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서 부처를 찾느뇨.

2006. 12. 20. 00:14야단법석

 

<불꽃 만다라> 

 

어디에서 부처를 찾느뇨.


불교신도라면 아마도 <금강경>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실《금강경》은 조계종의 소의경전 이전에 모든 종파를 초월하여

모든 불교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경전이 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동경의 <법신비상분>에 나오는 사구게(四句偈)는 속(俗)과 비속(非俗)을 가리지 않고 널리 회자되고 인용되는 문구이기도 하다


『만일 형상(색)으로써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써 나를 구하면         

 이 사람은 그릇된 도를 행함이라  능히 여래를 보지 못할 것이다.』

 (若以色見我/以音聲求我/是人行邪道/不能見如來) 

             

불심(佛心) 깊은 한 신도의 거액시주로 지금 경남 합천 해인사에 높이 43m의 세계 최대 청동좌불을 건립하는 문제를 놓고 조계종 내부에서는 찬반양론으로 갈려져 대립상황이 극심하다고 한다. 8만 대장경을 모신 법보(法寶)사찰 해인사에 그것도 세계최대의 불상을 안치한다는 것은 더 없는 한국불교의 자부심을 세계에 알리는 신심(信心)의 불사(佛事)요, 우리 불제자들에게는 더 없는 자랑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실업자가 100만을 돌파하고 경제가 어려워 하루를 천년같이 괴로운 삶에 허덕이는 중생을 생각할 때 좌불(坐佛)의 키가 낮아서 불심을 보지 못하는 것도 아니요, 입불(立佛)이 없어서 극락정토를 보지 못하는 것도 아닌데 불상건립비로 무려 55억원이라는 거액을 들여 아파트 10층 이상의 높이의 대형불상을 건립한다고 하니 진실로 기쁜 마음에 앞서 무거운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불상건립을 지지한 측이나 반대한 측에서 양쪽 다 참회하고 화해의 길로 접어들었다는 지상 보도를 접하니 과연 불제자다운 본래 면목을 찾은 것 같아 마음 기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째서 이런 불상에 관심을 기울이는가?

그것은 사람들이 자기 안에서가 아니라 밖에서 신을 찾고 있기 때문이다.

크리스찬들이 하나님과 예수를 찾아 이스라엘의 성지와 옛 수도원을 찾듯

부처란 신을 밖에서 찾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리산으로 오대산으로, 동남아로, 중국으로, 인도로, 티베트로

역사에 들어 난 유서 깊은 사찰이나 성지란 성지를 비행기를 타고,

기차를 타고, 배를 타고, 자동차를 타고 찾아가고 있다.

형상을 쫓아 멀리서 그를 찾고 있다.


우리 속담에서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 이란 말이 있듯이

귀로들은 것은 눈으로 보아야 직성이 풀리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러나 진리라는 것은 그렇게 보는 것만으로 알지 못한다.

부처의 상을 가까이 에서 본다고 해서 부처에 가까이 가는 것도 아니고,

진리나 깨달음에 가까이 가는 것도 아니다. 현미경으로 불상을 보라.

그기에 무엇이 보이는가? 아무 것도 없다. 거기에는 단지 금속쪼가리나,

흙부스러기, 나무 부스러기 외에는 아무 것도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밖에서 보고 있는 한 결코 부처를 찾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부처는 밖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금은, 청동, 나무, 진흙으로 만들어진

이름난 불상을 찾아 명산 고찰을 찾아 곳곳으로 누비고 있다.

그리고 세계 <최대>라는 상(相)에 갇혀, 이름에 갇혀,

웅장하고 거대하다고 하는 갖가지 불상들을 찾아 한발이라도 더 가까이에서 보려고 소란을 피우고 있다.


<불상을 가까이에서 본다>는 그 말은 무슨 뜻인가?

이 말은 그대와 부처 사이의 거리를 전제하고 있는 말이다.

부처는 바로 그대 안에 있다.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부처는 바로 그대 자신이다. 그대는 결코 부처를 떠난 일이 없다.

아니 떠날려야 떠날 수도 없다. 부처는 바로 그대의 본성이다.

바로 지금 이 순간에 그는 그대 속에 있다.

그는 나를 보고 있으며 그는 항상 나의 소리를 듣고 있다.

그런데 어디서 부처를 찾는단 말인가?

