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2. 19. 20:11ㆍ야단법석
섹스와 살생 그리고 진리
어느 속인이 달마대사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한다.
“결혼한 속인은 성생활을 포기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부처가 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질문은 단지 자신의 본성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나오는 질문이다.
진리는 남녀간의 단순한 성교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진리는 업의 행태를 두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한 번 그대가 자신의 본성을 보게 되면 성은 기본적으로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은 그대의 즐거움과 함께 끝난다. 만일 어떤 습관이 남아 있더라도 그것들은 그대에게 해를 끼칠 수가 없다. 그대의 본성은 본질적으로 순수하기 때문이다. 그대가 오욕락의 육체 속에 머무른다 해도 그대의 본성은 기본적으로 순수하다. 그것은 결코 썩어 없어지지 않는다.
한 번 그대가 모든 욕망의 집착을 끊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두고 볼 수 있다면 그대는 자유로워질 것이다. 삶과 죽음에서조차도 자유로워 질 것이다. 그대는 모든 것을 변화시킬 것이며 막힘없는 영적 능력을 갖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대가 어디에 있던지 평안할 것이다. 만약 그대가 이것을 의심하면 그대는 그 무엇을 통해서도 알 수 없다. 그렇지 않다면 그대가 행동할 때마다 그대는 생사의 바퀴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간다. 그러나 그대가 한 번 자신의 본성을 본다면 그대는 이미 부처인 것이다.
부처가 된다는 것은 진리를 자각한다는 말이다. 진리의 자각이란 본래의 이 마음에 대하여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진리의 자각이란 섹스라는 성(性)의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즐기려는 그대의 마음을 아는 데에 있는 것이다. 성을 즐기고 안 즐기고는 진리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업의 문제가 될 뿐 진리의 문제는 아니다. 왜냐하면 진리의 자각은 섹스라는 행위뿐만 아니라 모든 행위를 초월하는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찾는 것이 곧 구도의 정신이다.
사람들은 또 이런 질문을 한다.
“저는 횟집을 경영하고 있습니다.
직업상 살생의 업을 짓지 않을 수 없는데 어떻게 부처가 될 수 있습니까?"
오늘날 살생을 업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일식집을 비롯하여, 푸줏간,추어탕집, 정육점, 보신탕집, 식당, 치킨집 등등…
불교는 살생을 절대 금기(禁忌)로 하고 있다.
이 질문의 요지를 달리 표현하면 계율에 금한 것을 파계하고도 성불할 수 있는냐 하는 질문이다.
일숙각선사의 <증도가>에 이런 말이 나온다.
『단지 중한 계율을 범하는 것이 보리를 장애 하는 것인 줄만 알고,
여래가 열어 놓은 비결을 보지 못하는 구나』
(只知犯重障菩提 不見如來開秘訣)
참으로 이 질문에 적절한 대귀라 아니할 수 없다.
살인은 죄악인가, 아닌가?
살인은 죄악이다. 생명의 본질을 훼손하는 것은 분명 죄악이다.
그럼으로 이것은 진리의 문제가 된다.
그러나 직업이 백정이기 때문에 먹고살기 위해서는 살생이 불가피 하다.
그런데 이것이 죄악인가? 라고 한다면 이것은 진리의 문제가 아니라 업의 문제다. 행동이 아니라 행위의 문제다. 행동은 비인위적이고 행위는 인위적이고 습관인 것이다. 왜냐하면 업은 선업도 있고 악업도 있다. 선업이든 악업이든 업은 업이다. 그것은 인위적이다. 그러나 진리의 자각은 이런 업을 논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진리의 본질은 선업이든 악업이든 업 그 자체를 초월하는 데 있는 것이지 그 업의 행위가 선이냐 악이냐를 따지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진리의 자각이란 그 본질이 살생과 같은 행위인 업을 논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그 행위를 하는 그대 마음의 실체를 자각하는 그것에 있는 것이다. 다만 선한 행위는 진리에 가까운 길이 되고, 악한 행위는 진리와 멀어지기 때문에 수행의 방편으로 팔정도에서 바른 직업을 가지라는 의미에서 정명(正命)을 둔 것이다. 궁극적으로 말해서 진리의 본질은 업에 있지 않고 행위를 하는 그대 마음을 자각하는 것에 있기 때문에 그 어떤 업을 통해서 진리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이다.
계율과 진리란 무엇인가?
