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10. 31. 23:39ㆍ야단법석
고타마 싯달타의 출가(出家)
고타마싯달타가 태어났을 때 고대 인도는 시대상황이 브라만이란 종교가 흔들리고 있을 때였다.
고대 인도에서는 4가지 신분계급 즉 사성(四姓)제도가 있었다.
신분적으로 본다면 브라만이란 인도의 사성(四姓)제도 중 최상의 계급인 사제(승려) 계급을 뜻한다.
4가지 계급이란 승려계급인 브라만, 왕족계급인 크샤트리아, 일반 서민계급인 바이샤,
그리고 노예계급인 수드라를 말한다.
고타마 싯달타는 정반왕의 왕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크샤트리아의 계급에 속한다.
고타마 싯달타가 태어날 당시 브라만교의 문화는 이미 쇠퇴해 가는 경향이 있었고,
갠지스 강의 중류지역은 둘째 계급인 왕족과 셋째 계급인 서민들 사이의 신흥계급이 실권을 장악해가고 있었다.
그런 속에서 군소 국가들이 서로 할거하면서 세력을 다투고,
육사외도 등 비정통파의 사상가들도 많이 출현하여 논쟁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기성종교인 브라만을 불신하는 새로운 사상이 다양하게 일어나게 된 것이다.
이는 마치 중국역사에서 보듯이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제후들이 부국강병을 위해 기치를 들자 제자백가(諸子百家)들이 모여 춘추전국시대를 이룬 것과 같이
당시 시대상황도 그러했다. 따라서 사람들은 이런 상황에서
이상적인 왕인 전륜성왕이 출현하여 국가를 통일하길 바라는 한편,
사상의 혼란에 대해서는 진리를 깨달은 사람, 즉 석가모니의 출현을 바라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석가모니가 속하는 나라는 당시 강대국의 하나인 <코살라> 라고 하는
대국가에 예속된 <카필라>라고 하는 적은 성(城)이었다.
그럼으로 그 세력을 미루어 보더라도 국가를 통일할 만큼의 강한 힘이 없었다.
그의 유년시절은 사색에 잠기길 좋아하는 극히 내성적인 성격이었고 소극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아버지 정반왕은 그 성격을 밝게 하고자 여러 가지로 노력한 사실이 경전에 나타나 있는 것으로 볼 때
이는 분명한 것으로 추측된다.
〈증지부 增支部 Anguttaranikaya〉 경전에 의하면,
석가모니 자신이 뒷날 그의 양육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전해진다.
『비구들이여, 나는 세심하게 양육되었다. 몹시 세심하게,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세심하게 양육되었다.
내 아버지의 거처에는 연꽃이 덮인 못들이 있었다.
하나는 푸른 연꽃의 못이고, 또 하나는 붉은 연꽃의 못이며, 다른 하나는 하얀 연꽃의 못이었는데
이것들은 바로 나를 위한 것이었다……카시(히말라야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는
전설상의 영산)에서 산출된 최상품의 천으로 내 두건을 만들었고,
카시산(産)으로 내 상의와 속옷과 외투를……나에게는 3개의 궁전이 있었다.
겨울에 지낼 곳과 여름에 지낼 곳과 우기(雨期)에 지낼 곳이었다.
비구들이여, 비가 내리는 4개월 동안
나는 우기의 궁전에서 오직 악사들에 둘러싸여 즐기면서 궁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정반왕은 문무에 걸쳐 특출한 능력을 보였지만, 싯다르타 왕자는 그렇지 못한 것 같다.
그는 내성적이며, 사색을 좋아하였든 모양이다.
그래서 왕은 관심을 돌리기 위해 그를 결혼시키기로 생각하고 야쇼다라를 그의 배필로 맞게 했다.
예수의 어린 시절이 베일에 가려져 있듯이 석가모니의 청년시대를 말하는 전기도 상당히 늦게 성립된 것이어서
그 진위를 정확히 판별하기란 다소 곤란한 점이 있지만
경전에는 사촌동생인 데바닷타 등과 무예를 겨루고서 승자가 되어 아내를 선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정반왕은 호사(好事)와 안락(安樂)을 아들에게 제공함으로써
그의 마음을 돌리려고 온갖 노력 다했지만 젊은 왕자의 생각은 언제나 다른 곳에 있었고,
다른 관심사에 몰두했다. 석가모니는 나중에 젊은 시절을 회상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전한다.
『스스로 늙어 가는 것이며, 그것을 피할 수 없는데도 어리석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노쇠함을 보고는 골똘히 생각하여 괴로워하고 부끄러워하고 혐오한다.
나 역시 늙어가며 늙음을 피할 수 없다. 자신이 바로 늙어가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늙음을 피할 수 없는데도,
이것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하며 괴로워하고 부끄러워하고 혐오하는 것이리라.
내가 이렇게 관찰했을 때, 나는 청년이면서도 청년의 의기가 완전히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나 역시 병들 것이며 병을 피할 수 없다……내가 이렇게 관찰했을 때,
나는 건강하면서도 건강의 의기가 완전히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나 역시 죽을 것이며 죽음을 피할 수 없다……
내가 이렇게 관찰했을 때, 나는 생존해 있으면서도 생존의 의기가 완전히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이와 같은 그의 관심사는 출가의 원인을 밝히는 사문유관(四門遊觀)의 전설과 직결된다.
싯다르타는 인생의 문제를 생각하고 그 곤란에 봉착하여
그것을 해결하고자 하는데 큰 희생을 치러야 할 전환기를 맞게 되었다.
그래서 아들 라훌라(Rahula)가 태어나자
그는 「라후(장해․악귀라는 뜻)가 생겼다. 속박이 생겼다.」라고 말한 데서
<라훌라>라고 이름 지었다고 경전에 나타나 있다.
