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르마(karma: 업) 이야기

2005. 10. 3. 22:33붓다의 향기

LONG 글의 나머지 부분을 쓰시면 됩니다. ARTICLE  

까르마 (karma: 업)
(이글은 업은 있되 업인은 없다는 무아관에 대한 해설입니다.)

 

먼저 이 점을 밝히고 싶군요.

불교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부딛기는 가장 난해한 것이 있다면 첫째는 <공>에 대한 이해요, 둘째는 <까르마>에 대한 이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완벽하게 이해한 사람은 다름 아닌 고타마 싯달타 곧 부처님이십니다. 그럼으로 선지식도 보살도 아닌 중생으로 이 질문에 대하여 말한다는 것은 현문우답이 될 수 있습니다.


각설하고,

크리스챤이나 유일신관을 따르는 사람들의 역사관과 비교해 보면 불교인의 역사관은 전적으로 유동적이며 모든 가능성에 개방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곧 붓다의 가르침에서 기인된, 다른 종교에서 볼 수 없는 가장 독특한 교리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유동성과 모든 가능성에 개방되어 있다는 말을 간단히 표현한다면 <포용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포용력의 원동력을 대변하는 말이 바로 <까르마>에 대한 교설이 됩니다. 까르마란 우리들이 소위 말하는 <업>이라고 말하는 그것입니다. 이 까르마의 교설에서부터 <공>, <보리심> 그리고 화엄경에서 말하는 <법계>의 가르침까지 비롯되고 있는 것입니다.


<까르마>는 말 그대로 행위를 의미하지만, 그것은 또한 비밀스럽게 작용하는 <영향력> 즉 <힘>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한 행위는 늘 어떤 영향력을 낳고, 그 영향력은 그 이상의 행위를 낳기 때문에 까르마는 본질적으로 윤회의 수레바퀴 속으로 밀어 넣는 영향력과 행위 사이에서 얼키고설킨 상호작용의 원리를 지니고 있습니다.


<까르마>를 우주적인 척도에서 표현한다면 이 영향력과 행위라는 혼합체가  세계와 인생을 만들어 내는 엄청난 힘이 됩니다. 이를 중생의 윤리적 측면에서 표현한다면 그것은 자연적 보상과 보답을 분배하고, 도덕적 질서를 낳는 원동력이 되는 끊임없고 비인격적인 법칙이 됩니다. 익히 알고 있는 <삼세윤회>와 <선인선과 악인악과>의 교설이 이를 대변합니다. 다시 말해서 전자는 시간과 공간의 측면에서, 후자는 원인과 결과의 측면에서 고찰된 당연한 귀결에 불과합니다.


<까르마>를 또 형이상학적으로 보면 특정집단의 집합적 행위에 의해 생겨나는 창조적 에너지이며, 그것은 이들 집단이 살고 있는 특정세계의 질서와 작용을 떠받치고 있습니다. 교학에서 말하는 <공업>의 교설이 바로 이것입니다. 공업이란 말은 타의적으로 짓는 업이란 뜻입니다. 그 반대는 불공업이 됩니다. 자의적으로 짓는 업을 말합니다. 


그럼으로 불교교리를 총체적으로 본다면 아비달마에서 화엄에 이르기까지 결국 까르마에 대한 탐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카르마는 인간의 이해를 벗어나는 신비이며 경이롭기짝이 없는 심오한 교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럼으로 앞에서 현문우답이라고 먼저 밝힌 것입니다.


처사님은 천수경의 십악참회에 나오는 이런 말을 기억하시지요.

“죄무자성 종심기 심약멸시 죄역망”.

