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11. 29. 00:44ㆍ야단법석
마음의 눈을 뜬 자만이
진리란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마음의 눈을 뜬 자만이 볼 수 있다.
그래서 <심신명>에 이르기를
『객관은 주관으로 말미암아 객관이요
주관은 객관으로 말미암아 주관이니
양단을 알고자 한다면
원래 하나의 공이니라
( 境由能境 能由境能 欲知兩段 元是一空)』
라고 했다.
거울을 통하여 자신의 모습을 본다고 가정해 보자.
거울과 당신의 눈 사이에 일정한 거리가 없다면
거울을 통하여 당신은 당신의 모습을 볼 수 없을 것이다.
거울을 통하여 자기의 모습을 볼 수 있으려면
적어도 당신은 거울과 떨어져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보이는 거울과 보는 당신의 눈은
일정한 공간을 두고 떨어져 있어야 한다.
철학적으로 말한다면 보이는 거울에 비친 것은 객관세계요,
보는 자는 주관의 세계가 된다.
거리를 둔다는 것은 객관세계와 주관세계가
분리되어 있다는 뜻이 된다.
보는 자와 보이는 것이 분리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분리된 세계는 상대적인 세계라 한다.
상대적이 되면 모든 가치가 변질되어진다.
예컨대 거울 속에 비쳐진 당신의 마마 자국을 보고
당신은 부끄럽게 여겨 이를 어떻게 감출 수 있는가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옆에서 보고 있는 당신의 연인은
예쁜 보조개라고 보고 있다.
보는 자와 보이는 것이 분리되면
이렇게 가치가 변질 될 수가 있다.
여기에 시간과 환경(環境) 등이 개입된다면
그 가치는 더 크게 변한다.
지식이란 상대적인 것이다.
지식은 시대에 따라 옳기도 하고 또 틀리기도 한다.
아함의 경전에 이르기를
『어떤 지식이 전적으로 믿음이 간다고 해도,
자신의 마음에 든다고 해도, 전설과 일치한다고 해도,
논리적으로 잘 추론된 것이라 해도,
사변(思辨)을 통해 승인한 이론과 일치한다 해도,
거기에는 진실이 없을 수 있고,
공허한 것일 수도 있고, 거짓일 수도 있다.
한편 전혀 믿어지지 않고,
마음에 들지도 않고, 사변을 통해 승인한 이론과
틀리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사실일 수도 있고 진리일 수도 있다.』
고 했다.
또 성경(聖經)에 이른 말이 있다.
『진리는 모든 것을 자유롭게 한다.』고.
그래서 서구인들은 많은 진리를 탐구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찾은 진리는 그들을 자유롭게 하지는 않았다.
그들이 찾은 진리는 지식이었기 때문이다.
지식은 과학을 발달시켜 인간의 물질적 생활을 편리하게 만들었지만
그들의 정신은 오늘날 보듯이 그 만큼 더 황폐시켰다.
그들의 진리가 도리어 속박이 되어 사람들을 묶어 놓았다.
진리는 모든 것을 자유롭게 하지만 상대적인 지식은 감옥이 된다.
이는 물질적 현상세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궁극적 행복의 관점에서 말하는 것이다.
서구의 종교도 따라서 이런 지식 소위 신학(神學)이란
지식에 매달려 추구했기 때문에 오늘날 그들의 사회는
어두운 사회가 되어 갖가지 범죄가 난무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 강물에 두 번 다시 발을 담굴 수 없다.>고 말한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렇게 말한다.
『완고한 신앙은 신성화된 질병이다.』고.
당신이 무엇에 대하여『이것이 진리다』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이미 그 진리와 멀어져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물의 궁극적 본질과 등지고 있다는 것이다.
사물의 본질과 그대 사이에 공간이 있기 때문에
그대는 이것이 무엇이라고 사물을 정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 정의 될 수 있는 것은
객관과 주관이 분리된 것이고,
정의 된 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며,
언제가 상대적으로 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는 진정한 진리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진리란 궁극적 실체요,
분리되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전체 속에서 나온다.
그것은 하나지 둘이 아니다.
그럼으로 진리는 보이는 것과 보는 자와
분리되어진 곳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객관과 주관이 분리된 상대적인 것에서 진리는 나올 수 없다.
만약 <이것이 진리다.>라고 정의 될 수 있기 위해서는
그 진리의 대상과 떨어져 있어야 하기 때문에
그것은 지식은 될 수 있으나 절대로 진리는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으로 진리는 전달될 때
설령 왜곡되지 않더라도 전체 속에서 자리한
하나의 분리된 것을 전체로 간주하여 말하는 것이 된다.
마치 장님이 코끼리 다리를 만지고는
코끼리는 벽과 같이 넓은 짐승이라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코끼리 다리는 크고 또 넓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넓고 큰 것이 곧 코끼리는 아니다.
그럼으로 진리는 이와 같이 전달하는 가운데 거짓이 된다.
그것이 진리의 속성이다.
그러므로 진리는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주어질 수 없으며
빌려올 수도 없으며 훔치거나 돈으로 구입할 수도 없다.
장님이 눈을 떠서 코끼리를 본다면
바로 코끼리가 무엇인지 알 수 있듯이
자기가 스스로 내면의 눈을 떠야 한다.
자기 스스로 체증(體證)해야 하는 것이다.
진리란 마음의 눈을 뜬 자만이 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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