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12. 3. 12:08ㆍ야단법석
사성제(四聖諦)와 인간성 회복
알베르트 슈바이처가 노벨 평화상(1952년)을 수상하기 위해
오슬로를 방문했을 때 그는 세상 사람들에게 이렇게 호소했다.
『인간은 초인(超人)이 되었다. …
그러나 초인간적인 힘을 지닌 이 초인은
초인간적인 이성(理性)의 수준에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그의 힘이 커짐에 따라 점점 그는 가련한 인간이 되고 있다 ….
초인이 되면 될수록 자기 자신이 비인간적으로 된다는 사실에
우리는 각성해야만 한다.』
현대인들은 지식을 만능으로 여겨 살아가지만
생명을 잃은 차가운 대리석과 같은
냉혈존재로 추락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들은 오로지 경쟁에 승리하기 위해
투쟁과 갈등만으로 살아가는
아수라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토록 갈구해 온 이 산업사회의 이상은
우리에게 행복 대신 번뇌와 고통을 안겨주고 있다.
그것은 산업사회가 안고 있는 다름 아닌
두 가지 심리학적 전제(前提)를 씨앗으로 품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로 인생의 목적은
사람이 느끼는 어떤 욕망이나 주관적 요구까지도
만족시키는 것이라고 정의되는
행복 즉 최대한의 쾌락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는 철저한 쾌락주의를 의미하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자기중심주의, 이기심 그리고 탐욕은
이 체계가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서 조장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마치 핵전쟁을 막기 위해서 강대국들이 서로 핵을 보유하듯
조화와 평화를 위해서 탐욕과 이기심이 필요하다는 이유에서이다.
그러나 그 결과,
그것을 갈구해 온 이 사회가 지금 어떻게 되어 있는가?
모든 욕망의 무한정한 충족은 복리를 가져다주지 않으며,
행복에 이르는 길도 되지 못하고
최대의 쾌락에 이르는 길도 아니었다.
사회는 비윤리적, 비도덕적 행위가 난무하고,
거리에는 폭력과 사기가 난무하고,
갈등과 소요, 비난과 적대행위가 그치지 않고 있지 않는가?
조화와 평화를 위하여 필요하다는 이기적인 마음,
자기중심주의 내지 자기 생활의 독립된 주인이 된다는 꿈은
우리 모두가 피라미드와 같은 관료제에 얽매여
마치 맞물려 돌아가는 기계의 톱니바퀴가 되어
사고도, 감정도, 기호도, 정치와 산업 및 그것들이 지배하는
매스 커뮤니케이션에 의해 조작되고 있지 않는가?
뿐만 아니라 경제의 진보는 가난한 자들의 진보가 아니라
가진 자들만을 위한 진보가 되고,
국제적으로도 여전히 풍요한 나라에 국한되고 있지 않는가?
부익부(富益富)요, 빈익빈(貧益貧)이 심화되고,
부자와 가난뱅이 사이의 간격은 더욱더 벌어지고 있는
이 세상살이가 어찌 조화롭고 평화롭다고 할 수 있을까?
더욱이 그렇게 외쳐대는 기술의 진보는
생태학적 위험과 또 다른 핵전쟁의 위험을 낳고 있으며,
질병을 치료하기 위한 생명공학은
인간의 가치를 마치 공장에서 공산품을 만들어 내듯
그런 물건처럼 다루어질 날도 멀지 않았는데
그것이 어찌 산업사회가 추구하는
미래의 평화요 쾌락이 될 수 있겠는가?
한마디로 우리가 갈구하는 이 산업사회는
참된 자아를 등지고
오관을 통한 쾌락과 욕망에 의지하여,
탐욕과 이기주의 내지 자기중심주의로 말미암아
나락의 길로 치닫는 투쟁과 갈등의 사회가 되었다는 의미다.
욕망이란 속성은 좌절되면 고통과 번뇌가 일고
또한 욕망이 성취되면 또 다른 욕망을 불러와
번뇌와 고통을 낳는 끊임없는 고(苦)의 굴레가 되기 때문이다.
부처님도 이르시길
『욕망의 속박만이 하나의 속박으로서
능히 중생을 얽어매고
긴긴 밤의 윤회로 달려가게 함을 본다.』라고 했다.
덴마크의 종교철학자 키에르케고오르라는 사람이 있다.
니체와 더불어 실존주의의 창시자로 일컬어지는 사람인데
그가 이런 말을 했다.
『사람은 자기 자신과 관계하는 유일한 존재다.』
이는 곧 사람이 다른 존재와 구별되는 것은
자기 자신을 문제 삼고
무의식적으로라도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를 갖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 자신이 진정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행복할 때가 아니라 괴롭고 고통스러울 때에 마주하게 된다.
내가 처한 고통스러운 이 처지와 환경을 생각하게 되고,
내가 관계하는 사람들을 생각하게 되고,
인생의 의미를 되새겨보게 된다.
다시 말해서 산다는 의미를 되새겨 보게 되고,
나라는 존재의 삶과 죽음의 의미를 되새겨 보게 된다.
그러나 가슴에 남는 것은 아지랑이를 쫓아가는 나그네처럼
무상한 인생의 허무요, 공허함만이 맴도는 번뇌의 고통뿐이다.
태어난 고통을 알지 못한다고 하드라도,
늙고, 병들고, 외로움에 시달리며,
언젠가는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죽음의 고통,
갖고 싶은 것을 가지지 못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을 하고,
미운 사람과 함께 해야만 하는 이 괴로운 삶의 여정 …
그래서 부처님은 사람이란
이 8가지 고통(八苦)의 늪을 헤매다가 간다고 하지 않았는가?
오늘날 지성인들이 윤리도덕을 주창하고,
탐욕을 절제하고, 이기적인 사고를 줄임으로서
인간성의 회복한다고 부르짖지만
궁극적인 것은 절제와 줄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생로병사 하는 그 삶의 고통의 실체가 무엇인지 자각하고
거기에서 참된 자아의 길을 찾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 중 고집멸도(苦集滅道)라는 사성제의 교훈이
진리 중의 진리로 동서양을 막론하고 회자하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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