 

진실로 부처를 보고 싶다면, 그대 속의 부처를 찾고자 한다면,

그대는 그대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대 존재의 심연(深淵) 속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사념이 끊어진 무심의 경지 - 존재의 이 깊은 휴식의 차원으로 들어간다면 그대는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생각이, 사념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부처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대의 에고만이 강화될 것이다. 에고가 소멸되는 것은 오직 휴식을 통해서만 이다. 사념이 일고, 분별이 일어난다면 그대는 본질과 단절된다.

그러나 마음을 비우게 되면, 다시 말해 일체 사념이 끊어진다면, 거기 더 이상 고체(固體)의 상태가 없다면 그대는 녹을 것이다. 생명의 바닷물 속으로 용해 될 것이다.


그럼으로 여기 부처를 찾는 길도 2가지가 있다.

하나는 관광객의 길이요, 하나는 구도자가 되는 길이다.

얼음의 상태가 되어 생명의 바다로부터 격리되느냐, 아니면 이 생명의 바다와 하나가 되느냐가 그것이다. 『나는 … 이다』라고 생각할 때 그대는 관광객이 된다. 그대의 마음은 얼음덩이가 되어 얼어붙는다.

그대의 에너지는 더 이상 굽이치지 않게 된다.

이제 그대는 자신을 <나는 …이다>라고 정의하게 되고 한정시키게 된다. 자기 자신에 대한 이 한정이 그대를 구도자가 아닌 관광객으로 만든다.

그 장벽이 그대 자신을 밖으로 몰고 가게 된다. 마치 부자들이 목적 없이 값비싼 쇼핑을 즐기고 해외여행을 즐기듯 부처를 찾는 마음도

또한 그렇게 쇼핑이 되고 과시 내지 전시욕으로 탈바꿈되어 진다.

 

그래서 옛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불상이나 사찰을 찾는 사람은

백화점 쇼핑객과 같이 들끓었지만 진정으로 부처를 찾는 사람은 드물다.

그들 중에서 진실하다고 하는 사람도 부처는 그들의 인생 여정에서

항상 마지막 줄에 짜여져 있었다. 그들이 짜 놓은 스케줄의 맨 끝에 서 있다. 다른 모든 것이 다 성취된 다음에 그들은 부처를 찾는다.

부처는 언제나 맨 끝에 밀려나고 있다. 물론 그 줄의 끝은 결코 끝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부처를 결코 첫줄에 세워두지 않는다.

이 세상의 일이 우선 성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날이 갈수록 그대는 이 세상일에 뒤얽히게 된다.

그대의 야망이나 욕망의 크기에 따라 그대의 그 스케줄의 줄은

점점 더 길어지게 된다. 부처는 자꾸 자꾸 뒤로 밀려나가 버린다.

이제 그대가 부처를 보려 해도 그것은 이미 불가능하다. 삶에서, 또는 임종의 문턱에서 헐떡거리는 그 숨소리로 부처를 향해 뛰지 못한다.


사람들은 진리를 찾고, 부처를 찾는 길에도 <요가>나 <초월적 명상> 과 같은 특별한 방법이나 <제3의 눈>을 말한다.

그러나 그런 <제3의 눈>이란 실재하는 눈이 아니다. 그것은 격렬한 바램을 뜻하는 상징에 불과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위해서 그대 삶 전체를 집어던져 버릴 수 있는 그런 열정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다.


부처를 찾는다는 것은 불성을 찾는다는 말과 같다.

불성이 바로 부처요 신이다. 그것은 그 자체가 바로 삶이요, 삶 그 자체가 불성이다. 그래서 진리의 세계를 진정으로 안 사람들은 모두 이 삶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불성(佛性)은 바다와 같고

우리는 그 바다 속에 사는 고기와 같기 때문이다.

우리가 찾는 신이란, 부처란 누구인가?

그것은 존재를 향한 대 긍정자이기 때문이다.


소위 깨달음을 얻었다고 칭하는 사람들이나 성직자 내지 도를 닦는다는 사람들을 찾아가 보라. 그들은 하나같이 이 삶을 반대하고 있다.

그들은 이렇게 가르칠 것이다.

