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변의 단상(斷想) 10 유(有)와 무(無)에 대한 소고

2025. 4. 15. 09:18경전과교리해설

우리가 일상에서 <유(有)>와 <무(無)>라는 말을 많이 사용한다.

有는 <~ 있다>라는 의미이고, 無는 <~ 없다>라는 의미다.

광주리에 사과가 들어 있다면 우리는 사과가 <있다>라고 말한다.

이는 없다는 <無>를 상대하여 <有>을 말한 것이다.

그 반대로 광주리에 사과가 없다면 有를 상대하여서 無라고 한다.

有를 말할 때 언제나 無를 상대하고,

無를 말할 때 언제나 有를 상대해서 말한다.

有는 無를 떠나서 설명할 수가 없다. 無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은 모두 이처럼 상대적이다.

예를 들면 악(惡)을 설명하려면

선(善)을 가지고 설명하지 않으면 악(惡)을 설명할 수 없다.

지옥을 상대하지 않으면 천당을 이야기할 수가 없다.

우리의 인식 구조는

상대적이 아니면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有>의 상대가 아닌 <無>의 본질은 무엇인가?

경(經)을 보면 무아(無我), 무아소(無我所), 무위(無爲),

무작(無作), 무원(無願) 등 無 자가 많이 나온다.

그런데 經에서 말하는 <無> 자는

<有>에 상대한 <無>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無我는 我가 없다는 말이 아니고,

無爲는 행동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러한 無 자에 대해 經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생겨남이 없기에 생각도 여의어서 處所마저도 없으니,

모든 처소까지도 여읜 법은 오직 한 글자뿐이니,

이른바 ()’ 자이다.

 

쉽게 말해서 말길이 끊어져서 말은 해야 하는데

무엇이라고 설명할 수 있는 말이 없어

자 라는 말을 사용한다는 의미다. <금강경>을 보면

여래가 아니기 때문에 이름이 여래다.”라는 말과 같다.

상대를 벗어난 어떤 말로도 여래를 설명할 수 없기에

단지 여래라는 말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이름은 있지만 실체가 없으면 허구(虛構)라 하고,

이름이 없지만 실체가 있으면 존재라 부른다.

 

그렇다면 는 허구인가 존재인가?

<>를 상대하지 않은 <>는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가 말하는 有無의 판단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한계가 있다.

열매를 맺기 전 사과나무에는 사과를 찾을 수 없다. .

그러나 사과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치고,

잎을 내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면

사과라는 열매가 열린다.

이때 우리는 사과나무에 열린 사과를 보고 있다고 한다.

라고 한다.

열리기 전에는 사과가 없었다. .

없던 사과가 시간과 공간이 허용되면 열매를 맺는다.

그러므로 여기서 <>는 없는 것이 아니다.

의 상대가 아닌 .

장미나무에서 사과를 기대할 수 없다. 이처럼

본래 없었다면 <>의 상대로 <>가 되지만,

열매를 맺기 전 이 <>에서 사과가 나왔으니

<>에서 <>가 나온 것이다.

그 사과가 떨어져 썩어서 땅으로 들어가면

다시 뿌리로 흡수된다. <><>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에서 <>가 나오고

<>가 다시 <>로 돌아가니

<>가 곧 <>이고, <>가 곧 <>이다.

반야심경의 말을 빌리자면 空卽是色이다.

非有가 아니라 라는 의미다.

有無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초기 수학자들의 <>에 대한 인식과 같다.

다시 우리가 사용하는 숫자

<1>과 <0> 그리고 <-1>를 한번 보자.

옛적 피타고라스 학파는

우주가 숫자로 이루어졌다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때문에 숫자는 반드시 자연에서 관찰되고,

11로 대응이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세상에

1개의 사과와 2개의 사과는 있어도,

0개의 사과를 본 사람은 세상에 없다.

없음은 그냥 빈 공간일 뿐이지,

그것을 별도로 숫자로 정한다는 것은 숫자가

더 이상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는 그것이 아닌 것,

다시 말해 거짓말이나 상상 물에 불과하게 되는 것으로 여겼다.


