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두(話頭)는 지식이 아니다.

2006. 6. 28. 01:00경전과교리해설

 

 

 

화두(話頭)는 지식이 아니다.


지식에는 2가지 카테고리가 있다.

하나는 <알려진 것>이고, 둘은 <알려지지 않은 것>이다.

알려진 것은 지식이 된다. 알려지지 않은 것은 모르는 것이다.

지금은 알려지지 않았더라도 언제가 알려지는 것도 여기에 속한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이는 이분법(二分法)의 시조라 할 수 있는 데카르트 이후 서양을

지배해온 절대적 진리다.


그런데 종교적인 지식에는 여기에 하나가 더 있다.

<알려질 수 없는 것>이 있다.

지식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객관적 사실로 들어 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체와 객체와 분리되어져 있을 때에만 앎이란 것이 존재한다.


그런데 주체와 객체 다시 말해서 아는 자와 알려지는 것이

분리될 수 없다면 그것은 결코 알려질 수 없는 것이다.


신의 존재, 법성, 여래, 진여, 불성(佛性) 등등…

이런 것들은 알려진 것도 아니고 알려지지 않은 것도 아니다.

이것은 지식의 영역이 아니다. <조사서래의> 등과 같이

선(禪)에서 참구하는 화두는 이런 류(類)에 속한다.

그것은 지식으로 정의되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말을 빌어 말을 벗어난 것에 불과한 것이다.


인간의 모든 지식은 언어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언어로서 진리를 밝힐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으로 모든 화두는 질문이면서 질문이 아니고,

답이면서 답 아닌 답을 두고 있는 것이다.


질문은 한마디로 지식이다.

<왜?> 라고 하는 것은 지식을 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두는 지식으로 전달되고 정의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답은 주어지지만 그것은 지식으로 전달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이다>라고 정의된다면

그것은 <아는 자>가 <알려진 것>과 분리되어진 것이 된다.

그것은 부분이지 전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진리는 전체이지 부분이 아니다.

지식은 부분을 들어낼 수는 있지만 전체를 들어낼 수 없다.

그럼으로 소리 없는 소리로, 말 아닌 말로써 전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임제선사는 <할>을 외치고, 구지선사는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그럼으로 진리를 알고자 한다면 지식을 버려야 한다.

옛사람의 말을 빌린다면 식신(識神)을 버려야 하고,

용수의 말을 빌린다면 희론(戱論)을 버려야 한다.

선사들의 말을 빌리자면

『백척낭떠러지에 메달린 그 외줄을 놓아야 한다.』

생사(生死)의 기로에 서면 지식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하물며 진리를 추구함에 있어서랴.

 

<아함경>은 완만하게 이렇게 표현했다.

아(我)와 아소(無我所)를 버리라고.

아(我)란 주관을 버리는 것이고,

아소(我所)란 객관을 버리는 것이다.

다시 말해 모든 안팍의 경계를 버리는 것이다.

백척 낭떠러지에서 한 발을 내 딛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태어나면서부터 <왜?>라는 질문으로 시작된다.

<왜?>라는 질문은 지식을 구하는 마음의 작용이다.

어린아이는 보이는 것마다 묻는다.

『왜 아빠는 수염이 있는데 엄마는 없어요?』

『왜 저 나무는 왜 푸르지요?”』


화두는 이런 작은 지식의 의구심을 타파하는 것이 아니다.

화두의 궁극적 목적은 의심의 답을 찾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어린아이가 찾는 답은 지식이지만

화두로 제시한 답은 지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벽암록>에도 이런 가르침이 있다.


조주스님이 이르기를

『지극한 도는 어려움 없으니 간택을 안 하면 될 뿐이다.

말하는 순간 간택이 명백하다. 나는 명백한 속에도 있지 않는데

그대들은 도리어 이를 보호하고 아끼려 하느냐?』

고 하니 그때 어떤 스님이 물었다.

『이미 명백한 속에도 있지 않다면

또한 무엇을 보호하고 아낍니까?』

『나도 모르겠다.』

『스님께서 모르신다면

무엇 때문에 <명백한 속에도 있지 않다.>고 하십니까?』

그러자 조주스님이 말했다.

『묻는 일이 끝났으면 절하고 물러가라.』


설두스님은 이를 인용, 하나로 꿰뚫어 송(頌)하기를

『지극한 도는 어려움 없으니 간택을 안 하면 될 뿐이다.』

라고 했다. 그리고 이어서

『요즈음 사람들이 옛 사람의 뜻을 알지 못하고 오로지 연구(言句)만 되씹을 뿐이니 언제 마칠 기약이 있겠는가? 팔방으로 통달한 작가 선지식이라면 비로소 이 말을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했다.

 


화두란 그대의 지식을 시험하는 입시(入試)의 장이 아니다.

그것은 질문이면서 질문이 아니다.

말이면서 말이 아니다.

화두는 그대의 희론(戱論)의 장이 아니다.

그대의 지식을 뿌리 체 뽑아 버리고,

그대의 말을 막아버리고,

그대의 의심을 바닥까지 파내어

부분이 아니라 전체를 비출 수 있는 거울이 되도록

그대의 마음에 빈 공간을 만들어주고자 하는 불도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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