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3. 4. 14:01ㆍ야단법석
<수락산>
이 뭐꼬(是甚麽)의 의미
하늘은 아무 말이 없어도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철을 한치도 어긋남이 없이 운행하고, 땅은 말이 없어도 티끌하나 가리지 않고 만물을 자라게 한다. 사철이 운행되는 근원에서 무형(無形) 무상(無相)의 불심(佛心)의 본체를 보고, 만물이 유전 변화하는 곳에서 불심의 작용을 보는 자라면 이는 진정 도인이요, 깨달은 자다. 여기에 부처를 찾는 의의가 있고 옛 조사나 선사들은 갖가지 방법으로 질문을 던졌고, 깨달음을 구하는 구도자들은 이를 공안으로 삼아 온 삶을 여기에 걸고 참구(參究)해 왔다.
“시심마(是甚麽)” ― 이 한마디 말의 의미를 찾기 위해.
<벽암록>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비가 내리고 있는 어느 날 경청화상이 한 중에게 물었다.
“문밖에서 들리는 것이 무슨 소리냐?”
중은 답했다.
“빗방울 소리입니다.”
경청화상이 말했다.
“너는 빗방울에 사로 잡혀 있구나!”
그러자 그 중은 되물었다.
“화상께서는 저 소리가 무엇으로 들립니까?”
경청화상은 답을 하려다 머뭇되면서 이렇게 말했다.
“자칫했으면 나도 사로잡힐 뻔했지.”
그러자 그 중은 되받아 질문했다.
“자칫하면 사로잡힐 뻔하시다니 그건 또 무슨 뜻입니까?”
그러자 경청화상은 이렇게 대답했다.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는 그것은 그런 대로 쉽지만 있는 그대로 현실을 표현하기란 어려운 것이다.”
우리는 모든 사물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다. 보고 듣기는 쉬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알기는 어렵다. 알기는 그래도 쉽지만 그것을 몸으로 체감(體感)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 체감하기는 그래도 쉽지만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는 더욱 어렵다.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것을 표현하기란 더 더욱 어렵다. 그것은 언어도단(言語道斷)이다. 이름과 말이 끊어진 경계다. 그래서 옛 조사님들은 묘한 방법으로 이를 표현했다. 어떤 이는 눈썹을 쫑긋하고, 어떤 이는 <할>을 외치고, 어떤 이는 방망이를 휘두르고, 어떤 이는 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이것이 뭐꼬?”
부처, 불성(佛性), 진심(眞心), 여래, 진여…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은 없다. 궁극적인 것은 본래 이름이 없다. 모든 것은 이 마음에 귀결되지만 무어라 정의할 수 없는 것이기에 경은 갖가지 이름을 부쳤다. 근기에 따라 눈 높이를 맞추어 이름 아닌 이름을 부쳤다. 인연 따라 갖가지 이름을 붙였다.
그래서 일찍이 보조국사(普照國師)는 <진심직설>에서 이렇게 설하셨다.
『<보살계>에서는 심지(心地)라 하였으니 온갖 선(善)을 발생하기 때문이요, <반야경>에서는 그것을 보리(菩提)라 하였으니 깨달음의 체(體)가 되기 때문이요, <화엄경>에서는 법계(法界)라 하였으니 서로 사무치고 융통하여 포함하기 때문이요, <금강경>에서는 여래(如來)라 하였으니 온 곳이 없기 때문이요, 또 <반야경>에서는 열반(涅槃)이라 하였으니 모든 성인들이 돌아가는 곳이기 때문이요, <금광명경>에서는 여여(如如)라 하였으니 항상 진실하고 변하지 않기 때문이요, <정명경>에서는 법신(法身)이라 하였으니 보신(報身)과 화신(化身)이 의지하는 바이기 때문이요, <기신론>에서는 진여(眞如)라 하였으니 생멸이 없기 때문이다. <열반경>에서는 불성(佛性)이라 하였으니 삼신(三身)의 본체이기 때문이다. <원각경>에서는 총지(摠持)라 하였으니 공덕을 흘려내기 때문이요, <승만경>에서는 여래장(如來藏)이라 하였으니 숨겨 덮고 포용하였기 때문이다. <요의경>에서는 원각(圓覺)이라 하였으니 어둠을 부수고 홀로 비추기 때문이다. 이는 모두 인연 따라 이름을 지은 것이다.』
불성, 법계, 진여, 원각, 총지, 보리… 이 모두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불과하다. 가리키는 손가락이 달이 아니듯이, 이 모든 이름은 답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이정표에 불과하고 식탁에 나온 메뉴판과 같다. 그대가 인연 따라 방향을 가리키듯 그런 이름은 인연 따라 지어진 것이다. 그것은 강을 건너기 위해 마련한 나룻배의 이름을 나열한 것에 불과하다. 그대가 깨닫기 전에는 이것들은 이름에 불과하다. 그대가 그 실체를 감응하기 전까지는 그것은 허망한 이름에 불과한 것들이다.
