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2)

2006. 6. 10. 00:42붓다의 향기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2).


선어(禪語)에 이른 말이 있습니다.

『만법귀일(萬法歸一) 일귀하처(一歸何處)』


<모든 존재는 하나로 돌아가는 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 가는냐? >라는 의미입니다.


인간은 다세포(多細胞) 동물입니다.

단세포(單細胞) 동물은 아메바입니다.


아메바는 눈도 코도 귀도 없습니다.

오로지 하나, 입뿐입니다.

그래서 먹고 또 먹는 일 밖에 모릅니다.

그래서 몸이 비대해지면 둘로 분리합니다.

아메바의 삶은 과거도, 미래도 없습니다.

단지 살기 위해서 먹고,

먹기 위해서 살고 있는 것뿐입니다.

단세포동물은 그렇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살찐 돼지 보다 마른 소크라테스가 낫다.』고.

유감스럽게도 오늘날 우리의 사회는

살찐 돼지 보다 더 살찐 소크라테스가 많습니다.

몸보다 입이 더 큰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돼지가 하는 일도 아메바와 다르지 않습니다.

단지 하나 다르다면 돼지는 자기 새끼를 돌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성이 아니라 본능에 의한 것입니다.

돼지는 도살장에서 끌려가 죽음을 기다리면서도

오로지 먹는 일에는 정신이 없습니다.

돼지는 과거의 습(習)과 현재 뿐입니다.

돼지에게는 미래가 없습니다.


미래를 생각하는 유일한 존재는

바로 인간이라는 존재입니다.

이성(理性)과 분별력을 지닌 인간입니다.

그러나 그 이성(理性) 그 분별(分別) 때문에

인간의 영혼은 더 고독해지고 불행해져가고 있습니다.


 

로댕(Auguste Rodin)은 유명한 초상작가입니다.

그의 작품 <생각하는 사람>은 명작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발가벗고 있는 그 초상(肖像)이

도대체 무엇을 생각하고 있기래

불후의 걸작으로 우리에게 기억되고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부자가 될까?

어떻게 하면 출세할까?

그것을 생각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IMF의 혜택자인 실업자(失業者)자라서

<어디 가서 한 끼 얻어먹을 수 있을까?>

그것을 생각하고 있는 걸까?

그것도 아니면 잘나가는 철학자처럼

<이 우주의 실체는 무엇일까?>하고 생각하고 있는 걸까.


아닙니다. 그것은 아닐 것입니다.

아마도 그것은

<이성을 지닌 호모사피엔스가 무엇인가?>

그것에 대한 의구심이었을 것입니다.

인간 존재에 대한 의구심이었을 것입니다.


 

분별과 이성을 지닌 동물은 인간입니다.

그 분별과 이성으로 인하여

과학은 놀라운 정도로 발달하였습니다.

그래서 물질문명은 우리의 몸을 호사스럽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분별과 이성으로 우리의 마음은

항상 미래에 대한 불안과 의심으로

가야할 방향을 잃고 카오스에 빠졌습니다.

육신은 편해졌지만

마음은 더 공허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아무리 생활이 좋아져도

우리내 인생은 무상(無常)합니다.

우리가 그토록 매달리고 의지하는 모든 것들도

바뀌고 변하며 언젠가는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럼으로 모든 것은 주어진 그대로서는 어려움이 있고,

불편하고 제한이 있으며, 따라서 믿을 수 없다는 것이

우리들의 현실이요,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계입니다.

이렇게 믿을 수 없는 존재, 무상한 존재가

바로 우리들 중생입니다.

 

영원한 실체라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도 없고 부처라는 절대존재는 없습니다.

성경을 천만번 읽어도 하나님 된다는 소리는 없습니다.

팔만대장경도 부처가 되는 길을 알려주지 않습니다.


영원한 실체가 없기에 자주성(自主性)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내 뜻대로 되질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고통일수밖에 없습니다.


영원한 것을 바라고,

영원한 즐거움을 바라는,

우리의 기대와 어긋날 수밖에 없습니다.


어둠이 온 산을 덮어버리듯

무상(無常)의 그늘은

모든 지식, 철학과 이즘을 덮어버립니다.

그래서 영혼이 고독해지고 공허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허무에 빠지고, 탐욕에 빠지고

향락과 쾌락으로 달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생주이멸(生住異滅)합니다.

더 넓은 저 우주라는 것도

성주괴공(成住壞空)합니다.


그러나 이 무상 속에서 찾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생각하는 사람>은 그것을 암시합니다.


 

돌멩이는 자신의 삶을 고뇌하지 않습니다.

식물도, 동물도 그렇습니다.

그들은 모두 자기의 삶을 고뇌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삶에 고뇌하는 동물은 바로 인간입니다.

이성과 분별력을 지닌 인간뿐입니다.


의식이 없는 광물은

광물로서 격(格)이 있습니다.

의식을 지니고 있는 동물은

동물로서 격(格)이 있습니다.

이성을 지니고 있는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격(格)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높은 격(格)이 있습니다.

인간의 정신, 마음을 넘어선 격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주격(宇宙格)입니다.

불격(佛格)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그것은 사실 이름이 없습니다.

힌두인 들은 <이름 없는 격>이라고 하고

기독교인들은 <크리스찬 격>이라고 합니다.

그 이름이 무엇이든 상관없습니다.

더 높은 경지로의 비상(飛翔)이 중요합니다.

물질적이고, 가시적이고, 유위적인 이 삶에서

더 높은 비상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반야심경>은 노래합니다.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 승아제 모지 사바하』


가자 가자 더 높이 가자 우리 다 함께 같이 가자

깨달음이여, 영원하여라.


그렇게 노래합니다.

우리가 가야할 길은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무상한 이 삶에서 더 높은 격으로 비상해야 합니다.

 

<나>라는 이 육체는 새장입니다.

탐욕과 애욕, 명예욕도 새장입니다.

분별과 이성도 새장입니다.

사념과 이즘의 세계도 새장입니다.


물질적이고, 가시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것들은

모두가 새장이요, 에고의 원천이 됩니다.

자아의식인 그 <에고>가 바로 새장입니다.


높이 날기 위해서는 새장을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일체 유위법의 새장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름과 물질의 새장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욕망과 사유의 새장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생사의 윤회라는 새장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수행자가 되어, 연륜이 들어서,

무엇을 조금 알았다고 해서,

바늘 반쪽 같은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서,

자만하고 거기에 머물러서도 안 됩니다.

그래서 <법구경>도 말합니다.

『멀리 더 멀리 보는 이는

높이 더 높이 난다.

그는 결코 한 곳에 머물지 않는다.

흰 새가 호수를 떠나 하늘 높이 나르듯

그는 이 집착의 길을 떠나 높이 더 높이 난다.』


새장을 벗어난 새라야 높이 날 수 있습니다.

비상해야 합니다. 저 니르바나의 세계로.


높이 나는 새가 되어야 멀리 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