이 믿음은 중세에 들어서면서

더 광범위하게 유럽에 퍼지면서 심해졌는데

음수(陰數. , -1)에 대한 거부로까지 번져나갔다.

자연수가 신적인 숫자이고, 실질적인 숫자이기 때문에,

반대로 음수는 非 實在的이고 거짓된 숫자,

다시 말해 상상 물에 불과한 허수 중의 한 종류로 취급한 것이다.

바로 말하면 이는 단지 <><>를 상대적으로 대비시킨 것이다.

(예천 한천사 비로자나불 보물 제667호)

중생이 사는 세계를 유위법(有爲法)이라고 한다.

유위법은 모두 이름을 가지고 있다. 이름은 상대적이다.

이름이 있고 실체가 없으면 허구라 하고

이름이 없고 실체가 있으면 존재라 한다.

버드나무에서 사과가 열린다면 이는 無이면서 허구이지만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열리지 않았다면 이는 無지만 허구가 아니다.

말은 이름은 있으나 실체가 없다.

그래서 일체 유위법은 봄날 아지랑이와 같다고 말하는 것이다.

<0>과 <-1>은 이름(기호)은 있지만 실체가 없는 허수라는 의미다.

지금의 디지털 시대는 2진법인 <1>과 <0>이란 구조 체계다.

둘 다 수의 기호인 것은 동일하다. 둘 다 <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0>은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1>의 경계영역을 밝히고 있다.

<0>과 <1> 사이에는 무한한 수가 존재한다.

그 시작이 없으면 <1>이 성립되지 않는다.

<1>의 진법은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有>의 시작은 <無>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0>은 없다는 <無>가 아니라

<1>의 시작을 말해주는 다른 의미의 <無>인 것이다.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空卽是色”이라는 의미다.

<有>와 <無>는 상대가 아니라는 의미다.

상대가 아니기 때문에 경계가 없는 것이다.

 

예를 하나 더 들어 보자,

사과 하나를 삼등분하면 이를 숫자로는 1/3이 된다.

분수로 표시하면 1/3+1/3+1/3=1이 된다.

그런데 분수를 소수로 환산하면

1/3=0.3333333∞ 으로 무한수가 나온다.

분수로 된 1/3을 3개 합치면 유한수인 <1>이 되지만,

소수로 환산하면 1/3= 0.333333∞은

무한수임으로 무한수 3개를 합쳐도 0.99999∞가 되어

절대로 유한수 <1>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여기서 <1>은 유한이면서 무한을 품고 있고

무한(0.3333∞)은 무한이면서 유한을 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 우리의 현대 수학의 해석학과 미적분학에서도

1/3 x 3 =0.333∞x3 =1, 0.999∞=1로 정의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를 허리 부분을 잘라 내 보면(상대적으로 보면)

그 경계가 다르지만, 처음과 끝을 보면

그 경계가 모호하여 알 수 없다는 것이 된다.

모호하여 그 경계를 구분할 수 없다면 이는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반야심경의 말을 빌리자면

空不異色(공불이색이다.

와 다르지 않다는 의미가 되고.

신심명의 말을 빌리자면

극소동대(極小同大)하여 망절경계(忘絶境界) 하고

극대동소(極大同小)하여 불견변표(不見邊表)하다이다.

지극히 작은 것이 큰 것과 같아서 상대적인 경계가 모두 끊어지고,

지극히 큰 것은 작은 것과 같아서 그 끝을 볼 수 없다는 의미다.

지극히 작은 것은 큰 것이 머무는 경계를 허용하지 않고

지극히 크면 작은 것이 머무는 경계를 허용할 수 없다는 의미다.

달리 말하면 경계가 끊어지고, 끝을 볼 수 없다는 말은

상대를 벗어났다는 의미이며

상대를 벗어났다는 것은 평등을 의미하는 것이다.

<><>의 상대를 벗어나면

의 경계가 사라지니

이고, 가 곧 인 것이다.

우리의 마음 즉 심의식(心意識)

상대적인 인식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의 상대인 를 보는 것이 아니라

의 상대를 떠난 를 보는 것은

심의식을 벗어난다는 말이며 이는

존재의 실상을 본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의 상대가 아닌 <>의 의미인 것이다.

 

(사진: 운무 낀 예천 한천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