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사성취(六事成就)

2006. 10. 19. 22:51경전과교리해설

 

 

 

육사성취(六事成就)


모든 대승경의 서분(序分)은 육사성취(六事成就)로 그 서두(序頭)를 구성하고 있다. 육사성취란 신(信)성취, 문(聞)성취, 시(時)성취, 주(主)성취, 처(處)성취, 중(衆)성취를 말한다.

  

1) 이와 같이(如是)란 신성취(信成就)를 말한다. <이와 같이>라 함은 그 경의 전부를 가리킨다. <신(信:믿음)>은 범어로 <프라사다(prasada)>라고 한다. <프라사다>는 <마음이 맑아지는 것(心淸淨)>을 의미한다. 신(信)을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정설(定說)로 되어 있다. 원효대사는 신(信)을 「크게 그렇다(大然)고 믿는 것」이라고 한 바도 있다. 그럼으로 신(信)은 신앙이라기보다 마음이 어떠한 것인가를 똑똑히 알아서 그대로 실천하고, 그대로 실천하면 반드시 훌륭한 일이 생긴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다. 신(信)안에는 <확실히 안다>는 뜻, 따라서 <확실히 아는 것을 실천하게 되는 것>, 그래서 <좋은 말, 좋은 행위 등의 훌륭한 일들이 거기서부터 나오게끔 되는 가장 중요한 근원이 됨>을 암시하는 있다. 이는 기독교 등과 같은 유일신교에서 말하는 믿음과 다른 것이다. 그럼으로 <화엄경>에 이르길


『신심(信心)이야말로 도(道)의 근원이고 공덕(功德)의 어머니이며,

 신심이 모든 선근(善根)을 성장시키고 양육한다.』(현수보살품)

라고 한 것이다.


 

2) 내가 들었다(我聞); 이는 문성취(聞成就)를 말한다. 듣지 못한 것을 전하고자 한다면 비록 말이 있지만 전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곧 거짓된 말이니 말하는 주체가 없는 것이다. 귀(貴)함은 전하는 그 주체에 있으니 그럼으로 아문(我聞)이라 한 것이다. 여기서 나(我)란 아난(阿難)을 말한다. 아난은 부처님이 세상에 계실 적에 항상 따라 다니며 시봉한 사람으로 제일결집 때 모든 불경(佛經)을 암송한 사람으로 부처님의 설법을 빠짐없이 들은 분이기 때문이다. <들었다> 함은 부처님이 말씀하신 법문(法門)에 대하여 조금도 자기의 견해나 뜻을 붙이지 않고 그대로 외어 냈다는 것이니, 여기에 부처님을 존경하여 말씀하신 그대로 전한다는 절대 신앙의 정신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여시아문」은 모든 경에 통함으로 일명 <통서(通序)>라고도 한다.


고대 중국에 처음 불교가 들어와 <격의불교(格義佛敎)>가 성행할 때 불후의 명저 <조론>을 낳기고 30세에 누명을 쓰고 참형을 당한 승조(僧肇)라는 대사가 있다. 춘추전국시대의 모든 국가는 어려운 난세를 대비하기 위해 뛰어난 인재를 구하였는데 승조대사는 전한의 왕이 추대한 제상의 자리를 거부한 댓가로 꽃다운 30세 나이로 감옥에서 참형을 당한 사람이다.


<격의불교(格義佛敎)>란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가 서역지역을 통해서 중국에 전래된 불전(佛典)이 그리 많지 않았고, 따라서 불교의 대의가 당시 중국에서 크게 선양되지 못했기 때문에 당시의 고승이나 사상가들은 불교에서 설파한 공(空)과 실상(實相)의 언어적 개념이 실제로는 둘이 아닌 중도(中道)의 이치임을 모르고 이를 기존의 노장학의 연장에서 불교를 이해한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불교의 공(空)이나 중도의 이치를 노장의 무(無)사상으로 잘못 오해하고 받아들인 것을 말한다.

 

그의 임종시에 이런 시(詩) 한 수를 남겼다.


      사대는 본래 주인이 없고(四大無元主)

      오온은 본래 공한데(五陰本來空)

      싯퍼른 칼날 아랫목을 드리우니(將頭臨白刀)

      봄날 따스한 봄바람 스치는 것 같네(猶似斬春風)


이 승조대사가 이르길

「이와 같이(如是)라 함은 믿고, 믿고 따른다(信順).는 뜻을 표한 말이다.

믿게 되면 말씀한 도리(理)를 순종하게 되고,

순종함으로써 스승과 제자의 도리가 성립된다.」 

라고 했다. 구마라집(鳩摩羅什)은,


「<내가 들었다>고 하지 않으면, 이는 말을 외어 전하는 사람의 법이 되고 만다. 말을 외어 전하는 사람의 법이 되면 이는 곧 그 사람의 주장에 집착이 있는 것이니, 외어서 전하는 사람마다 집착이 있으면, 분쟁과 혼란이 일어나게 된다. 그런데 <내가 들었다>고 하면 곧 외어 전하는 사람의 주장이 따로 없어서 뜻에 집착이 없기에, 모든 시비(是非)는 이에 귀착되어 지는 것이다.」


라고 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함은 곧 아집(我執)을 버리고 부처님의 말을 들었다는 것이니, 이는 곧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는 자가 지녀야할 가장 올바른 마음의 자세라 할 수 있다.


