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천지수(盜泉之水)와 사무애지(四無礙智)

2025. 4. 8. 14:51경전과교리해설

 

이름만 있고 실체가 없으면 허구(虛構)이고,

이름은 없고 실체만 있으면 존재라 한다.

고전(古典)에 보면 “도천지수(盜泉之水)”라는 말이 있다.

아무리 목이 말라도 도둑 도(盜)字가 들어있는

이름의 샘물은 마시지 않는다는 의미인데,

속뜻은 아무리 형편이 어렵더라도

결코 부정한 짓은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渴不飮盜泉水(갈불음도천수)라는 말이 줄여진 것이다.

도천(盜泉)은 지금도 山東省(산둥성) 泗水(사수) 현에 있는데

<설원(說苑)>이란 책에도 이런 얘기가 있다.

「공자가 어느 날 목이 몹시 말랐으나

그 샘물을 떠먹지 않았고

또 勝母(승모)라는 마을에는

날이 저물어 도착했지만 머물지 않고 곧장 떠났다.」

승모(勝母)란 자식이 어머니를 이긴다는 뜻이므로

그런 이름이 붙은 마을에서는

하룻밤도 자고 싶지 않았다는 거다.

“불효(不孝)”를 경계하는 암시의 말이다.

 

또 진(晋)나라 吳隱之(오은지)가 지은

貪泉(탐천)이라는 시에 나오는 '탐천'은

廣州(광주)에 있는데 그 샘물도 뜻있는 사람들이 마시면

욕심쟁이가 된다고 안 마신다고 한다.

<자료 출처: 위키백과>

공자는 샘의 이름이 “도천(盜泉)“

즉 도둑의 셈이라 불리기 때문에

그 샘물을 마시지 않았다면

그 샘물을 성천(聖泉:성인의 샘)이라 이름을

고쳐 놓으면 마신다는 것인가?

샘은 도천이든 성천이든 그저 샘일 뿐이다.

이름이 지어지기 전에도,

이름이 지어진 후에도 샘은 그저 샘일 뿐이다.

물맛이 이름에 따라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선악(善惡)이라는 것도 그렇다.

이름에 좌우되는 것도 아니다.

또한 불효자가 있는 마을을 이름을 바뀐다고 해서

그 마을 자체가 효자 마을이 되지 않는다.

여우를 양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여우가 달라지는 것이 아니고,

장미를 개나리, 할미꽃 등 무슨 이름으로 불러도

장미는 그냥 장미일 뿐이다.

이름은 그저 허구에 지나지 않은 말일 뿐이다.

사람들이 하는 말은 실체가 없는 허구이지만

사람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말과 글은 필요하다.

강연을 하던, 법을 설하던, 대화를 하던

말과 글로써 하는 그것은 단지 상대와 의사소통을 위한

도구에 불과한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명자(名字)“는 말과 글을 의미하는데

말이란 아무리 잘 한다고 해도 그 의미는

다음 4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대방광사자후경》을 보면 말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선남자야, 중생들이 가지고 있는 음성과 언어는

전부 사무애지(四無礙智)*에 들어가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하느니라.

따라서 언설(言說)이라는 것은 법무애지(法無礙智)에 해당하며,

언설 아닌 것은 의무애지(義無礙智)에 해당하고,

언설로써 분별하고 나누는 것은 사무애지(辭無礙智)에 해당하며,

현상적인 일로 더불어 상응하여 전혀 막힘이 없게 하는 것은

선설무애지(善說無礙智)에 해당하는 것이니라.

중생들이 가지고 있는 언설은

전부 이 네 가지 법구(法句)에 포함되지만,

진실한 의구(義句)

본래 부동(不動)한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하느니라.

비유하면 마치 태어날 때부터 소경인 자가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짐작은 하지만,

진실로 보는 것은 아닌 것과 같으니라.

이런 까닭에 선남자야,

법을 구하려는 자는 자신에게서 구해야 하고,

보리(菩提)를 구하려고 하는 자는

5()에서 구해야 하느니라.”

*사무애지(四無礙智)란

사무애변(四無礙辯), 사무애해(四無礙解)라고 한다.

마음(心)의 방면으로 보면 지(智), 해(解)가 되고,

입(口)의 방면으로 보면 변(辯)이 된다.

 

불교에서는 일체 세간은 모두 허망하고

분별 망상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우리가 말하는 세상 곧 세간이란

다만 명자(名字)만 있을 뿐 볼 수 있는 실물이 없으므로

세간행(世間行)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실체는 없고 이름만 있어

허망하고 망상이라고 하는 것이다.

노자도 <도덕경> 첫 장에서

“도가도(道可道) 비상도(非常道)”라고 했다.

표현은 달라도 같은 의미다.

우리 마음이라는 것은 실체가 없는

허구적인 것에 무엇이라 이름을 붙여놓고,

그 이름에 실체가 있는 듯 분별 망상에 살아가는 것이다.

위에서 보리(菩提)를 구하려고 하는 자는

5()에서 구해야 하느니라.” 라는 말은

“마음이 나면 허망이요(心生卽妄)

마음이 나지 않으면 부처다(不生卽佛).”라는 의미다.

마음이 곧 <나>이고, 오온(五蘊)이 곧 <나>이기 때문이다.

오온에서 명자와 말이 만들어 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과 글 곧 명자상을 떠나야

그 진실 곧 실체를 안다고 한 것이다.

이는 선가(禪家)에서 “달을 보지 않고

왜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느냐?”라고 하는 말과 같은 것이다.

경전이라는 것도 결국 말에 불과한 것이다.

말과 글을 벗어나지 않고는 진실을 알 수 없다는 말이다.

삼라만상의 모든 것 곧 일체 법은

있는 바가 없고 다만 문자와 말만 있는 것이다.

모든 법의 실체는 이것도 없고 저것도 없어

모두 있는 바가 없는 것이다.

이것과 저것이 있는 바가 없기에

경전은 진여(眞如)라늘 말로 표현했다.

만일 진여라면 곧 진실이요,

만일 진실이라면 곧 보리이니,

그러므로 마음이 나지 않으면 부처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진여라는 말에 매달려서는 안된다.

이것도 말이기 때문이다.

비빔밥의 참맛은 왼손으로 비비느냐,

오른손으로 비비느냐에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위에서 진실한 의구(義句)

본래 부동(不動)한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하느니라.”하는 말은

이를 의미하는 것이다.

사무애지(四無礙智)는 왼손, 오른손에 불과하다.

명자상 또한 도구에 불과하다.

바람이 부니 나무가 흔들린다.

그 흔들림은 나무가 흔든 것인가?

바람이 흔든 것인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했던가?

그대가 그 경계 안에 갇혀 있기에

바람이 있고, 나무가 있고 흔들림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름이 바로 식(識)이기 때문이다.

명자상이 바로 식(識)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