죄의 자성(본질)은 본래 없어 마음 따라 일어난 것이요, 그 마음이 사라지면 죄업 또한 사라진다는 의미의 말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는 <아함경>을 비롯하여 <중론> 등에서 강조하는 “업(행위)은 있지만 업인(행위자)은 없다.”는 말과 같은 맥락에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연하자면 죄라는 것은 본래 본질이 없는 데 사람들이 사람들의 어리석은 마음으로 이것을 죄라고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죄라는 것이 있게 됩니다. 그럼으로 그 죄라고 생각하는 그 마음을 놓아버리면 죄라는 것은 본래 본질이 없는 것이어서 아침 햇살에 이슬이 녹듯 사라진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요약하자면 무명으로 인하여 일어난 마음은 깨달음으로서 벗어나게 된다는 의미가 됩니다. 중생의 존재를 설명하는 12연기법에서 생노사의 시작이 무명에서 비롯된다는 것도 바로 이를 대변하고 있는 것입니다.(12연기법에 대해서는 용주사 사보 12월호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무명을 깨치면 생노사가 없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바로 12연기법인 것입니다.


다시 까르마의 문제로 넘어가 봅시다.

죄를 짓는 다는 것은 곧 까르마를 짓는 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어떠한 까르마도 그 자성은 없는 것이기에 그 마음을 놓으면 까르마도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을 놓는다는 말은 집착을 놓는다는 의미가 되며, 집착을 놓아버린 마음은 모든 경계로부터 자유롭게 됩니다. 그것이 곧 해탈이요, 자각이 됩니다. 육근과 육경으로 쌓인 육식의 모든 것을 놓는 것, 그것이 바로 자각이요, 해탈이라는 말입니다. 조사님들의 말을 빌리자면 <방하착>이 됩니다. 모든 경계를 놓아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보살님, 무명과 열반이란 말을 익히 알고 있지요? 그런데 그 무명은 시작을 알 수 없지만 그 끝은 알 수 있습니다. 깨달음을 얻으면 무명에서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열반은 그 시작을 알 수 있지만 그 끝은 없습니다. 무명의 끝이 곧 열반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12연기에서 이르듯 무명에서 시작된 중생은 그 시작을 알 수 없습니다. 중생은 업을 짓고, 윤회하면서 또 다른 업을 짓지만 중생도, 중생이 짓은 업도, 그 처음 시작은 알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업과 업인의 문제, 이는 시작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불교는 창조자이신 <신>이란 말 대신에 <무시이래>란 말을 사용합니다. 그 시작을 알 수 없다는 말입니다. 창조자가 있다면 그 시작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시작을 알 수 있으면 모든 것이 논리적으로 쉽게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바이블>의 창세기에서 보듯 중생의 시작은 아담과 이브로 분명해 집니다. 이브에게 무화과 나무열매를 따먹으라고 유혹하는 뱀의 소리와 소돔과 고모라의 이야기처럼 선악의 문제가 분명해 집니다.

 

그러나 창조자가 없으면 그 시작을 알 수 없습니다. 그 시작을 알 수 없기에 논리적으로 그 어떤 해답을 내놓을 수가 없습니다. 중생의 시작도 알 수 없고, 선악을 구분할 수 도 없고, 생과 사를 구분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그 시작을 접어두고 어리석은 중생을 위해 현재에 태어난 인간을 중심으로 막연한 과거와 막연한 미래를 정하여 전개한 것이 <삼세양중인과설>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윤회에 대한 업의 탐구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두 가지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는 12연기법에서 보듯 연기법을 통하여 <나>라는 존재에 대한 집착을 끊는 것이고,

