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2)

2006. 6. 15. 00:10경전과교리해설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 (2)


신의 상징물은 곳곳에 널려져 있다.

절에 가면 관음불, 석가모니불 등 많은 동상을 본다.

교회나 성당에 가면 예수의 동상(銅像)을 본다.

힌두교의 성전에는

쉬바신, 크리슈나 등 많은 동상들을 본다.

그러나 그 동상들은 죽어 있는 형상물에 불과하다.


그 동상들은 인간이 만든 신들이다.

그것들은 모두 가짜 신들이다.

생각해 보라.

인간이 어떻게 신을 만들 수 있단 말인가?

신은 인간을 만들 수 있다.

그러나 피조물인 인간이

어떻게 창조주인 신을 만들 수 있단 말인가?

모든 상징물은 그래서 위험하다.

그 상징들은 사실적으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상징은 사실이 아니다.

신을 표현할 수 있는 어떠한 이미지도 없다.

언어는 결코 진리를 표현할 수 없다.

<신(神)>이라는 이 단어는 진짜 신이 아니다.

우리가 <불>이라는 이 단어는 진짜 <불>이 아니다.

아무리 메뉴를 먹어보아도 그대의 배는 부르지 않다.

메뉴는 실제 음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상징들은 메뉴와 같다.

사람들은 음식이 아니라

이 메뉴를 주식(主食)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아에 허덕이고 있다.

사람들은 왜 그토록 괴로움을 겪어야 하는지

그것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이미지들, 성전(聖典)들,

판에 박은 종교 교리들 때문이다.


궁극적 진리의 길은

책조차도, 종교의 경전조차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베다도, 회교도의 코란도, 기독교의 성전도,

불교의 경전도 이제는 더 이상 도움을 줄 수 없다.

진리는 언어나 철학 따위와는 전혀 무관하기 때문이다.


진리는 언어의 차원 너머에 있다.

어떤 이론도, 진리를 담을 수 없다.

진리는 끝없이 넓지만

언어는 콧구멍보다 더 좁기 때문이다.

진리는 전체다. 하늘과 같다.

이론은 부분이다. 성냥갑과 같다.

이 조그만 성냥갑이

어떻게 저 넓은 하늘을 담을 수 있겠는가?


누구의 말도 듣지 말라.

오직 그대 자신의 경험만을 들어라.

오직 본질적인 경험만이

그대에게 진리의 길을 보여 줄 것이다.

진리, 아름다움, 그리고 신비,

이런 것들은 모두 체험의 영역이지 언어의 영역이 아니다.

이해의 차원이 아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체험이 아무리 절실한 것이라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 사람만의 것이다.

결코 그대 자신의 체험은 될 수 없다.


예수가 체험했던 세계가 아무리 절실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수의 체험일 뿐

그대 자신의 체험은 될 수 없다.

조사들의 체험이 아무리 절실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조사들의 체험이 될 뿐

그대 자신의 체험은 될 수 없다. 


그래서 달마는

직지인심(直指人心)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고 했다.

사람의 마음을 바로 보고

그 본성을 본다면 부처가 된다는 의미다.


이는 곧 본질적인 경험만이,

본질적인 체험만이 진리를 볼 수 있다는 의미다.


어떤 경전도, 어떤 언어도, 어떤 상징물도 아닌

그대 자신의 궁극적인 체증(體證)만이

부처란 진리를 볼 수 있다는 의미인 것이다.





흐르는 곡: 깨달음의 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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