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의 이입사행론

2006. 5. 12. 00:24경전과교리해설

 

달마의 2입(入)4행(行)


대개 진리에의 길은 많지만

그것을 줄여서 말한다면 두 가지밖에 없다.


첫째는 원리적인 방법(法入)이며,

둘째는 실천적인 방법(行入)이다.


원리적인 방법이란 경전에 의해 불교의 대의를 알고

일체 중생은 범인이건 성인이건

모두 평등한 진실의 본질을 지니고 있지만

다만 외래적인 망념에 사로잡혀

그 본질을 실현할 수 없다는 것뿐임을 확신하는 것이며,

만일 망념을 떨쳐 버리고

본래의 진실로 돌아가

신심을 통일하여 벽과 같은 조용한 상태를 유지하며

자신이건 타인이건 범인이건 성인이건

동일하게 하나인 곳에서 굳게 안주하여 동요하지 않고,

또한 결코 언어에 의한 가르침에 의존하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암묵 가운데서 진리와 완전히 합일되어

분별을 가할 필요도 없이 조용히 가라앉아 작위가 없게 된다.


 

실천적인 방법(行入)이라고 하는 것은 네 가지의 실천이며,

기타의 많은 실천은 모두 이중의 그 어느 것에 포함되는 것이다.

 

네 가지란 무엇인가?

제1은 전세의 원한에 보답하는 실천(報恩行)이며,

제2는 인연에 맡기는 실천(隨緣行)이며,

제3은 물(物)을 구하지 않는 실천(無所求行)이며,

제4는 있어야 할 모습대로 있는 실천(法行)이다.


전세의 원한에 보답하는 실천이란 무엇인가 하면

수도자들이 만약 고통을 만날 때

자기 마음속에 다음과 같이 반성하는 것이다.

나는 아주 먼 옛날부터 무한한 시간에 걸쳐

진정한 자신을 망실하고

말단을 좇아 미망의 세계에 방황하고,

많은 원한과 미움의 마음을 일으켜

한없이 타(他)와 대립하여 사람을 해쳐왔다.

지금엔 내가 비록 죄를 짓는 일이 없다고 하더라도

이 고뇌는 모두가 자기 자신의 전세의 죄업이 맺은 결과이다.

신이나 악마가 나에게 준 것이 아니다 라고 생각하여

이를 달게 받아 인종하며, 결코 원망한다든가 변명하지 않는 것이다.

어떤 경전에

『괴로움을 만나도 걱정하지 말라.

왜냐하면 너의 의식은 스스로 깊이 근본에 통해 있으니까』

라고 말하고 있다.

이런 생각이 일어날 때

사람은 본래 원리와 서로 접촉하게 되며,

원한을 계기로 하여 도에 나아갈 수 있다.

그리므로 원한이 보답하는 실천을 권장하는 것이다.

 


제2의 인연에 맡기는 실천이란

일체 중생은 자아가 없으니 모두 인연의 힘에 좌우되고 있다.

고락을 같이 감수하는 것도

모두 어느 것이나 인연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다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만약 바람직한 좋은 보답이나 명예 등을 얻더라도

그것은 모두 자신의 과거의 숙명적인 원인이 가져오게 한 것이며

지금은 마침 그것을 얻긴 했지만 인연이 다하면

또다시 무로 돌아가는 것이므로

아무 것도 기뻐할 일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세간적인 성공이나 실패는 모두 인연에 의한 것이며

자신의 마음 그 자체는 아무런 증감도 있을 수 없는 까닭에

기쁜 해후에도 동요되지 않으면 암묵 가운데 진리에 맞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연에 맡기는 것이다.

 


제3에 물(物)을 구하지 않는 실천이란

세상 사람들은 항상 미망에 빠져 있어

어떤 경우에도 물을 탐내지만(이것은 즉 희구(希求)이다)

그러나 지자(智者)는 진실은 깨닫고

본질적으로 세속과 차원을 달리한다. 

마음을 자연의 작위 없는 곳에 가라앉히고

신체 또한 운명의 움직임에 맡기며,

모든 존재를 실체가 없는 것으로 생각하며,

물질적인 욕망을 지니지 않는 것이다.

모든 이가 아는 바와 같이

아름다운 언니인 공덕천(功德天)과

추한 모양을 지닌 동생 흑암녀(黑闇女)는

항상 서로 함께 다니며 떨어지지 않았다.

세 개의 기초로 이룩된 노후한 현실의 주거는

마치 불붙는 집과 같이 위태롭고

육체가 있는 한 사람은 모두 괴로운 것이다.

어떤 사람이 거기에 안주할 수 있으랴?


이상의 점들을 잘 반성한다면

본래부터 일체의 존재 가운데서

욕념을 버리고 희구하는 일도 없게 된다.

어떤 경전에

『희구하면 모두 괴롭다. 희구하지 않을 때야말로 즐겁다』

라고 했다.

이로써 희구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진리의 실천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제4의 있어야 할대로 사는 실천이란

만물이 본질적으로 청정하다는 원리를

있어야 할대로 사는 즉 법이라 이름 짓는 것이다.

이는 근본적인 원리로 모든 현상은 모두 빈 공이며

거기에는 더러움도 없고 집착도 없고,

이(此)도 없고 지(彼)도 없으므로 이와 저와 대립도 없다.

어느 경전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법(理法)은 생존자로서의 실체를 지니지 않는다.

생존자로서의 더러움을 초월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법(理法)에는 자아가 없다.

자아의 더러움을 초월하고 있기 때문이다.』

라고. 


지혜 있는 사람이 만약 이 진리를 깊이 체득할 수 있다면

그는 반드시 있어야 할대로 살아 갈 것이다.

무릇 존재 그 자체는 인색한 일이 없으므로

육체나 재산을 들여서 베푸는 덕을 실천하고

마음에 아까워하는 일이 없다.


그는 자신과 상대와 베푼 물건과의 삼자가

애당초 모두 공임을 알고 있는 까닭에

아무 것도 즐기지 않으며 아무 것에도 사로잡히지 않고

다만 세속적인 더러움을 청정하기 위해서만

모든 생물을 도와 인도하면서

더구나 그러한 상대성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이야말로 바로 자리(自利)인 동시에 이타(利他)이기도 하며,

또한 더욱 깨달음의 길을 장식하는 것으로 되는 것이다.

베풀음의 덕(德)이 이와 같은 이상

딴 5종의 바라밀다에 대해서도 역시 마찬가지다.

망상을 제거하기 위해서

6종의 바라밀다행을 실천하면서도

더구나 행하는 바가 없는 것이며

이것이 곧 있어야 할대로 사는 실천이다.


[출처: 達摩의 禪語錄 글쓴이: 李慧惺. 대광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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