둘째는 무아인 <나>의 삶에 대한 가치를 부여하기 위한 종교적 배려가 깔려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선행을 강조하고, 악행을 멀리하라는 교훈 즉 불교윤리라 할 수 있는 <범행(梵行)>의 이론적 배경이 성립하게 된 이유가 됩니다. 다시 말해서 도덕적 윤리적 측면을 강조함으로서 어리석은 중생들의 탐진치의 삼독을 막기 위한 종교적 의무로서 그 기능을 여기에 깔고 있습니다. 왜 이런 결론을 내리는냐 하면 무명의 그 시작은 알 수 없지만 그 끝은 알 수 있기에 이러한 논리적 배경을 윤리도덕으로 승화시켜 놓은 것입니다. 열반의 시작이 무명의 끝이기 때문입니다. 무명의 끝이란 곧 자각을 의미합니다. 깨달음이란 곧 자각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선행을 통하여 이기심을 버리게 하고, 보시하는 마음을 통하여 탐욕을 없애고, 자비심으로 하여금 생명의 가치 즉 존재의 가치를 느끼게 함으로써 마음의 인식체계를 바꾸는 것 그것이 곧 자각인 것입니다. 좀더 깊이 말하자면 육경과 육근을 통하여 쌓인 바깥경계로 얻은 지식(knowledge)과 시간을 통하여 쌓여진 모든 지혜(wisdom)를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 벗어남이 곧 집착을 벗어나는 것이요, 그 길이 반야(prajna)요, 그 답이 해탈이 됩니다. 그것은 시공간을 벗어나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기에이름을 반야라 한 것입니다. 이것이 곧 자각이 의미하는 것이 됩니다. 


악업이라는 것이 성립하려면 행위와 행위자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탐구가 시작되었습니다. <행위>와 <행위자>의 문제는 곧 인간 존재의 의미를 탐구하는 것입니다. 인간이란 존재를 둘로 쪼개어 본 것이 <명색>이요, 5개로 쪼개어 본 것이 <오음>이 됩니다. 양파의 껍질을 베겨보는 것은 그 씨앗이 무엇인지 찿고자 함이듯이, 인간 존재를 그렇게 쪼깨어 보는 근본 이유는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알고자 함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양파의 씨앗이 없듯이 쪼개고 또 쪼개어 100가지(유식의 5위100법)로 쪼개어 보았지만 그 존재는 드러난 것이 없습니다. 육체는 지수화풍의 4대가 모인 것이니 공한 것이요, 마음이란 오음이 모인 것이라 또한 공한 것입니다. 오온의 주인이 없으니 나그네와 같은 존재가 바로 인간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란 그 존재의 본질을 찾을 수 없기에 그 행위인 악업의 본질도 마찬가지로 찾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악업은 본질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악업이란 것은 단지 인간이 만들어 낸, 사회가 만들어 낸 명목상의 행위규정 내지 규범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선행이란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선행의 본질은 없습니다. 그것도 단지 사회라는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윤리도덕이란 이름으로 그 가치관을 세워 사람들을 그 틀 안으로 묶기 위한 사회적 속임수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을 기억하십시오. 이 말은 궁극적으로 그 본질에 대한 것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다시 말해서 행위와 행위자의 가치관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의 본질적인, 궁극적인 면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악의 본질을 말하는 것임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부언하자면 사회는 인격을 주장하고 있지만 불교의 교리는, 다시 말해서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이 되는 그 자각이란 오로지 인격이 아니라 자각임을 강조한 이유가 여기에 있음을 간과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그 자각이란 것은 바로 까르마에 대한 자각인 것입니다. 다소 뉴앙스는 다르지만 이를 화엄에서 말하는 법계의 원리로 비추어 보아도 같습니다. 다소 의아하게 들리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현실 자체를 정확히 살펴보면 사물의 궁극적 본성을 변화시킬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사물은 이미 그 자체로 완벽합니다. 만유의 그 처음의 순수성을, 그 완벽성을 사람들이 그 사실을 모른다고 해도 타락하지 않고, 그것을 인식한다고 해서 개선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선지식들은 말합니다. 모든 것은 진실이지만 단지 중생들의 마음만이 거짓이라고. 단적으로 말한다면 이는 곧 우리가 변화시킬 수 있고, 변화시켜야 하는 것은 사물에 대한 우리의 잘못된 지식 내지 알음알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악, 미추, 생멸 등 그 모든 것에 대하여 우리들이 잘못된 인식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까르마의 원리를 우리의 인식으로, 중생이란 존재의 가치관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통이 있는 것이고, 고통이 있이 그 고통이 한을 남기고, 한이 윤회를 낳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란 존재에서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로 다시 넘어간 것이 바로 <불성>이란 것에 탐구가 시작된 것입니다. 아함경에서는 말하는 <무아>가 <불성>으로 바꾼 것입니다. 더나아가 이와같은 맥락에서 인간 존재에서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로 그 시야가 넘어간 것이 바로 법계의 원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의 바탕도 까르마의 연장선에 있는 것입니다.


