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8. 2. 07:28ㆍ잠언과 수상록
진리를 알려거든 화목부터 익혀라
나무를 사랑하지 못하면 숲을 알 수 없습니다.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면 신을 알 수 없습니다.
임제 선사에게 어느 날 어떤 선비가 찾아왔습니다.
그는 무엇이 기분이 나쁘던지 신발을 벗어던지면서
거만하게 문을 꽝하고 밀치고 들어 왔습니다.
임제선사도 이를 보고는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선사도 화낸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내 방에 나가거라.
네가 들어오고 싶다면 먼저 내가 열고 들어온 그 문과
네가 벗어던진 그 신발에게 먼저 용서를 구하도록 하라.』
임제의 그 말에 그 선비 황당했습니다.
『선사님, 도대체 무슨 뚱딴지같은 말을 하십니까?
선을 하는 사람은 모두 미쳤다고 하더니
이제 보니 그 말이 소문만은 아니군요.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계십니까?
어째서 내가 생명도 없는 저런 하찮은 문에게까지
용서를 구해야 합니까?
내가 신발을 버리든 신든
내 것을 내 마음대로 하는데 왜 그런 것에 신경 씁니까?
누가 들어도 황당한 이런 이야기를 도(道)라 합니까?』
임제선사가 말했습니다.
『당장 나가거라. 다시는 오지 말라.
신발에게 화를 낼 수 있다면 왜 용서를 구할 수가 없겠는가?
화를 냈을 때 그대는 신발에게 화를 낸다는 것이
결코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관계는 관계다.
화를 낸다는 것은 일종의 관계를 맺는 일이다.
그렇게 화를 내면서 문을 세게 닫았을 때
그대는 이미 그 문과 관계를 맺었다.
그대는 잘못한 것이다.
그 문은 그대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그럼으로 먼저 문과 신발에게 사과를 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 방에 들어올 수 없다.
문에게 화를 낼 수 있다면 왜 문을 사랑할 수 없겠는가?』
그렇습니다.
나무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찌 숲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을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 어찌 신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매일 생각 없이 하루에도 수 백 번 열고 닫고 하는 그 문짝,
언제나 나와 같이 하면서 아무런 관심조차 두지 않았든
그 신발과 같은 하찮은 것에 대한 이해와 사랑을 느낄 때
바로 이런 것들이 진정한 사랑이요 화목이 됩니다.
이것이 세상과의 화목이요, 모든 존재들과의 화목입니다.
이런 마음이 없다면 진리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신을 알 수 없고, 부처를 알 수 없습니다.
성경에도 이런 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려라.』<마태복음 제5장>
그렇습니다.
어떻게 세상과 화목하지도 않은 채,
내 이웃과 내 형제와 화목하지 못하고,
공양을 올리고 법당에서 염불을 하며 불국토를 기원한다고 해서
그것이 받아드려지겠습니까?
어떻게 남와 함께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과 내 이웃들과
화목하지도 않은 도(道)를 찾고
신을 찾고 부처를 찾은 들,
그것이 어찌 이루어질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의 자비를 일러 대자대비(大慈大悲)라 합니다.
대자대비란 다름 아닌 그대가 하찮게 여기는
세상 사람들의 눈에 비치지도 않는 그런 것들에게까지
사랑과 자비의 눈길을 보내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도를 구하고 부처를 보려면
모든 존재들과의 화목부터 배워야 합니다.
모든 사람들과의 화목부터 배워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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