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8. 22. 00:06ㆍ잠언과 수상록
<불암산의 바위들>
에고(ego)
에고는 자전거의 페달과 같다.
페달을 밟아야 자전거가 달리는 것처럼
에고는 끊임없이 투쟁을 창조해 낸다.
오직 두개의 바퀴만으로
그대가 계속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은 기적 같은 일이다.
그래서 그대는 계속해서 페달을 밟고 있다.
에고는 하나의 기적과도 같다.
그것은 곧 투쟁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대는 투쟁 없이는 살 수 없게 된다.
그대는 이런 저런 식으로 투쟁의 구실을 만들어 낼 것이다.
만약 그대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투쟁의 구실을 찾지 못한다면
그때는 그대의 아이들과 싸우기 시작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의 남편이나 아내와 싸우기 시작할 것이다.
어떤 때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싸울 것이다.
사실 이유 같은 것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유라는 것은 모두가 합리화의 한 방편일 뿐인 것이다.
그대는 투쟁하지 않고서는 직성이 풀리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사라지기 시작할 것이다.
마치 밑도 끝도 없는 심연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이 말이다.
아침에 그대가 잠에서 깨어나면
몇 초 동안 에고가 없는 상태가 있다.
그대가 아주 순수하고
깨끗한 기분을 느낄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곧 세상이 시작된다.
밤사이 잠 속에서조차 그대는 계속 싸우고 있었다.
그대는 악몽을 계속 만들어 내고 있다.
그리하여 에고와 연결되어 있는
그 실이 완전히 끊어지지 않도록 말이다.
에고는 오로지 투쟁과 투쟁 사이에만 존재가 가능하다.
비록 그대에게 투쟁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해도
그대는 이런저런 식으로 투쟁할 구실을 만들어 내려 할 것이다.
어디엔가 에고를 만족시켜 줄 구실을 찾는 것이다.
그대의 아내를 눈여겨보라.
그대의 아내가 접시를 많이 깨트린 날은
그대에게 그렇게 고분고분할 수가 없을 것이다.
하루 종일 장작을 팬 나무꾼은
주인에게 불평을 하지 않는다.
사냥꾼은 찾아 온 사람에게 화를 내지 않는다.
왜 그런가?
그들의 에고가 카타르시를 충족시켜주었기 때문이다.
아내는 접씨에다, 목수는 나무에게, 사냥꾼은 동물에다
그들의 에고를 풀어버렸기 때문이다.
에고는 자전거 페달과 같다.
에고는 움직여야 한다.
에고는 항상 무엇인가를 찾아다니고
그기에 투쟁을 만든다.
그래서 에고는 부동심(不動心)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에고는 무심(無心)을 두려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