모든 계율은 인위적인 것이다. 인위적인 것은 유위(有爲)다. 유위는 제한되고 한계가 있다. 그것이 업을 짓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는 유위가 아니라 무위(無爲)다. 인위적이 아니다. 그것은 경계도 한계도 없다. 그것은 업을 벗어나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 어떻게 제한적이고 한계를 지닌 인위적인 계율이 비인적이고 한계가 없는 무위를 규제할 수 있겠는가? 유위는 적은 것이요, 무위는 큰 것이다. 어떻게 적은 것이 큰 것을 가로막을 수 있겠는가? 앞에서의 두 질문은 부처님의 진리를 옳게 듣지도 못하고, 바르게 이해도 하지 못한 것에 연유하는 것이다.
진리란 무위다. 그럼으로 그것은 한계와 제약이 없다. 걸림이 없다. 그래서 진리는 무엇보다 “자연스럽고 여유로움에 있는 것이다.” 이는 도덕적이 아니라 자연스러워야 하는 것이 진리의 생명이라는 의미다. 그럼으로 계율과 같은 인위적인 것에 갇히는 것은 곧 에고와의 싸움인 것이다. 계율은 곧 인위적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업이다. 그러나 진리는 에고와 싸우지 않는다. 진리는 업과 싸우지 않는다. 진리는 자연스럽게 되는 것이다. 무위이기 때문이다. 걸림이 없는 무애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으로 진리를 자각하기 위해서는 그대 주위에 도덕이나 인격의 성벽을 만들려고 애쓰지도 말고 또 그대 자신을 계율로 너무 구속해서도 안 된다. 그대 자신을 계율로 구속한다면 그대가 만든 그대 자신의 계율은 이제 그대의 멍에가 될 것이다. 업이 되어 그대를 몰아갈 것이다. 그대 주위에 계율의 감옥을 만들지 말고, 대신 그대 자신을 자연스러움의 물결에 내 맡겨야 한다. 그리고 상황에 따라 움직이고, 상황에 따라 응답해야 한다. 인격의 옷을 입지 않아야 하고, 고정된 태도를 갖지 않아야 한다. 물과 같이 자유로워져야 한다. 물이 흐르듯 그렇게 흘러가야 한다. 역행해서도 안 되고, 얼음처럼 고정되지도 않아야 한다. 흐름을 거역해서도 안 된다. 그대 자신에게 그 어떠한 것도 강요해서는 안 되는 것이 진리의 길이다.
그러나 사회는 그대에게 강요하고 있다. 무엇인가를 하도록 강요하고 있다.
「착해야 한다.」「도덕적이어라.」「이것을 해라」「저것을 해라」
그러나 깨달음은 다르다. 깨달음은 모든 것을 넘어서 버렸다. 사회와 문화와 그리고 문명까지를 넘어서 버린 것이다. 지나치게 우리가 문화적일 때 우리는 비인위적인 것의 전부를 상실한다. 존재의 심연으로부터 멀어져 간다. 생명의 불꽃은 꺼져버린다. 비인위적인 것을 모두 상실해 버린 거기에 그대는 무엇으로 남아 있겠는가? 그대는 이제 하나의 기계일 뿐이다. 표류할 수도 없고, 흐르지도 못하는 생명이 없는 차가운 기계일 뿐이다. 체계를 만들려고 애쓰지 말아라. 순간순간을 살아라. 순간을 놓치지 말아라. 잠 깨인 상태인 자로 살아라. 응시하면서 살아라. 불꽃으로 살아라. 이것이 가장 깊은 진실이다. 이것 이외의 진실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진리를 말한다는 것은 오직 그대의 본성을 보는 것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진리는 업을 짓는 것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우리의 업은 우리를 잡아 두지 못한다. 달마대사를 비롯하여 헤아릴 수 없는 그 많은 선지식들께서 인도를 떠나 중국을 비롯하여 이국땅으로 오신 것은 오직 이 마음의 등불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그 모두가 단 한 가지 이유에서 오신 것이다. 그것은 바로 “마음이 곧 부처이다.” 라는 대승의 이 즉각적인 진리를 밝히고 전하기 위해서이다. 그들은 모두가 무슨 교리나 헌신, 혹은 고행이나 계율 내지 도덕적 규범을 가르치러 온 것이 아니다.
말과 행동, 견해나 개념은 모두 수시로 변하는 마음의 작용들이다. 그것이 업을 짓는 것이다. 선업도 짓고 악업도 짓는다. 모든 움직임이 바로 마음의 움직이다. 그러나 본래 마음은 움직이지 않고, 작용하지도 않는다. 그 작용의 본질은 비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어 있음이란 본래 움직임이 없는 것이다. 비인위적인 그 마음을 깨닫는 것이 진리의 자각이요, 부처가 되는 것이다.
그럼으로 행위를 가지고 진리의 유무(有無)와 가부(可否)를 논하지 말자.
중요한 것은 그대의 마음을 자각하는 일이다. 그대의 본 마음을.
-지은이: 현림.<바람에 실린 꽃향기처럼>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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