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無)와 자비(慈悲)

2006. 4. 30. 09:18경전과교리해설

 

 

 

무(無)와 자비(慈悲)


<무(無)>와 <자비(慈悲)>는 같은 에너지의 양쪽 면이다.

본질적인 입장에서 볼 때 <無>는 에고가 없다는 의미이다.

에고란 "나는 ~이다" 라는 뜻이다.

존재, 그 자체가 無라면 나 또한 이 無에 참가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존재의 이 한 부분이 되지 않을 수 없다면

 <"나는 ~ 이다">라는 이 에고를 버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에고는 나를 <누구누구>로 만들고 있다.

나를 <〜인 자>로 한정짓고 있다.


그러나 내가 순수한 존재, 그 자체 속에서

그 어떤 에고도 없을 때 그것은 그대로 <무>인 것이다.

아나뜨마(anatma 무아)인 것이다.


이 본질 속에서 이 <무>의 바다 속에서

<나>가 어찌 <무>로 되돌아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여기 본질, 그 자체로서의 <무>와

에고가 사라져 버린 나로서 <무>가 서로 만난다.

 <무>의 어머니와 <무>의 아들이 서로 만난다.

서로 속에 용해된다.

그리하여 마침내 에고가 사라져 버린 그기에

자비심은 그대로 용출되는 것이다.

 

<에고>는 격분이다.

그러나 <에고 없음>은 자비다.

에고가 있는 곳에는 투쟁이 있다.

그러나 에고가 없는 곳에는 사랑이 있다.

그러기에 자비란 세련된 것을 뜻하지 않는다.


<무>속에서 살 수 있다면 자비는 저절로 넘쳐 나올 것이다.

<무>로서의 존재의 이 특성은 에고의 전멸을 향한 첫 걸음이다.


인류에게 공헌한 붓다의 위대한 업적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다른 종교들은 에고의 소멸이란 미명 아래

에고를 세련시키고 있을 뿐이다.

모범적인 사람들은 이런 느낌을 가진다.

『나는 원리원칙을 따르는 사람이다.』


도덕가들은 말한다.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도덕적이며 고상한 인격의 소유자다.』


종교 수행을 하는 사람들은

종교를 갖지 않은 사람보다 훨씬 종교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모든 생각들은

하나같이 에고의 강화, 그것 밖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이런 생각들은 무한에 이르는 데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그래서 붓다는 말했다.

[잘 세련시키는 것, 이것만이 문제의 해결이 아니다.

에고라고 내세울 그 어떤 것도 없다는 것을

이해하고 깨닫는 것만이 문제 해결의 첩경이다.]


흐르는 강물에 그대를 비추어보라.

물은 쉴새 없이 흘러가는데

그대의 그림자는 물위에 그냥 떠있다.

흐르는 물위에 허상만 떠있다.

<그대>라는 존재는

사념의 물결위에 떠 있는 그런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다.


그대 자신을 응시해 보라.

거기 누가 있는가?

그 누구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침묵, 침묵,…

그리고 또 침묵만이, 침묵의 심연만이 있을 뿐이다.


소크라테스는 말했다.

『그대 자신을 알라.』


그리고 붓다는 말했다.

『왜, 그대 자신이 무엇인가를 알려고 하는가?

거기 그대 자신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거기 수정처럼 눈부신 침묵, 침묵이 있을 뿐이다.

밑도 끝도 없는 존재의 심연이 있을 뿐이다.』


처 부술 수 있는 벽은 아무 데도 없고

그대와 맞설 어떤 <나>마저도 없다.

<무>, 빈 이 거울의 공간만이 있을 뿐이다.

존재, 그 자체로서의 거울의 빈 공간만이 있을 뿐이다.


여기에서 거울의 빈 이 공간 <무>로부터 모든 것이 넘쳐흐른다.

자비라는 물이 흘러나온다.

그래서 무(無)와 자비는 같은 에너지의 양쪽 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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