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법인의 메시지(제5과)

2006. 5. 21. 02:10야단법석

 

 

 

 

제5과  삼법인의 메시지


모든 것은 무상이고, 바뀌고 변하며 언젠가는 사라지는 것이다.

그럼으로 모든 것은 주어진 그대로서는 어려움이 있고,

불편하고 제한이 있으며, 따라서 믿을 수 없다는 것이 우리들의 현실이요,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계다.

이렇게 믿을 수 없는 존재 다시 말해서 무상한 존재는 영원한 실체가 없고, 실체 없는 것은 자주성(自主性)이 없기 때문에 고통일 수밖에 없다는 이러한 현실은 영원한 것을 바라고, 영원한 즐거움을 바라는 우리의 기대와 어긋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린아이가 청년으로 성장하는 것은 기쁨이라면 그 청년이 백발의 노인으로 늙어 가는 것은 슬픔이요, 필할 수 없는 고통이다. 또한 가난한 자가 노력하여 부자가 되는 것은 기쁨이지만, 부자가 그의 재산을 영원히 지키지 못하고 잃게 되는 것은 고통이 아닐 수 없다.

이는 모두 총체적 고통(皆苦)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럼으로 세상에는 절대적으로 영원불변한 것은

적어도 주어진 세간에 존재하는 한 결코 바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들의 요구가 우리들의 욕망이 그것을 끝내 구하려고 한다면 바로 그러한 존재를 두고 고통(苦)이라고 하는 것이다.


제행무상, 제법무아, 일체개고란 단순히 허무한 인생이나, 절망적인 삶을 이야기 한 것이 아니라 우리네 범부들이 지고하고 심오한 열반이라는 이상(理想)을 깨닫지 못한 체 당면한 욕망에 미혹되어 참으로 구해야 할 것을 잊어버리고 있는 것을 먼저 경고하기 위해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다. 따라서 이는 세속(世俗)의 중생들을 위한 성자의 견지에서 판단한 진리의 말씀인 것이다.


그리고 나서 부처님께서 열반적정인을 말씀하신 것은

욕망의 이면적 의의에 대하여 그 이상(理想)의 기준을 세우고, 그것에 의해 현실적 욕망을 관찰하고 평가하여 욕망은 스스로 자기를 배반하고 있다는 입장에서 현실을 벗어나는 길을 밝히신 것이다. 그 밝은 길을 부처님은 무명(無明)을 벗어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사람들은 무명을 벗어나기 위해 도리어 지식과 같은 인위적인 방법으로 이를 얻으려 하고 있다. 갖가지 분별심을 일으켜 열반을 구하려고 하고 있다. 부처님께서 이런 현실의 기원을 무명이라고 이름 한 것은

어떠한 지식으로도 욕망 그 자체가 참으로 추구해야 할 이상(理想)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무상과 무아를 말씀하신 것이다.

그럼으로 마음에 분별심을 떨쳐버리고 무상과 무아를 자각할 때만이 그기에 열반이 있는 것이다.


예컨대 주먹 진 손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모를 경우 분별심이 생긴다.

그러나 손을 펴서 그것을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진리는 이렇게 걸림이 없이 바로 볼 때 아는 것이다.

무명이란 이와 같은 것이다.

그 가려진 것은 다름 아닌 번뇌, 지식, 개념, 혹(惑) 등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겪는 현재의 부자유와 불만족은 모두가 무명, 애욕, 아집 등의 단어로 표현되는 것들로 속박되고 갇혀져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운명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인연의 법칙 안에서의 우리들의 의욕이요, 욕망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그럼으로 이것들을 벗어남으로서 자주적(自主的) 생활은 가능하게 된다.

무상과 무아를 자각했기 때문에 무엇에도 매이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스스로 마음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자주적이 되면, 생활이 바뀌고, 생활이 바뀌면 삶 자체가 바뀌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바세계에서의 해탈이요, 열반인 것이다. 즉 해탈에 의한 자주적. 보편적 생활을 긍정하는 것이다.


