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法)도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비법(非法)이야.
2025. 2. 2. 13:04ㆍ경전과교리해설
《반야경》 등을 보면
“법도 오히려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비법(非法)이겠는가?”라는 말이 많이 나온다.
이 말의 참뜻은 무엇일까?
불교에서는 중생이 사는 이 세상을
고통의 바다(苦海)로 보고 차안(此岸)이라고 하며,
그 너머 이상의 세계를 해탈과 열반이라 하여
이를 피안(彼岸)이라 묘사된다.
그러므로 고통의 이 고해의 강물을 건너려고 할 때엔
마땅히 먼저 뗏목을 취해야 하지만
저 언덕에 이르고 나서는 뗏목을 버려야 하는 것과 같다는 것을
〞법도 버려야 하거늘 더구나 비법(非法)〟이겠는가?〟
하는 말로 비유한 것이다.
말하자면 이는 고통의 냇물을 건너고자 하여
자량의 뗏목을 빌렸지만,
모든 과(果)를 뛰어넘어 열반(涅槃)의 언덕에 오르고 나면
즐거움의 원인조차도 오히려 여의어야 하거늘
더구나 괴로움의 원인이겠는가? 하는 의미다.
『상협경(象脅經)』에서는 이를
“만약 생사(生死)의 바다를 벗어나
열반의 경계를 깨달아 얻으려면
애(愛)와 비애(非愛)의 과보와 법(法)과 비법(非法)의 원인을
다 버려야 한다”라고 했다.
부처님이 설한 팔만 사천의 수많은 경전이 있지만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을 요약하면
모두 두 가지 진리에 귀결된다.
하나는 속제(俗諦)이고 다른 하나는 진제(眞諦)이니,
쉽게 말하자면 우리가 말하는 속제(俗諦)는
세간법(世間法)을 말하고
진제(眞諦)는 출세간법(出世間法)을 말한다.
여기서 속(俗)이란 세간이란 말로,
속사(俗事), 또는 속인(俗人)을 가리킨다.
일체 인연으로 생(生)한 사상(事相)을
진리에 대하여 속(俗)이라 하고,
또 속인(俗人)이 아는 것이므로 속(俗)이라 한 것이다.
사상(事相)은 교학에서 본체(本體)인 진여에 대하여
현상계의 갖가지 차별된 모양을 말하며,
제(諦)는 진실한 도리,
즉 세속상(俗事上)의 도리를 속제(俗諦)라 하며,
또는 속인(俗人)이 아는 도리를 속제(俗諦)라 한다.
진제(眞諦)는 곧 출세간법으로
지혜의 인식 영역이 아니며
일체 문자를 벗어난 도리로,
이를 흔히 대승에서는 제일의법(第一義法)이라 말한다.
제일의법(第一義法)이란
본래 생겨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법이라는 생각이 없으며,
생겨나지 않기 때문에 멸(滅)하여 없어질 이치가 없으니
그러므로 법이 아니라는 생각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법(法)이니 법이 아니니(非法) 하는 분별을 여의었기 때문에
아무 생각도 없다는 말이다.
여기에서 생각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다만 생각이 없는 것만을 나타냈고
법이 있는 것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각이 아니라는 의미다.
다시 말해서 식(識)의 영역이 아니라는 의미다.
또한 제일의가 비록 모든 생각을 여의었을지라도
세간의 언어에 따라서 생각이라고 말하는 것이니,
그런 까닭에 대승의 경전에서
수행하는 보살에게 무념(無念)을 말하지만,
이는 보살도 생각이 없다는 것은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법(法)에 <나(我)>라는
성품이 없다는 이치를
깨달아 알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진제(眞諦)의 참 의미에 유념하라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 모든 법은 아무 모습도 없어 집착할 것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으며, 생겨나는 법에는
나라는 것도 없고 얻을 것도 없어서
깨달아 얻을 수도 없고 성취할 것도 없으며
오고 감이 없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 〞법도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비법이랴?〟
이라고 말한 참 의미가 들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대승의 경(經)을 보면
「법은 공(空)한데도 선(善)을 심기를
게을리하지 않음을 사유하는 것이며,
무상(無相)인데도
중생 제도를 그만두지 않음을 사유하는 것이고,
무원(無願)인데도
보리를 구하는 일을 여의지 않음을 사유하는 것이며,
무작(無作)인데도 과보를 받는 몸[受身]을
드러내어 버리지 않음을 사유하는 것이다.」라고 한다.
속제(俗諦)의 도리를 보면 공(空)인데 무슨 선(善)이 있으며,
<나>가 없는데 무슨 중생을 제도하며,
바라는 것이 없는데 무슨 보리를 구하며,
짓는 바가 없는데 무슨 과보가 있겠는가 하는
의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데
어떻게 이런 사유(思惟)를 넘어선 이런 말을 이해해야 하는가.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이는 진제(眞諦)의 참 의미를
알지 못한 어리석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우리가 경에서 보는 내외(內外)와 세간ㆍ
출세간의 일체 법의 모습과 모든 공덕에 대한 설명은
비록 그것이 정법(正法), 선법(善法)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명자상에 기인한 차안(此岸)에서 말하는 속제(俗諦)로
구경(究竟)에는 이를 벗어나야만 한다는 것이다.
진제(眞諦) 즉 제일의 경지에서는
일체 분별을 벗어난 것임을 각인시키기 위한 말임을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 진제(眞諦)에서는 법과 비법,
무명과 보리, 번뇌와 열반, 해탈이라는
그런 일체의 분별이 없다는 것을
「법도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비법이야.」라는
속제(俗諦)의 언어를 빌어서 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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