“업은 있지만 업인은 없다.” “행위는 있지만 행위자는 없다” 는 이 말은 곧 까르마의 본질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또한 중생들의 윤회의 본질이기도 합니다. 까르마는 행위일 뿐 행위자는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자살은 있지만 자살한 사람은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행도 마찬가지입니다. 선행은 있지만 선행을 한 자는 없다는 의미가 됩니다. 부처가 8만4천의 법문을 하고서도 한마디도 한적도 없다고한 그 말이 바로 이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반문하게 됩니다. 행위자가 없는 데 어떻게 악업이 있느냐고? <나>라는 존재가 없는데 어떻게 윤회가 성립되느냐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나>라는 존재가 없는데 선행이 무슨 의미가 있으며, 악업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고 선악에 대한 윤리적 도덕적 질문을 반문하게 됩니다. 여기서부터 설명이 난해해 집니다. 왜냐하면 여기에 대한 답은 논리적인 문제, 이해적인 문제가 아니라 자각의 문제로 넘어가기 때문입니다. 논리적이고, 이해적인 문제는 말과 글로써 드러낼 수 있습니다. 경전을  보면 무아와 윤회를 말하면서 이를 밝히지 않는 것은 바로 이유에 기인합니다. 자각의 문제는 분명 언어 밖에 있습니다. 그래서 선지식들은 비유를 들어 설명합니다.