『삶은 고해의 사바세계요, 삶은 적이요, 악마다. 그럼으로 악마의 세계를 벗어나라, 세속을 떠나라, 출가하라 …』

그들은 이렇게 진리가, 부처가 이 삶을 정반대적인 것처럼 말하고 있다.

그들의 가르침에 따른다면 우리는 부처와 이 삶을 동시에 가질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의미가 아니다.

부처와 삶은 동시에 가질 수 있다. 부처는 우리의 삶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 삶은 결코 부처와 적이 아니다.

삶은 부처의 현현(顯現)이요, 이 삶의 비현현(非顯現)이다.

이 둘은 같은 에너지이다. 같은 동작의 다른 형태이다.

삶의 불가시적(不可視的)인 상태가 부처요,

가시적 상태가 이 삶이다. 부처는 가시적인 것이 된다.

부처는 불가시적인 것이 된다. 이 상태는 끊이지 않고 계속된다.

이는 마치 호흡작용과도 같다. 숨을 들어 마시고 내뿜는 작용과 같다.


인도의 고대 경전 <베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신이 호흡을 내뿜으면 이 세상이 전개되고

신이 호흡을 들어 마시면 이 세상이 사라져 버린다.

신이 호흡을 내뿜을 때 그대가 탄생한다.

그러나 신이 호흡을 들어 마실 때 그대는 사라진다.

저 죽음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그러나 그대는 결코 신을 떠날 수 없다. 내뿜는 숨만큼 그는 들어 마신다.

이 다이나미즘(dynamism)을, 이 변증법을 우리는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불교에서는 삼보(三寶)라는 3가지 보물을 두고 있다.

소위 말하는 불법승(佛法僧) 삼보가 그것이다.

이 삼보를 이해시키기 위해 옛 조사님들은 근기(根機)에 따라 3가지로 설명한다.


하나는 상(上)근기를 위한 동체(同體)삼보요,

둘은 중(中)근기를 위한 현전(現前)삼보요,

셋은 하(下)근기를 위한 주지(住持)삼보다.


우리가 말하는 지금의 불상과 경전과 스님들은 하근기를 위한 것이다.

눈앞에 보이고, 만지고, 듣고, 행함이 있어야 사람들이 이해되기 쉽기 때문이다.


시대가 흐름에 맞추어 불상이나, 경전, 스님의 모습도 다양해 졌다.

금으로, 동으로, 나무로, 흙으로 와불, 좌불, 입불 등을 만들고,

금가루, 은가루, 먹으로 경전을 필사하고, 누렇고, 희고, 붉은 가사로

차려입은 스님들로 다양해 졌다. 그러나 이 모두가 하근기를 위한

비누거품과 같은 마음으로 그려지고 만들어지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불심이 어디 크기가 있어 작은 불상에는 작고, 큰 불상은 크다고 할 수 있겠으며, 금불(金佛)에만 있고 니불(泥佛, 흙으로 짓은 불상)에는 없을 것이며, 좌불에는 있고, 입불(立佛)에는 없다고 할 것인가?

부처의 가르침이 어디 금가루 속에서만 피어나고 먹물가루 속에서는 죽어 있단 말인가? 부처의 말씀이 어찌 금빛 가사나 회색 장삼 속에서만 나오고

티셔츠나 와이셔츠 속에서는 나오지 않는단 말인가?

 

<마하지관>에 이르길

『일체 진로(塵勞)가 여래(如來) 의 종자(種)』라 했는데

어찌 형상을 지닌 것에서 부처를 구하겠는가? 그러기에 옛 조사들이 이르길 『불불불상견(佛佛不相見) 하고 조조불상봉(祖祖不相逢)』이라 했다.

그런데 어디에 부처가 아닌 불상을 찾아 시간을 허비한단 말인가?

 

<금강경오가해>에도 야보(冶父)선사의 이런 말이 있다.


『진흙으로 만들고 나무로 새기며, 겸해 채색하고 단청을 하고 다시 금으로 장식하니, 만일 이것을 가져 여래의 모습이라 하면 관세음을 웃기게 할 것이다.』


또 조주선사가 이르길

『금으로 된 부처(金佛)는 화롯불을 건너지 못하며,

나무로 된 부처(木佛)는 불을 건너지 못하며,

진흙으로 된 부처(泥佛)는 물을 건너지 못하지만

참된 부처(眞佛)는 안에 앉아 계신다.』했다.