이 무렵의 일로 유명한 것이 바로 사문유관(四門遊觀)의 전설이다.
어느 날 마부와 함께 동문을 거쳐 외출했을 때, 싯다르타 왕자는 허리가 굽고,
막대기에 의지하면서 걸을 때마다 비틀거리는 백발의 노인을 보았다.
그 사람에게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묻는 왕자에게 마부는, 그는 늙었으며 모든 사람은 오래 살면 노인이 된다고 했다.
그는 되돌아가서 상념에 빠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념은 다른 문으로 나섰을 때 목격한 광경에 의해서도 계속된다.
어느 날 남문을 거쳐 다시 외출했을 때는 심한 병으로 쓰러져서
자신의 배설물 위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병자를 어떤 사람이 일으켜 세우는 것을 보았으며,
마부로부터 이는 병든 사람이며 모든 사람들은 병들기 쉽다는 설명을 듣게 된다.
서문으로 나섰을 때는 장례식의 행렬과 마주쳤다.
마지막으로 북문을 거쳐 나섰을 때는 한 사문이 조용히 걸어가고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그 사람의 평화롭고 침착한 태도에 감명 받은 왕자는
고통 속에서도 그토록 평정함을 견지할 수 있는 연유를 깨닫기 위해 결국 출가를 결심했다는 것이다.
동서남북에 늙음․병․죽음․출가를 배치한 것은 차가운 비평가의 눈으로 본다면 시적 묘사에 지나지 않고,
세속의 삶과 그로부터의 이탈을 대비하여 출가의 동기를 교묘하게 묘사해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충분히 성장한 나이에 이른 그가 노인과 병자와 장례식 혹은 시신을 보지 못했다고는 믿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전설은 오늘날 보편화된 심리학적 요인을 고려한다면 그렇게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가령 매일 타고 다니는 자동차가 단지 평범한 수송수단으로 여겨졌든 것이
어느 날 대형 자동차 사고를 일으켜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자동차는
물어 젖은 신문지 조각처럼 볼품없이 찌그려져 너덜너덜 해진 것을 보고는 무서운 흉기(凶器)로 느껴지듯이,
일반적인 현상이라도 그것은 어느 날 예기치 않게 복합적인 상황으로 인해
사람에게 심리적 위기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전설에서 늙음․병․죽음은 대체로 인간의 고통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인간이 직면하는 공통적인 고통을 심각하게 생각하고,
세상에 대한 연민에서 그는 출가하여 고통의 문제에 대한 답을 찾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비록 일부 비판적 종교학자들이 이것은 사실이 아니라 후대에 성립된 전설이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이는 분명 석가모니가 인생의 고뇌를 어떻게 강하게 드러내고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동시에
출가의 동기를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시대적 배경을 고려한다면 석가모니의 젊은 시절에 대한 전설은
그가 원래부터 사색적인 성격의 소유자였고,
또한 당시의 약육강식이라는 국가간의 다툼을 보고 석가족의 운명을 생각할 때,
젊은 싯다르타 왕자로서는 아무래도 깊은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것은 고려한다면
출가할 수밖에 없는 어떤 불가항력적인 면을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실제로 그의 나라는 코살라 국에 의해 공략된 적도 있고,
그가 출가한 뒤에는 마침내 코살라 국에 병합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의 나라를 둘러싼 불길한 분위기를 석가모니도 예민하게 느끼고 있었을 것이며,
인간 상극의 와중에서 비록 향락적인 나날을 보내고 있었을지라도
심증의 불안을 해소할 수는 없었을 것이라는 점을 간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왕자로서 부귀영화와 갖은 혜택을 누리는 환경에 있으면서도
닥쳐올 시대적 불안감 때문에 가정을 떠나 출가 생활을 지향하는 의지가 커지고
마침내 출가를 하지 않았느냐고 반문하는 비평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 우리가 익히 들었고 또 그렇게 경전을 통해 알고 있는
고타마 싯달타의 출가동기에 대한 심리적 고찰이 되겠지만
구도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고타마 싯달타는 환경이 어떻든 간에, 고타마싯달타가 인간으로서
이미 태어났다는 그 사실에 대하여 스스로 대답을 찾아야만 한다는 문제를 절실히 느끼고
그는 그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출가했다는 것이다.
이점이 바로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핵심을 놓치고 출가의 행위에만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분명 부처가 되기 전 고타마 싯달타도 하나의 중생이요,
우리도 중생이기 때문에 중생이란 관점에서 보면 비록 시대가 다르지만 대단한 일인 것만은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중생은 오늘날 사회학자들이 말하듯 <사회적 동물>이며
또한 <욕망을 지닌 동물>인 이상 당연히 이들을 버리고 외로운 구도자가 되어 출가한다는 것은
더욱이 범부로선 생각하기 곤란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럼으로 고타마가 왕위를 버리고, 부귀영화를 버리고, 일신의 모든 쾌락을 버리고,
부모와 처자까지도 버리고 출가 했다는 것은 분명 평범한 사람들이 취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점에서 출가행위를 더욱이 강조했다는 것은 일리 있는 말이기도 하다.
이러한 비판적 사고는 기계문명에 젖어서 진정한 삶의 진리를 등진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구미에 맞는 이야기꺼리가 될지는 몰라도 이는 부처의 외형만을 보고 출가의 의미를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중요한 핵심은 출가라는 그 행위가 아니다.
다시 말해서 가정을 떠난 그 행위가 출가가 아니라
오로지 삶에 대한 자신의 진면목을 찾아 가는 것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으로 고타마 싯달타의 출가는 어떤 장소나 시대적 상황이나 조건 때문에 출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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