경전에서는 등잔의 비유가 자주 나옵니다. 하나의 등잔에서 수백개 수천개의 등잔으로 불은 이어지지만 그 최초의 둥잔불은 마지막 등잔의 불과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습니다. 불이란 본질이 없기 때문입니다. 본질이 없다는 말은 교학에서는 <자성>이 없다고 표현합니다. 본질을 일러 <자성>이라고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등잔의 불은 자성이 없는 데도 등잔불은 있습니다. 한 등잔에서 수백 개 수 천개로 그 불은 이어져도 그 불의 자성은 없습니다. <나>라는 존재가 여기 저기 많다면 그것은 <나>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나>라는 것은 오직 하나이기 때문에 <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불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 등잔불이 자성을 지니고 있다면 다음 등잔에 점화되어 질 때 처음 등잔불은 꺼져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음 등잔에 불이 옮겨가도 처음 등잔의 불은 그대로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나>라는 존재가 없는 데도 윤회하는 원리가 됩니다. 업은 있되 업인(業人)은 없다는 말이나, 행위는 남고 행위자는 없다는 말은 모두다 같은 의미의 다른 표현인 것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또 다른 비유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등산을 하다가 산 중턱에서 담배를 피우다 미처 끄지 않은 담배공초를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담배공초의 불이 온산을 태우고 마을까지 내려가 마을의 집까지 태워버렸습니다. 그 불로 사람이 타 죽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방화법으로 체포되어 사형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법정에서 말했습니다. “내가 버린 담배공초의 불과 사람을 태운 그 불과는 다릅니다. 그 불은 같은 불이 아닌데 어찌 내가 처벌을 받아야 합니까?”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사회는 그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 의미를 아시겠습니까? 보살님,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그 말을 알고 계시지요. 이는 동일성의 문제가 아니라 연속성의 문제입니다. 다소 난해한 말이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시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업이란, 불교에서 말하는 업이란 자성의 윤회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행은 선과를 낳지 악과를 낳지 않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연속성이란 곧 윤회에 대한 까르마의 그 근본원리를 다른 각도에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업을 무아와 윤회의 차원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오류 때문임을 다시 한번 이 비유를 눈 여겨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업의 상관관계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나>의 위치를 한번 고찰해 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나>라는 존재는 저 하늘의, 저 무한의 우주와 비교하면 너무나도 작은 존재입니다. 무한대에 비교하면 무한소의 극미한 존재가 됩니다. 그러나 <나>의 육체는 수천만개의 세포로 구성되고, 그 세포를 구성하는 또 다른 수천만개의 극미세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생물학자들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의 인체는 7000만개의 세포로 되어 있다고 합니다. 7000만게의 세포란 곧 7000만개의 영혼이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리고 그 극미한 세포보다 더 작은 박테리아들이 그 속에 기생하고 있습니다. 찰나에 번식하는 그 박테리아는 하루 동안에도 수천 억 만개의 박테리아로 증가합니다. 그들의 눈에는 극미한 <나>라는 존자가 무한대의 우주와 같습니다. 큰 것에 비하면 너무나 적고, 작은 것에 비하면 너무나 큰 존재, 그것이 바로 <나>라는 위치입니다. 무한대와 무한소에 자리한 영혼들이 까르마의 힘에 의하여 만들어 진 그것이 지금의 <나>라는 존재입니다. 그 세포, 그 극미세포, 그 박테리아와 연관되어 있고, 이 지구와 우주와 삼천대천세계, 그것들 모두가 까르마의 힘에 의하여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 됩니다. 영혼을 지닌 것들이 까르마의 업력에 의해 상호 작용하며, 움직이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부모와 자식간의 연관관계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수많은 전생에 지은 업력, 그것은 공업이든 불공업이든 간에 연관되어져 있습니다. 불교 인연담에는 그래서 부모를 고생시키고 학대시킨 자식을 일깨우기 위해 그 부모가 죽어서 자기 자식의 자식으로 태어나 다시 고통과 학대를 하는 이야기라든지, 효자인 아들에게 보은하기 위해 그 집의 자식이나 하인 내지 심지어 개로 태어나 그 자식을 돌보아주는 이야기나, 학대받은 백성들을 위해 현명한 재상으로 태어나 나라와 백성들에게 보은하는 등 이런 유의 인연담이 많은 것도 이에 연유합니다. 그러나 그 연유가 어떻든 간에 이 모두가 까르마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보살님,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르는 데 어찌하여 산 정산에서 옹담샘이 솟아나고, 사슴은 풀을 먹는데 왜 사자는 사슴을 잡아먹는지, 벽돌은 쌓은데로 높아지는 데, 왜 검은 안개가 온 산을 덮었는 데도 산은 왜 한치도 높아지지 않았는지 그 의미를 아시겠습니까? 왜 나라마다 말이 다르고, 남자로 태어나고 여자로 태어나는지, 손발은 둘인데 어찌하여 입은 하나 인지 아시겠습니까? 알 수 없는 인연, 그것이 까르마인 것입니다. 나의 까르마, 인간의 까르마, 지구의, 우주의, 저 삼천대천세계에서 불어오는의 까르마의 바람을 어이 알 수 있겠습니까?


보살님, 그런데 분명한 것은 까르마는 행위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절대자가 아닙니다. 인도의 쉬바신도 아니고 브라흐마신도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야훼의 신도 아니고 성경 속에 절대자로 나오는 하느님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중생은 까르마를 행위로 보지 않고 행위자로 인식하고 있기에 고통이 따르는 것입니다. 누가 나를 몰아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생각이 굳어지면 운명이 되고, 그 운명이 쉬바가 되고, 야훼가 되어 우리를 주무르게 되는 것입니다. 봄비, 겨울비는 사람의 인식이지 비는 봄비, 겨울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춥고 덥는 것은 중생의 인식이지 비의 인식이 아닙니다. 까르마가 단지 행위임을 안다면 그것에 메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생과 사, 괴로움과 즐거움도 모두 이 마음으로 이루진 것입니다. 까르마의 업력에 갇히면 까르마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까르마의 주인이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자각이요, 해탈인 것입니다.