또 <지도론(智度論)>에 이르길,

「불법(佛法)은 대해(大海)와 같아서 믿음(信)만이 능히 이를 들어가고,

  지혜(智慧)만이 건너 갈 수 있다. 경(經)은 넘치지도 모자람도 없으니

  믿음이 아니면 오르지 못한다. 그러므로 여시(如是)라고 한다.」


라고 했다. 또 성인이 법을 설함은 단지 <여(如)>를 들어내기 위함이니,

오로지 <여(如)>가 곧 <시(是)>가 된다. 여(如)란 당연한 진리요(當理),

지(智)란 그릇됨(非)이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如)는 진공(眞空)이요, 시(是)는 곧 묘유(妙有)가 된다.

달리 진(眞)이 없기 때문이다. 공(空)이지만, 끊어 짐(斷)이 없으니 진(眞) 외에 속(俗)이 없기 때문이다. 유(有)이지만 상이 아니니(非常) 이는 곧 방편과 그릇된 종지(宗旨)를 깨트리고 중도(中道)를 세운 것이다. 그러므로 여시(如是)라 한다. 


3) <어느 한 때(一時)>라고 한 것은 시성취(時成就)를 말한다. 이는 세 가지 뜻을 함축하고 있다.

첫째, 당시 인도에는 해와 달과 날과 시간을 적은 역사적 기록이 없기 때문에 <어느 한 때>라고 했다.

둘째, 부처님이 말씀하시는 법문은 시방(十方) 중생(衆生)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어느 한 지역의 연대와 시간을 기준을 삼을 수 없기 때문에 <어느 한 때>라고 한 것이다.

셋째, 말씀하신 분이나 듣는 분의 기연(奇緣)이 성숙하여 서로 맞아 하나가 되는 때이므로 <어느 한 때> 라고 한 것이다.


4)<부처님(佛)>이란 주성취(主成就)를 말한다.

범어(梵語)로는 불타(佛陀; Buddha)로서 각자(覺者)라는 뜻이다.

각(覺)이란 <기신론(起信論)>에 이르길


「심체가 념(念)을 떠난 것이다(所言覺者 謂心體離念). 념(念)을 떠났다는 것은 허공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두루 하지 않는 곳이 없는 것이다. 법계는 하나의 상(法界一相)이니 이는 곧 여래평등법신(如來平等法身)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곧 무념(無念)인 것이다. 이를 일러 각(覺)이라 한다.


각(覺)의 의미는 세 가지가 있다.

하나는 자각(自覺)이니,

자심(自心)은 본래 생멸(生滅)이 없는 것임을 깨닫는 것이다.

둘은 각타(覺他)이니,

이는 일체법이 여여(如如)하지 않음이 없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셋은 각만(覺滿)이니,

자타(自他)의 이(理)가 원만하여 이를 완성하는 것이다.


마음에 념(念)이 있으면 이는 각(覺)이 아니다.

그럼으로 “일체중생은 각(覺)이라 이름하지 않는다(不覺).”』

라고 했다. 또 이르길


「만약 중생이 무념(無念)을 깨달으면 이는 곧 불지(佛智)를 향한다.」

고 했다.


 

5) <어느 어느 곳> 이란 처성취(處成就)를 말한다. 진신(眞身)은 어디에 있는 것도 아니며, 어디에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차제(次第;차례)에 설한 장소를 든 것이다. <금강경>에서는 기수급고독원에서, <능가경>은 큰 바닷가 마라산 꼭대기에서 법을 설했기에 그러한 장소들을 서문에서 들어낸 것이다.


6) <큰 비구들과 함께 계시었다>라는 것은 중성취(衆成就)를 말한다.

중(衆)이란 무리들 뜻한다. 따라서 중성취란 먼저 <종가입공관(從仮入空觀)>을 말함이니, 생사(生死)를 깨트림이다. 이는 성문(聲聞)을 두고 한 말이다.

다음은 <종공입가관’(從空入仮觀)>이니 열반(涅槃)을 깨트림이다. 이는 보살(菩薩)을 두고 한 말이다. 이 둘을 떠나면 중도(中道)가 현전(現前)한다. 


경전에서 말하는 큰 비구(大比丘)란 다섯 가지의 뜻을 갖추고 있다.

하나는 포마(怖魔)이니 이는 마군(魔群)들이 두려워하는 것이다.

둘은 깨끗한 걸식이니 이를 정걸식(淨乞食)이라 한다.

셋은 번뇌를 깨트림이니 파번뇌(破煩惱)라 한다.

넷은 깨끗한 계율을 가지는 것이니 이를 정지계(淨持戒)라 한다.

다섯은 이름만이 승(僧)이란 뜻이니 이를 곧 명자승(名字僧)이라 한다.


경전에서 <보살> 또는 <보살 마하살>이란 말이 자주 나오는데 보살이란 <보리살타>를 줄인 말이다. 보리살타는 범어 <보디삿트바(Bodhisattva)>의 음사(音寫)로서 보리(菩提)는 각(覺)을 뜻한다. 각(覺)이란 곧 불과(佛果)를 구함이요, 살타(薩埵)는 유정(有情)을 말함이니 곧 중생을 이르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는 곧 <깨달은 사람> 이란 뜻이다.

마하살(摩訶薩)은 원어 <마하 삿트바(maha~-sattva)>의 음사로서

<위대한 인간>을 뜻하며, 대사(大士), 대보살(大菩薩), 등으로 번역되는 보살의 경칭(敬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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