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뇌 즉 보리다.
2025. 3. 22. 11:46ㆍ경전과교리해설
중생의 번뇌(煩惱)는 병(病)이다. 병은 치유되어야 한다.
중생의 병(病)은 두 가지다.
하나는 사대를 이 몸으로 여기는 신병(身病)이고,
둘은 마음의 번뇌이니 이를 심병(心病)이라고 한다.
심병(心病)의 주된 병은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을 말한다.
중생의 번뇌는 이 두 가지에서 비롯된다.
신병(身病)과 심병(心病)은 어디서 일어나는가?


《대방광협경》은 이렇게 말한다.
「문수사리는 말하였다.
‘선남자여, 그 탐ㆍ진ㆍ치는
어느 곳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입니까?’
등지보살이 대답하였다.
‘문수사리여, 망상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입니다.’
문수사리는 또 물었다.
‘그 망상은 어디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까?’
등지보살이 대답하였다.
‘문수사리여, 뒤바뀐 데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문수사리는 물었다.
‘그 뒤바뀜은 다시 어디에 머무르고 있습니까?’
등지보살이 대답하였다.
‘문수사리여, 바르지 못한 생각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문수사리는 또 물었다.
‘그 바르지 못한 생각은 어디에 머물러 있습니까?’
등지보살이 대답하였다.
‘문수사리여, 아(我)와 아소(我所)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문수사리는 또 물었다.
‘그 아(我)와 아소(我所)는 어디에 머무르고 있습니까?’
대답하였다.
‘문수사리여, 신견(身見)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문수사리는 또 물었다.
‘그 신견은 어디에 머무르고 있습니까?’
대답하였다.
‘문수사리여, 아견(我見)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문수사리는 또 물었다.
‘그 아견은 어디에 머무르고 있습니까?’」
등지보살이 대답하였다.
‘문수사리여, 그 아견이란 머무를 데가 없으니,
머무를 데가 없는 것이 곧 아견의 처소입니다.
무슨 까닭인가 하면, 그 아견이란
시방을 둘러 탐구하여 보아도 이루다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
무슨 처소가 있겠습니까?’」

아견(我見)의 처소가 없다는 말은 무(無)라는 의미다.
실체도 없고 자성(自性)도 없다는 말이다.
분별심의 뿌리를 말하는 것이다.
애초부터 실체가 없는 것이
단지 허망한 인연을 따라 생긴 것이 아견이라는 의미다.

아(我)와 아소(我所)가 머무는 곳은 신견(身見)이다.
이 몸이 뿌리가 된다는 의미다.
신견(身見)이란 현대심리학에서 말하는 에고(ego)다.
에고의 뿌리는 허망한 이 몸을
실체로 여기기 때문에 비롯된 것이다.
승조(僧肇)의 말을 빌리자면
「사대원무주(四大元無主) 오음본래공(五陰本來空)」이다.
뿌리가 없는 에고는 세속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에고는 교육, 사회, 야심, 정치, 도덕,
그리고 그 밖의 모든 것에 의해서 만들어 지기 때문이다.
마치 빈 골짜기에 소리치니 메아리가 일 듯
인연 따라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모두 유위의 법이기 때문에
실체나 자성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중생은 이런 애고는
자신을 특별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고,
자신이 우월함을 드러내기 위해서
다른 사람보다 더 높이 오르려고 하고,
더 많이 가지려고 상대를 끌어내리게 되고
그러기 위해서는 시비(是非), 선악(善惡)의 경계를 만들고
그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되는 것이다.
에고는 언제나 자신을 드러내고자 자신의 우월성이나
특성 또는 개성을 앞세우게 되는
자기 노출적인 속성이 있기 때문에
전도망상과 번뇌를 낳게 되는 것이다.
에고가 아견(我見)이며,
아견이 머무는 것은 신견(身見)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생은
유위법의 세계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유의의 법이란 온 곳을 얻을 수 없는데
무명(無明)의 혼몽(昏懜)한 인식 작용이
망령되게 온 곳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견(我見)의 처소(處所)를 알 수 없다고 한 것이다.