요즘은 도시 곳곳마다 새로운 빌딩이 들어서고 있다.

그 공사장을 보면 빌딩을 지을 동안에는 많은 발판이 설치되어 있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을 것이다. 높은 층으로 건축자재를 운반하기 위해서 이는 분명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공사가 끝나면 그것은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된다.


이와 같이 불상(佛像)의 숭배는 초보자에게 있어서 절대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나중에는 필요치 않게 된다. 활을 처음 쏘는 아마추어 궁수는 큰 과녁을 겨냥하여 활을 쏜다. 그러나 활쏘기 숙련되면 그럴수록 적은 과녁을 겨냥하기가 쉬워질 것이다. 이와 같이 구도도 부처의 형상에 집중시켜 수련하게 되면 무형의 영적 공간에로의 집중이 보다 쉬워질 것이다.

불상 숭배의 의의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속인(俗人)이든 비(非)속인 이든 사람들은 형상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비록 지금은 청동불 건립이 문제가 되고 있지만 그 언제간은 금불 이야기가 나오지 않겠는가?

진실로 우리가 경배해야 할 부처는 그대 밖에 있는 부처가 아니라 그대 안에 있는 부처다.


그러기에 야보 도천선사도 『금강경오가해』<정신희유분>에서 주하기를

『삼불의 모양과 형색(形儀)이 다 진실치 않으니

눈 가운데 눈동자(瞳子)가 면전의 사람이다.

만일 능히 집안(家中)의 보배를 믿어 얻으면

우는 새와 산의 꽃이 한 모양 봄이구나.

오이를 심으면 오이를 얻고 과일을 심으면 과일을 얻는다.

일(一)불, 이(二)불, 천만 불이 각각 눈은 횡선이요, 코는 직선이다.

예전에 친히 선근 종자를 심어 왔으니 금일에 앞을 의지하여 그 의 힘을 얻었다. 수보리여, 옷 입고 밥 먹음이 늘 있는 일(尋常)이니 어찌 특별히 의심을 낼 것인가?


뚜렷함이 태허공(太虛空)과 같아 흠결도 없고 남음도 없다.

법상(法相)과 비법상(非法相)이여, 주먹을 펴매 다시 손바닥이다.

뜬구름이 푸른 허공에 흩어지니 만리(萬里)의 하늘이 한 모양이다.

금으로 금을 무역하지 못하고, 물로 물을 씻지 못한다.

수목을 얻어 가지를 잡는 것이 족히 기이하지 못하다.

높은 벼랑에서 손을 펼쳐야 대장부가 된다.

물이 차고 밤이 차 고기를 찾기 어려우니

빈 배로 머물러 달을 싣고 돌아온다.


물이 다다라 개천이 된다. 종일 바쁘고 바빠도 저 일과는 방해되지 않는다. 해탈도 구하지 않고 천당도 즐겨하지 않는다. 다만 능히 한 생각 무념(無念)에 돌아가면 높이 비로자나불의 이마 위를 걸어 행할 것이다.』

라고 했다.


부처는 찾는 길은 밖을 향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눈앞에 보이고 만져볼 수 있고, 냄새나 소리로 알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붉은 것에서도, 푸른 것에서도 나오는 것이 아니다. 불심은 웅장한 것에서도 왜소한 것에서도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예로부터 변함없이 내게 있었다. <법성게>에서 이르듯

과거나 현재 그리고 미래에도 변함없이 내게 있었고, 내게 있을 것이다.

그것은 처음과 끝이, 알파에서 오메가까지 변함없이 있었고, 또 있을 것이다. 그럼으로 그것은 밖이 아니라 내 마음 안에 찾아야 하는데 우리는 밖에서 그것을 찾으려고 하고 있다. 그것은 언제나 항상 나 안에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망각하고 밖에서 찾으려 하고 있다.

그럼으로 밖을 향한 눈을 감고, 밖에서 나는 소리에 귀를 막아야 한다.

안을 보고 안으로 귀를 기울려야 한다. 밖을 놓아 버려야 안이 고요해 진다. 불심(佛心)은 사념(思念)의 때가 묻지 않은 본래 마음자리에서 굳건해 진다. 금은보화로 채색한 들 그런 불상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는가?

 

그대 밖의 부처를 찾지 말고 그대 안의 부처를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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