인연 따라 지어진 것이란 이는 마음에 기인한 것이다. 그래서 경에서는
『삼계는 오로지 이 마음이 지은 것이요,
모든 존재는 알음알이에 불과하다.(三界唯心造 萬法唯識)』
라고 한 것이다.
사람들이 말하는 지옥과 극락도 허망한 마음이 지어낸 욕망의 세계를 인연하여 지은 것이요, 법계와 진여, 불성, 여여 … 등등도 눈앞에 보이는 현상의 세계와 보이지 않는 존재의 본성과 인연하여 지어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 18계도, 육도도 이 마음의 분별에서 인연하여 이름이 붙여지고, 모든 존재의 본질을 나타내는 심오한 이름도 그 실체가 아닌,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모양 분별에서 인연한 것이다. 이런 이름에 매달리는 그대의 마음은 허망한 마음이요 참 마음이 아니다.
그럼으로 <시심마> ― 이것은 무엇을 찾는 것이 아니다.
이름을 지우고, 그대 사념(思念)을 지우고, 과거의 기억을 지우고, 분별을 거두고, 무심의 마음으로, 텅 빈 마음으로 돌아가 사물에, 모든 경계에 대한 마음의 울림을 듣는 것이 시심마의 의미다.
<불장경>에 이르길
『일체의 모든 차별적인 견해는 허망한 무명망상의 인연을 따라서 일어난다. 이러한 사념을 정견이라고 여긴다면 그는 사견을 지닌 사람이다. 성법(聖法) 가운데에서는 일체 모든 견해의 근본인 생멸 하는 무명번뇌를 뽑아 끊어버리며, 그러한 망상의식의 표현인 모든 언어의 길을 다 끊는다. 이는 마치 허공 에 손을 휘젓지만 손에 걸림이 없는 것과도 같은데, 모든 사문(沙門)들이 닦아야 할 법 또한 모두 이와 같아야만 한다.』
라고 하였다.
시심마 - 이는 정견(正見)을 구하는 마음이다. 분별을 버린 무심의 마음을 구하는 것이다. 분별을 버린다고 해서 그대가 바보가 되는 것은 아니다.
분별이 사라진 무심(無心)은 무지(無智)가 아니기 때문이다. 허공에 손을 휘저어도 걸림이 없듯이 모든 사념을 놓아버리고, 과거의 기억에 메이지 않는 마음이지만 그것은 무지가 아니다. 그것은 맑은 거울과 같은 것이다. 온갖 것을 그대로 밝히 비추는 거울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사념과 기억으로 때묻은 마음이 아니기 때문에 본래의 참 마음(眞心)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옛 사람도, 지금의 사람도 <시심마> 라는 의문을 가지고 그 해답을 찾지만 그것은 정의된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그런 무심의 경지에 오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는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시심마?
모든 존재는 이 한 마음에 귀결된다.
그럼으로 이 질문은 궁극적으로 진심을 찾는 것으로 돌아간다.
무엇이 진심인가?
참 마음이란, 본래 마음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능엄경>에 이르길 “허망을 떠난 것을 진(眞)이라 하고, 신령하게 밝히 보는 것을 심(心)이라 한다.” 고 했다.
무엇이 허망이며, 무엇이 신령하게 밝히 보는 것인가?
그대는 눈앞의 세계를 본다. 그리고 과거의 기억과 분별하는 망념을 따라서 다른 세계와 상대적인 모습으로 대비시킨다. 검은 것과 흰 것을 구별하고, 둥글고 모난 것을 구별하고, 옳고 그름을 구별하고 선악을 구별한다. 이는 마음 자체를 가지고 그 마음을 상대적인 마음으로 여기고 구하고 다스리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의 분별이란 마치 어떤 사람이 눈덩이를 던졌을 때 개가 던진 사람을 물지 않고, 눈덩이를 쫓아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 굴러가는 눈덩이는 굴러갈수록 더욱 커지듯 사람이 자기의 분별을 따르면 분별은 또 다른 분별을 낳는다. 빛을 등지면 그림자가 더욱 길어지듯 분별은 분별의 꼬리를 물고, 의심은 의심의 꼬리를 물고 커져만 간다.
