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7. 13. 22:53ㆍ야단법석
7보(步)의 메시지
경전에 의하면 부처님께서는 출생하자마자
동서남북상하로 각각 일곱(7)발자국을 걸으시면서
우수(右手; 오른 손)로 하늘을,
좌수(左手:왼손)로 땅을 가리키면서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삼계개고(三界皆苦) 아당안지(我當安之)』
라는 외쳤다고 합니다. 흔히 이를 탄생게라고 하는데
어찌하여 1보도 아니고 10보도 아닌 7보를 말했을까요.
<7>이란 숫자는 불교에서 칠각의(七覺意), 칠각분(七覺分),
칠과도품(七科道品) 등 여러 경전에 회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탄생게에서 말하는 7보(步)의 의미는 무엇이며
그리고 그것이 어떤 메시지를 담고 있는지를 살펴볼까합니다.
첫째 <칠(7)>이라는 숫자는 인간이 고통을 받는
지옥, 축생, 악귀 등의 육도의 세계를 벗어나는 갈림길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서 각가지 형태를 지닌 번뇌와 생사가 윤회하는 세계를
벗어나는 것을 뜻합니다. 이를 아비달마의 용어로 표현한다면
분단생사(分段生死)를 벗어난다고 하는 것이 됩니다.
둘째로 <칠(7)>이라는 숫자는 선을 닦고 악을 멸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예컨대 입으로 짓는 4가지 악업과 몸으로 짓는 3가지 악업을
벗어나는 것임을 상징합니다.
입으로 짓는 4가지 악업이란 허튼 소리, 꾸며서 하는 달콤한 말,
이랬다저랬다 두말을 하는 것, 남을 비방하거나 욕하는 것을 뜻합니다.
몸으로 짓는 3가지 악업이란 살아 있는 생명을 해하고,
남의 것을 훔치고, 남의 여인을 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셋째로 <칠(7)>이란 숫자는 인간의 생사 기간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생사는 7배수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여자의 생리를 보면 7일로 계산하여 28일에 경도가 있으며
또 그 수를 10배한 280일에 생명이 탄생됩니다.
또한 사람이 나고 죽는 것도 7배수로 기준으로 하여
나고 죽기 때문에 7일마다 축하나 위안을 드리고,
죽게 되면 7일 제(齋)를 지내고, 삼칠일재(三七日齋),
사십구재(四十九齋) 등을 기리며
특히 7월 7석과 같이 7이 겹치는 날을 기념하는 것도
바로 이 <칠(7)>이라는 숫자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넷째, 굶주린 자가 7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으면 죽는다던지,
7일간 잠을 자지 않으면 죽는다는 등 이 <7>이라는 숫자는
육신과 정신의 세계, 사바세계와 정토의
갈림길을 의미하는 뜻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다섯째 눈. 귀. 코. 입 등의 육체의 7 구멍을 뜻합니다.
이는 인간의 육체적 감각기관을 초월해야 한다는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여섯째 <7>이란 숫자는 불교 유식학에서 본다면
제7말나식을 벗어남을 뜻합니다.
사물을 분별하고 생각하는 인간의 마음이란
불교 유식학에서는 8가지 식(識)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합니다.
8식이란 전오식(前五識)과 제6식, 제7식, 제8식을 말합니다.
식(識)이란 쉽게 말해서 <알음알이>를 뜻합니다.
전오식(前五識)이란 안(眼: 눈), 이(耳:귀), 비(鼻:코),
설(舌: 혀), 신(身: 몸)을 뜻합니다.
이 5가지 감각기관은 우리의 깊은 마음의 가장 표면에
나와 있기 때문에 <앞에 나와 있는 5가지 알음알이>라는 뜻으로
전오식(前五識)이라 합니다.
제6식은 의식(意識)을 말합니다.
앞의 전오식을 통해서 사물을 분별하고, 기억하고,
홀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의식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흔히 마음이라고 하는 말을
철학이나 심리학에서 <의식(意識)>이라고 하는데
이는 곧 불교 용어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제7식과 제8식은 심층(深層)의식이라고 합니다.
제7식은 말나식이라고 하며,
제8식은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고 합니다. 제8식은 근본식입니다.
말나식은 아뢰야식을 근거로 하여
<나>라는 생각을 일으키는 알음알이입니다.
말하자면 밖에 있는 사물이나, 보는 <나>자신도 동일한 것인데,
사람의 마음은 <보는 자>와 <보이는 것(물건)>을 구분하고,
주관과 객관으로 구분합니다.
