난 것이 있으면 원만한 것이 있고, 위(上)가 있음으로 아래(下)가 있고, 왼쪽(左)이 있음으로 오른쪽(右)이 있다. 상하좌우(上下左右)는 착한 것(善)도 아니요, 악(惡)한 것도 아니다. 둥글고 모난 것이 행복도 아니고 불행도 아니다. 삼라만상의 그 실체는 선악(善惡)과 미추(美醜)를 벗어나 있는 것이다. 삼라만상의 그 실체는 행복과 불행을 벗어나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 기억해야 할 것은 상대적으로 느끼는 감정, 좋고 나쁘고, 선하고 악한 감정은 사람의 마음에 따른 것인지 사물에 따른 것이 아니다. 예컨대 추운 겨울이 있음으로 따뜻한 봄을 좋아하지만 겨울이 악이고, 봄이 선한 것이 아니다. 집안의 가장(家長)이 남자라고 해서 남자는 높은 것이고 여자가 낮은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쓴 것을 싫어하고 단 것을 좋아하지만 단 것이 행복이 아니요, 쓴 것이 불행이 아니다. 사람들은 늙은 할미꽃을 싫어하고 붉은 장미를 좋아하지만 붉은 장미가 아름다움이 아니요, 할미꽃이 추함(醜)함이 아니다. 분노와 미움을 악(惡)이라 하고 사랑을 선(善)이라 하지만 미움이 악이 아니고, 사랑이 선이 아니다. 이와 같이 모든 바른 진리는 선악과 미추를 떠나 있는 것이다. 모든 상대적인 차별의식을 버리고 수용하는 마음 자세를 갖는 것이 바로 법보의 메시지가 된다.


승보(僧寶)란 궁극적 목적과 현실의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목적이란 궁극적 실상이요, 존재의 의미가 된다. 현실이란 그 궁극적 실상이 드러나 보이는 개별 현상 세계다. 우리는 그것을 현실, 환경, 조건이란 말을 사용한다. 그럼으로 원리와 현상의 조화, 다시 말해서 목적과 현실을 조화롭게 운용하는 실체가 곧 승(僧)인 것이다. 목적이 정(正)이라면 현실은 항상 반(反)이 된다. 그럼으로 원리와 현실은 정(正)과 반(反)의 상대적인 위치에 서 있다. 정(正)과 반(反)의 대립성이 성립된다. 이 상대적인 정과 반의 합이 바로 조화성이 된다. 그래서 중론이 이르기를 『여래가 중생이요, 중생이 바로 여래다.』라고 했고, 화엄에서도 또한 이 마음과 중생과 부처가 다르지 않다고 한 것도 이런 이유에 있는 것이다. 선악과 시시비비, 속과 비속을 분리하면 다르지만 이런 변증법의 삶이 곧 중생의 삶이 되고, 진리를 찾아가는 자의  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바로 승보(僧寶)를 둔 메시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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