  

보살님, 선지식들은 말합니다.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현상이 아니라 현상에 대한 우리들의 집착이다.” 라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집착이란 곧 육체적인 것보다 정신적인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중생들이 겪는 고통이란 깊은 불만족의 상태로서, 육체적인 고통을 뜻할 수도 있겠지만 그 보다는 정신적 체험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분명한 건 하나의 동일한 상황 앞에서 중생들마다 느끼는 방식이 서도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고통은 우리가 소중히 여기고 보호하는 <자아>가 위협을 받거나 그것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을 때 일어납니다. 가장 강렬한 육체적 고통도 우리의 정신 자세에 따라 매우 다른 방식으로 체험될 수 있습니다. <새인연>이 까페의 글에 올린 자식에게 눈을 기증한 어머님의 모성애를 담은 이야기에는 모두에게 깊은 감동을 주지만, 보험금을 노려 남편과 자식을 청부살인한 뉴스의 이야기에는 분노감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익히 알고 있듯이 일상적인 삶의 목적인 권력, 부, 쾌락, 명예 따위는 일시적인 만족을 가져다 줄 수 있으나 결코 지속적인 만족의 원천이 될 수는 없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곧 불만으로 바뀌게 됩니다. 일시적인 만족은 지속적 충만함이나 외적인 상황에 손상되지 않는 내면의 평화를 가져다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는 동안 줄곧 세속적인 목적을 추구하기 때문에 물이 마른 강에 그물을 던지는 어부만큼이나 진정한 행복에 도달할 가능성이 없습니다.


가족이란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속의 욕망이 탐욕으로 이어진 고리라면 가족이란 육체적 고리로 연결되고, 혈연의 고리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긴 시간 동안 쌓인 것이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행복이 긴 만큼 고통도 길고, 사랑이 긴 만큼 미움도 길어집니다. 오랜 시간 동안 함께 지내왔기 때문에 죽음과 같은 그런 헤어짐에 대한 고통도 크고, 부모 자식간에 대한 서로의 바램이 무너지고, 좌절되었을 때 그 고통과 미움도 무엇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느껴집니다. 특히 유교적 <효>사상에 베어있는 우리사회에서 느끼는 그런 감정은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족의 헤어짐은 우리에게 무상한 감을 절실히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희망과 기대가 무너졌을 때보다 더 큰 무상과 허무감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무아>를 말씀하시고, <업>을 말씀하시고, <연기법>을 말씀하셨습니다.이는 곧 <무상>을 체득하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것은 존재한다고 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현상이 일어난다고 해서 그 어느 절대자나 존재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것을 일깨워 주시기 위한 가르침입니다. 그럼으로 우리가 가족관계를 포함하여 모든 것에 대하여 집착을 버린다는 것은 문제를 해결한다는 뜻이 아니라 처음부터 문제가 정말 존재하고 있는지 어떤지를 관찰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점이 불제자와 아닌 자의 근본 차이입니다. 이 말을 되새겨 보시기 바랍니다. 처음부터 스스로 문제를 만들어 놓고 그 문제의 해결책을 찾아가는 그것이 아니라는 이 의미를 되 새겨보시길 바랍니다.

익히 알고 계신 <법구경>에 이런 가르침이 있습니다.


『내 아들이다, 내 재산이다 하여

어리석은 사람들은 괴로워 허덕인다.

나와 나의 것이 이미 없으니

누구의 아들이며, 누구의 재산인가?

어리석은 사람이 어리석다고

스스로 생각하면 이미 어진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이 어질다고 생각하면

진실로 이는 어리석은 바보다.


어리석은 사람은 한 평생이 다하도록

어진 사람을 가까이 섬기어도

숟가락이 국맛을 모르듯이

참다운 진리를 알지 못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잠깐만이라도

어진 사람을 가까이 하면

마치 혀가 국맛을 알 듯이

곧 참된 진리를 바로 알게 된다.』


보살님, 좋은 선지식을 두루 만나 성불하시길 합장드리며,

질의하신 답에 만분의 일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고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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