마치 넓은 들판에는 있는 허공은 본래부터 <안>과 <밖>이 없는데,
그 들판에 집을 지으니 그 허공이 <집안>과 <집밖>으로
나누어지게 되는 것처럼 지수화풍(地水火風)이라는
사대가 모여 육신(肉身)을 만들게 되니
이를 <나>라 하고 주관의 세계와 <너>라고 하는 보이는 세계로 구분되어,
보는 <나>와, 보이는 <물건(경계)>으로 다르게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본래 허공인 공간이 <안>과 <밖>으로 구별된 것이 아니지만
이를 구별 짓듯이, 우리가 육신을 갖게 되자 <안>과 <밖>으로 구분되어
이 육신을 <나>라고 생각하고,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착오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유식의 교학에서는 말나식이 제8식인 아뢰야식에
전도(顚倒)되어 보는 것이라고 합니다.
간략히 말하면 본래 한 마음은 허공과 같이 청정하여
분리 된 마음이 없건마는 육신을 지닌 마음이
자기 마음의 그림자를 보고 이를 진실한 것이라고 믿게 된다는 말입니다.
제7식의 마음인 말나식이 제8식인 아뢰야식의 마음을 보고,
이 허망한 육체와 허망한 마음을 <나>라고 집착하고,
<나의 것>이라고 집착하고 애착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출생과 더불어 이와 같이 눈, 귀, 코 등의 감각기관을 통하여
사물을 알게 되고, 이를 통하여, 마음이 마음의 그림자를 보고
이를 진실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보이는 사물은 잠시도 고정된 것이 아니며, 변해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보는 우리의 눈도 잠시도 고정된 것이 아니라 늙어갑니다.
변해 가는 것입니다. 보는 자도 변해가고, 보이는 물건도 변해 가는데
우리는 보는 자도 고정된 것처럼, 보이는 물건도 변하지 않고
고정된 것처럼 보고, 알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거짓이요, 허상이요, 착오요, 왜곡된 것입니다.
이렇게 허망 되고, 거짓된 것에 갇힌 것을, 무명이라고 하고,
무명의 존재로부터 이를 벗어나는 것을 상징하는 것을
부처님은 <7 보(步)>라는 말로 들어내신 것입니다.
그럼으로 불교의 수행으로서 깨달음을 구해 가는 7가지 길
즉 칠각지(七覺支)를 내세우는 것도
모두 이 <칠(7)>이란 숫자와 연계된 것입니다.
일곱째, 도량의 기한을 7일 또는 7의 배수로 정하는 것도,
다라니를 외울 때 칠 회송을 하는 것도
모두가 이 <7>이라는 숫자와 연관된 것입니다.
그럼으로 이를 종합해 볼 때
부처님께서 <일곱 발자국을 걸으셨다>라고 한 7보는
『허망한 인식에서 바른 지혜로』,
『고통스럽고 번뇌가 충만한 세계를 벗어나
행복과 낙원의 이상향을 향해감』을 뜻하고,
『추악하고 괴로운 사바세계에서의 생사윤회의 굴레를 벗어나고,
또한 허망한 마음이 그리는 욕망의 세계를 벗어나
항상 아름답고 희열이 넘치는 진실 된 영원의 열반세계로 나아감』을
상징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삼계의 모든 중생들이 자기가 살고 있는 세계와
생사윤회의 굴레를 벗어나고, 진실 되지 못한 것을 진실로 아는
무명에 갇힌 허망한 마음을 벗어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삼계란 욕계, 색계, 무색계 말합니다.
욕계는 욕망의 세계요, 색계는 물질세계요,
무색계는 정신의 세계를 뜻합니다.
그럼으로 일곱 발짝 국을 걸었다는 것은 삼계의 고통을 벗어나고,
생사의 윤회를 벗어나고, 무명에 갇힌 허망한 마음을 벗어난 것임을
<7>이란 숫자를 통하여 이를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벗어났다>라고 하는 말은 <해탈(解脫)>과 같은 말입니다.
<해(解)>란 말은 엉켜진 실타래에서 실 한 오라기를 잡으면
전체가 풀리는 것을 의미하고,
<탈(脫)>은 갇힌 방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해탈이란 허망한 마음의 번뇌에서 벗어나고,
무상한 이 육체라는 감방(監房)으로부터 벗어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몸의 실상이 없음을 아는 것이
곧 부처를 아는 것이요
마음이 곧 환상과 같다는 것을 아는 것이
바로 부처를 다 아는 것이로다.
몸과 마음의 본성이 모두 공함을 알았다면
이런 사람이 곧 부처님과 무엇이 다르리오.
<구류손불 게송>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시아본사석가모니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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