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8. 22. 00:17ㆍ잠언과 수상록
<홍소안님의 소나무여행>
성불(成佛)을 바라는 이유
우리들의 삶이란 참 묘(妙)한 것입니다.
너무나 묘하기 때문에 갈등도 많습니다.
내 마음은 그렇지 않는데
말은 내 맘과 다르게 튀어나오기도 합니다.
내 말과 내 뜻과 다르게
행동이 일어나게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나>라는 주관적인 주체에 <너>라는 상대,
<너>라는 객관적인 환경이 조화롭게 굴러가지 않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남들은 싫다고 하고,
내가 옳다고 여기는 것을 남들은 그르다고 합니다.
내게 기쁨은 남들의 고통이 되기도 하고,
나의 고통이 남들의 기쁨이 되기도 합니다.
내 입에 맞는 것은 남들의 입에는 맞지 않고,
내 입에 맞지 않는 것을 남들은 좋아 합니다.
삶은 참 묘합니다.
그 묘한 것이 격돌하고, 소용돌이 칩니다.
그래서 시비가 따르고, 기쁨에는 슬픔이 따르고,
행복 뒤에는 고통이 따르게 됩니다.
삶의 소용돌이 와중에는
항상 <나>라는 것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고통과 기쁨이란 우리가 이 삶을 버리지 않는 한,
<나>를 버리지 않는 한,
지속되고 끊어지지 않고 반복되고 이어집니다.
누구도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삶도 버릴 수도 없고,
<나>라는 것도 버릴 수 없습니다.
선택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둘을 모두 다 버릴 수도 없습니다.
선택할 수도, 버릴 수도 없다면
이 둘을 통하여 조화를 찾아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조화를 찾아야 할지 막막합니다.
그래서 종교가 필요한 것입니다.
선각자의 도움이 필요한 것입니다.
<중아함, 분별육계경>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내가 가진 감각, 내가 가진 감정,
내가 가진 이 소견은 내 소유가 아니요,
나는 그의 소유가 아니며,
나는 응당 나라는 내가 없고,
나는 응당 있는 것도 아니다.
저 일체는 내 소유가 아니요,
나는 그의 소유가 아니며,
또한 신도 아니다.
이렇게 슬기롭게 관찰하여 그 참 모양을 안다.』
<참 모양을 아는 것> ―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정각(正覺)을 이루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들이 말하는 <마음 뒤편의 마음>입니다.
감정, 감각, 소견, 나라는 존재, 너라는 존재,
이 모든 것에 매달려 있는
우리들의 알음알이의 뒤 안에 있는 마음입니다.
그 알음알이를 내는 주인이 참 마음입니다.
그 참 마음이 나와 내 삶을 조화롭게 만듭니다.
그래서 그 참 마음을 부처라 하고, 불성이라고 합니다.
그럼으로 정각이란 곧 불성을 깨닫는 것이며,
이의 성취는 곧 우리가 말하는 성불(成佛)이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성불(成佛)을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나와 내 삶을 더 맑고 더 향기롭게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