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11. 4. 23:18ㆍ야단법석
마구니의 의미
경전을 보면 여러 형태의 마구니(魔群)들이 등장합니다.
마구니란 현대적인 의미로 말한다면 물질에 탐닉한 자요,
최고의 부(富)와 권리를 지닌 악마에 상응합니다.
이는 성서에서 말하는 사탄과도 그 맥을 같이 합니다.
성서를 보십시오, 거기에 사탄은 예수를 유혹하는 데
무엇을 가지고 유혹을 합니까?
사탄이 제시한 무기는,
세상을 다 사고도 남을 부(富)요,
세계를 다스리는 제왕(帝王)의 지위요,
기적의 마술이 아닙니까?
불교에서는 번뇌를 마구니라 표현합니다.
마구니는 무수히 많지만
흔히 대표되는 마구니는 108번뇌라고 합니다.
108번뇌란 곧 108마구니와 같은 말입니다.
번뇌가 마구니가 되니, 성서로 말한다면
곧 108번뇌는 108악마가 됩니다.
그러나 이 뿌리는 바로 탐욕스러운 마음, 성내는 마음,
어리석은 마음의 삼독이 됩니다.
악마란 현대 산업사회의 의미에서 고찰한다면
곧 물질적 소비와 자연 및 인간에 대한
힘의 대표자를 상징하게 됩니다.
그럼으로 물질과 돈을 숭배하는 것은
악마를 숭배하는 것이며,
악마의 노예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노예는 항상 주인에게 얽매여 있습니다.
그럼으로 현대인은 <돈의 노예>요, <권리의 노예>요,
각가지 <물질적 욕망의 노예>가 되어
얽매여 있다는 말이 됩니다.
노예는 그가 모시는 주인의 소유에 불과합니다.
옛날 우리 사회에서
종이 상전의 물건처럼 소유되어 있었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불교에서 말하는 <절대아> 또는 <진아(眞我)>는
절대생명의 존재를 말하는 것입니다.
절대아는 소유하지도 않고 소유되지도 않습니다.
무애(無碍)하면서
또한 무소유(無所有)인 것이 바로 <절대아>입니다.
소유를 지양하는 삶이란 자기를 위하여
남을 희생하면서까지 더 가지려는 삶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무소유의 삶은 더 가지려는 삶의 행위를 버리고
더 나아가 자기 보다 더 남을 살리는 행위를 말합니다.
뭇 존재들을 힘닿는 데까지 애써 살리는 행위를 뜻합니다.
그것이 바로 보시가 주는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소유욕에 물든 자는 욕망의 노예이며, 악마의 노예입니다.
이는 자유인이 아니며, 해탈인 아닙니다.
그럼으로 우리의 삶이 고통스러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오늘날 산업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가장 큰 번뇌는 바로 이 소유욕에 빠져 있기 때문에
자유롭고 걸림이 없는 절대생명이
고통과 번뇌라는
악마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물질에 집착한 이 노예적인 마음을 버리고
고통을 벗어나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세계로 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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