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도(中道)3

2007. 3. 29. 22:19경전과교리해설

 

<도봉산> 

 

 

중도(中道)3


실체를 찾으려고 마음을 사용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실체를 찾는 데에

마음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깨어 있는 것이다.


말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해탈을 얻은 사람이다.

감각에 물들지 않는 것은 진리를 따르는 것이다.

그리고 삶과 죽음을 초월하는 것은 자신의 집을 떠나는 것이다.

존재하는 것에서 고통을 받지 않는 것은 도(道)에 이르는 것이며,

망상을 피우지 않는 것이 바로 깨달음이다.


무지(無知)에 몰두하지 않는 것이 지혜이다.

괴로움을 당하지 않는 상태가 곧 열반이다.

마음이 일어나지 않음은 피안에 다다른 것이다.


치우치지 않은 진리의 빛 속에서 본다면

중생은 성자와 다르게 보이지 않는다.

경에 이르기를

『치우치지 않은 진리는

중생도 꿰뚫을 수 없고 성자도 행할 수 없다.』

고 했다.


치우치지 않은 진리는 오직 보살과 부처만이 행할 수 있다.

죽음을 삶과 다르게 보거나

정(靜)을 동(動)과 다르게 보는 것은

이미 한쪽으로 치우친 것이다.


치우치지 않는다는 것은

번뇌와 열반의 본성이 똑같은 공(空)이기에

그 둘이 다르지 않음을 보는 것이다.


고통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하거나 열반에 들어갔다거나

아라한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열반이라는 망상의 덫에 걸린 것이다.


그러나 보살은 고통의 본질이 공허하다는 사실을 알며

공허함에 머무르기에 항상 열반에 들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열반은 삶도 아니고 죽음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삶과 죽음을 초월하는 것이며

열반이라는 것 자체도 초월하는 것이다.


마음이 움직임을 멈출 때

그것은 열반으로 들어간다.

열반은 바로 텅 빈 마음이다.

그 어떤 곳에도 안주하지 않을 때

거기에 탐냄도 성냄도 어리석음도 없다.


마음이 하나의 허구이며 실재하는 것은

모두 공한 것임을 아는 사람은

자신의 마음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며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님을 안다.


중생은 마음을 만들어 내고

그것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아라한은 그 마음을 부정하며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보살과 부처는

마음을 만들어 내지도 않으며 부정하지도 않는다.

이것이 바로 마음은 존재하는 것도 아니며,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이것을 중도라고 부른다.


그대의 내면에서 마음이 일어나지 않을 때

바깥세계도 생겨나지 않는다.

바깥 세계와 마음이 둘 다 사라질 때

그것이야말로 참된 견해이다.

그러한 이해가 바른 이해이다.


~<달마의 중도론>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