번뇌가 일어나는 것은
마음이 전도망상(顚倒妄想)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經)에서는 비유하기를 일체 세간을 분별하는
그 분별하는 견해란 그림 속의 물질과 같고,
구름 속의 모양과 같고,
눈병 난 이와 꿈속에 있는 사람이 보는 물건과 같고,
골짜기의 메아리와 같고,
더울 때 아지랑이를 물이라 하는 것과 같고,
냇물에 비친 나무 그림자 같고,
못 속에 비친 달과 같은데도 분별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것이 전도된 망상이니 바로 관찰할 수 있으면
모든 세간이 모두 자기의 마음임을 알고,
이렇게 분별하는 견해는 곧 모두 바뀌어 없어진다고 한 것이다.

마음이란 모양과 빛깔이 없어서 붙잡을 수도 없으며,
또한 환(幻)과 같아서 말할 수도 없다.
그러기에 바깥도 아니며, 안도 아니며,
또는 이 두 군데의 중간도 아니다.
마음은 모든 법의 근원이요 선악의 근본이다.
같은 곳에서 나왔으되 다른 이름으로 불리며,
화(禍)와 복(福)이 되기도 하고,
기쁨도 되고 고통도 되고 번뇌도 된다.

그러나 참 나의 마음은 하나의 모습이건만
우러러보는 사람에 따라 그 모습이 달라지고,
바른 가르침[正敎]은 치우침이 없건만
말하고 듣는 이에 따라 그 뜻이 달라지는 것이다.
그것이 중생들이 가지는 분별 망상 때문인 것이다.

유식(唯識)에서는 분별 망상인 식의 근본은
일심(一心)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진여 일심을 의지해서
그 작용인 식(識)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실재하는 자체가 없이 일심이
무명 번뇌로 인하여 식(識)이 되었으며, 그 식(識)은
모든 존재하는 현상 사물로 변화하였을 뿐이다.(起諸現行).
그러므로 눈앞의 세계(境)를 거두어
식(識)으로 귀결시키고, 그 식(識)을 거두어
진여 일심으로 귀납해야 한다(轉識得智)고 경은 말하는 것이다.

일체의 차별상으로 존재하는 모습들은
심(心)의 분별 작용에서 나타난
식(識)의 모습일 뿐이다(萬法唯識),
실재하지 않은 식(識)은 허깨비나 꿈과 같아서
그 자체는 단지 공적한 진여 일심일 뿐이다. (萬法歸一).

이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뿌리가 없는 번뇌 망상의 고통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대승불교에서는
번뇌의 현실을 떠나서 따로 보리가 없다고 말한다.
현실에서 이상을 실천하는 것을
<번뇌즉보리>로 관찰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번뇌=보리>라는 말이 아니라
번뇌하는 그 마음도 깨달은 그 마음은
하나 즉 일심(一心)이라는 것이다.
이는 실상(實相)의 법을 보라는 의미다.

실상의 법을 깨우치면
음욕과 성냄과 어리석은 중생을 떠나서
따로 열반이 있을 수 없고
음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끊을 필요도 없다.
생함과 멸함도 마찬가지다.
실상의 법에 들어가면 언설이 끊어지지만
분별 망상의 유위의 세계(俗)로 나오면
마음이 일어나 언설이 있게 되는 것이다.
번뇌란 무명(無明)의 전도망상의 분별심에서 일어날 뿐
따로 어떤 특정한 처소가 없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마치 꿈속의 경계와 같아서 온다 해도 온 곳이 없는데
꿈속의 마음을 가지고 부질없이 온 곳에 집착하지 말라는 의미다.
실상의 법에 들어가면
일체 전도망상과 분별의 경계가 없어지고 하나가 된다.
한 마음에 두 마음이 있으면 갈등이 생기지만
한 마음이면 자타가 평등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에 이르기를
「몸이 無常함을 말하지만
몸을 염리(厭離)하라고 말하지 말아야 하며,
몸에 괴로움이 있음을 말하지만,
열반을 좋아하라고 말하지 말아야 하며
몸은 나라고 할 것이 없지만
중생을 교도하기 위해 말하며,
몸이 공적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필경에 적멸이라고 말하지 말아야 하며
전에 지었던 죄를 참회라고 말하지만
그러나 과거에 들어가라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
라고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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