그럼으로 알아야 할 것은 <시심마>란 밖을 향한 질문이 아니라 안을 향한 질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질문은 질문 속에 답을 가지고 있는 질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질문은 말없는 질문이요, 말없는 답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대의 마음이 만유와 감응하기 위한 <마음의 울림>을 준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마음 밖에서 말로써 찾는 모든 존재의 실체는 분별과 혼란을 들어낼 뿐 허망하고, 거짓이라는 것이다. 모든 이름은, 진리라는 이름으로 정의된 것들은 허망한 이름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눈앞에 전개되는 변화하는 현상을 두고 사람들은 갖가지 말을 하지만 그 모든 모습들은 본성을 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그럼으로 현상을 두고 이르는 모든 말은 허망한 것이며 그기에 붙여진 이름 또한 허망한 것이다.
그럼으로 <유마경>은『생멸하는 마음으로 진리를 논하지 말라.』고 했고, <금강경>은 『무릇 객관의 대상으로 존재해 있는 차별적인 모습들은 그 모두가 허망한 망상의 모습들이다. 모든 허망한 망상들의 모습들이 그 실체의 모습 아닌 이치를 본다면 진여법성 세계의 실제 모습을 즉시 보리라.』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是諸相非相 卽見如來)
라고 하지 않았던가?
허망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차별적인 모습을 보는 것이다. 신령하게 밝히 보는 것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평등하게 보는 것이다. 그대 앞에 장미꽃이 있다. 그대는 꽃과 줄기를 본다. 그 둘은 다르지 않지만 둘로 본다. 그러나 꽃은 줄기에서 나왔고, 줄기에서 꽃을 피웠다. 그 둘의 경계는 없다. 꽃과 줄기의 경계는 그대 마음에서 나온 것이지 장미는 그 둘의 경계가 없다. 그럼으로 그 둘은 다르지 않다. 꽃과 줄기는 분리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장미다. 나눌 수 없는 것을 나누어서 보기 때문에 분별이 생기고, 분별이 생기니 이름이 생기는 것이다.
그대는 세상을 바라본다. 강을 보고, 나무를 보고, 산을 보고, 하늘을 본다. 허공의 별을 보고, 태양과 달을 본다. 그러나 보는 그대는 세상이 만든 것이다. 그대와 세상은 닭은 계란과의 관계와 같다. 닭은 계란과 분명 다르다. 그러나 닭은 계란에서 나오고, 계란은 닭에서 나온다. 닭과 계란의 차이는 그대의 기억과 눈의 알음알이에 인연한 것이다. 그것은 본질이 아니다. 세상은 그대를 만들고, 그대는 세상을 만든다. 그럼으로 그대가 세상이요, 세상이 그대다. 그대는 만유에서 나왔지만 만유와 다르지 않다. 그대가 우주요, 우주가 그대다. 이렇게 볼 수 있으면 신령하게 밝히 보는 것이다.
신령하게 밝히 보는 것을 일러 정견(正見)이라고 한다. 차별에 따른 분별심 없이 보는 것이 다름 아닌 정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에 이르기를『정견이란 높낮이 없이 모든 사물을 평등하게 관찰하는 것이다. 정견은 일체의 차별적인 견해가 없다. 왜냐하면 모든 차별적인 견해를 지니고 있는 것은 다 삿댄 견해(邪見)이기 때문에 일체의 차별적인 견해가 없으면 그 즉시 정견(無念)이다.』라고 했다.
시심마, 이는 찾는 것이 아니다. 궁극적인 것, 진리라는 것은 찾을 수도 찾아지는 것도 아니다. 진리는 무엇이라 정의될 수 없는 그런 것이다. 무어라 정의된다면 그것은 이미 진리가 아니다. 그것은 단지 감응하고 느낄 수 있을 뿐이다. 감응이란 그대의 분별을 거두고 무심으로 돌아가 만유와 하나로 융해되고 수용되어 질 때 느껴지는 것을 의미한다.
시심마 - 이는 질문이 아니다. 이는 답을 지닌 질문이다. 질문 속에 답을 지닌 질문이다. 이는 존재의 울림과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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