열반이란 해탈이요, 해탈이란 곧 진리에의 자각인 것이다.

해탈은 무명을 여의는데 있는 것이다. 신이나 절대자에 의한 선악의 보상으로 주어지는 것이라면 해탈은 존재할 필요가 없다. 그저 율법만이 절대적 가치를 지니므로 그것을 지키면 보상을 받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로 보면 기독교들의 <구원> <부활>의 의미는 보상이지 해탈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부처님은 이르시길 모든 사람들은 미혹되었다고 말했다. 그것은 사람들이 끝없는 윤회의 강에 뛰어드는 행동을 계속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서 빠져나오려고 해도 더 깊이 가라앉을 뿐이다. 그것은 그들이 자신의 무상(無常)과 무아(無我)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진정한 자기의 본성을 놓치고 허망한 분별심과 다투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혹된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지만 부처는 자기 자신을 아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다.

부처란 누구인가?

무상의 진정한 의미와 무아의 진실을 자각한 사람이 아니겠는가.


 

우리 마음의 능력은 한계가 없다. 그것의 나타남 또한 한이 없다.

그대의 눈으로 형태를 보고 그대의 귀로 소리를 들으며, 코와 혀로 냄새맡고 맛보며 모든 방식으로 느낄지라도 그것은 모두 그대의 마음이다. 매 순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 바로 그대의 마음이다.


경에 이르기를 [부처님의 모습은 끝이 없으며, 그래서 그는 깨어있다.]고 했다. 부처님의 여러 가지 모습은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 모습이 어떻게 변하든지 마음은 그것을 구분할 수 있으며 그것은 마음의 각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은 어떤 특정한 형상도 갖지 않으며 그 깨어 있음에도 한계가 없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여래의 모습은 끝이 없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여래의 깨어 있음이다.]

다섯 가지 요소로 구성된 육체는 한계가 있다. 그것은 삶과 죽음에 따라서 좌우된다. 그러나 진신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존재한다. 부처님의 진신(眞身)은 결코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마음의 본성은 곧 부처다. 그럼으로 경전은 [사람은 항상 자신 속에 부처의 본성이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한다. 마하가섭도 오직 자신의 본성을 깨달은 것이다.


또 경에 이르기를 [형상을 가진 모든 것은 환상이다.] 라고 했다.

또 이르기를

[그대가 어디에 있든지 거기에 부처가 있다.] 라고 했다.

그대의 마음이 부처라는 뜻이다. 그대의 마음은 본래부터 텅 비어 있다.

그럼으로 모든 형상들은 환상일 뿐 그 형상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열반의 길이란, 해탈의 길이란 형체가 있든 없든, 모든 형상들로부터 벗어날 때 성취되는 것이다. 비어있는 마음, 깨어있는 마음이란 무심한 마음을 말하는 것이다. 분별심이 사라진 마음이다. 욕망이란 분별심으로부터 일어나고, 애착으로 굳어가는 가는 것이다.


촛불을 보면서 그 초의 모양과 색깔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있다. 초는 여러 가지 모양을 갖고 있다. 그 큰 것도 있고, 작은 것도 있고, 둥근 것도 있고, 네모난 것도 있다. 굵은 것도 있고, 가는 것도 있다. 빨강도 있고, 파란색도 있다. 크기가 다르고 색깔이 다른 수많은 초가 있다. 그러나 모든 초에서 나오는 불꽃은 같은 것이다. 촛불을 보는 자는 더 이상 초에 집착하지 않는다. 초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촛불에서 나오는 빛이 중요한 것이다. 분별심을 여의 마음은 무심한 마음이다. 무심은 모든 깨달은 자에게서 나오는 촛불과 같다. 그들은 자신의 마음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무심을 따라 산다. 모든 것은 덧없으며, 영원한 것이 아니며, 영원하지 못하기 때문에 고통이라는 것을 자각할 때 마음은 무심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 무심한 마음이 바로 해탈로 가는 길이요, 열반에 드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