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길(31) 시위소찬(尸位素餐) 과 팔난처(八難處)

2025. 4. 11. 20:11삶 속의 이야기들

우리 사회의 혼란과 갈등을 잠재우는

중요한 저울대의 하나가

바로 법(法)이라는 잣대이다. 그러나

그 법이 법으로서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면

법은 무용지물이 되고

사회는 혼란과 갈등이 더 심화하는 것이다.

 

법이란 글자의 옛 고자(古字)를 보면

『수(氵) + 치(廌)+ 거(去)』 의 조합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방 “'법' 자의 자원을 통해 본 불법의 의미” 참조).

그 의미로만 풀이하면 법이란 평등과 정의를 실현하는 힘,

그리고 이를 분별하는 지혜를 상징하지만,

간결함과 편리함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어느 날 지혜를 상징하는 치(廌)를 생략해 버렸다.

그 결과 오늘날 법은 평등을 앞세우지만, 불평등이 되고,

정의의 힘을 행사한다고 하지만

힘 있는 자의 입김에 따라 왜곡할 수도 있는 빌미가 되었다.

그래서 「유권(有權) 무죄(無罪)요, 무권(無權) 유죄(有罪)」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우리 사회는 갈등과 혼란에 빠지게 된 것이다.

영국 속담에 「법이 있어 빠져나간다.」란 말이 있다.

잘못을 저질러도 법에 규정된 바가 없다면

죄가 되지 않는다는 의미다.

여기에 한발 더 나아가 요즘은

“위법하지만 처벌할 정도는 아니다.”라는

묘한 법리(法理)까지 회자하고 있다.

이는 법이 제정된 근본 취지를 보지 못하고

규정된 법의 글자만 보기 때문이다.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한 것이다.

근본을 보지 못하고 방편만 찾는 것이다.

거짓된 진실이 때로는 참된 진실보다 아름다울 수 있지만

거짓은 언제가 드러나기 마련이다.

이는 전체를 보는 지혜가 빠졌기 때문이다.

@법이란 삶의 행위를 단적으로 규정해 놓은

명자(名字)에 불과하다.

삶이 전체라면 법이란 삶의 한 부분인 것이다.

그러므로 부분이 법이 전체인 삶을 능가할 수 없는 것이다.

부분의 합이 전체를 능가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삶의 가치적인 측면에서 보면

지혜가 더욱더 절실한 이유다.

이른 봄 들녘에 아름다운 매화가 피었다.

그 아름다움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꽃잎, 꽃술, 가지와 뿌리 그 어느 것을 찾아보아도

아름다움을 찾을 수 없다.

매화의 아름다움은 전체에서 나오는 것이지

부분의 합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더 큰 의미를 지닌 것이다.

지혜가 없으면 전체를 보지 못하고 부분만 보게 된다.

법은 만인의 평등을 추구한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그 평등에 근거하여

다수결의 원칙인 선거라는 제도를 선택했다.

그 선거에 당선되면 그 직위에 따른 힘을 얻는다.

그 평등에는 힘이 수반된다.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그 속을 보면

직위가 아니라 그 직위가 수반한 힘이다.

그 힘이 생기면 하고 싶은 것, 누리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기회가 열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등은 지혜의 유무를 가리지 않는다.

유능한가 무능한가를 가리지 않는다.

죄가 있느냐 없는 나를 가리지 않는다.

 

그래서 무능한 자들이 그 힘을 얻기 위해

권력자의 비위를 맞추고 아첨하게 되고,

거짓과 위선적인 행동을 마다하지 않는다.

선거 때만 되면 줄을 잘 서려고 안달하는 것도 그렇다.

줄만 잘 서면 선거가 끝나 논공행상이 따르기 때문이다.

위정자들은 남의 것은 시시콜콜 따지지만

자기를 지지한 자들의 논공행상에 대해서는

기여도만 따질 뿐 다른 것은 문제 삼지도 않는다.

설령 선거 전에 어떤 범죄 혐의가 있다고 해도

선거 후에는 성인군자로 탈바꿈되어

입신출세하는 기현상(奇現象)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

권력의 지위에 오르지 못했을 때는

몸을 다스리고 행동을 다스리고 성실한 척하지만

지위를 얻고 나면 언제 그런 그것이 있었냐는 듯

무사안일(無事安逸)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벼슬아치들의 속성이다.

고전(古典)에 “시위소찬(尸位素餐)”이란 말이 있다.

‘시위(尸位)’의 시(尸)는 시동(尸童)을 말한다.

옛날 중국에서는 조상의 제사를 지낼 때

같은 핏줄의 어린아이를 조상의 신위에 앉혀 놓고

제사를 지냈는데, 이 아이를 시동이라 한다.

시동은 제사상에 차려진 음식을 마음대로 먹으며

배를 불릴 수 있었는데,

조상의 영혼이 어린아이에게 접신하여

그 아이를 통해 먹고 마신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시위’는 그 시동이 앉아 있는 자리를 말한다.

‘소찬(素餐)’은 공짜 밥을 의미하는 말이다.

이 ‘시위소찬’에 대해 왕충(王充)은

《논형(論衡) 〈양지(量知)〉》에서

다음과 같이 정의를 내렸다.

「벼슬아치가 가슴이 텅 비어 있는 것을 일러 ‘시위소찬’이라 한다.

‘소(素)’는 ‘공(空)’이다. 헛되어 덕도 없이 있으면서

녹봉이나 축내고 있으니 ‘소찬(素餐)’이라 한다.

도예(道藝)에 대한 능력도 없고,

정치에 참여하지 않으면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조정에 머물며 일에 대한 말 한마디 못 하니

시동과 다를 바 없다. 그 때문에 ‘시위(尸位)’라고 한다.」

벼슬아치가 하는 일 없이 자리만 차지하고

국록을 받아먹는 것, 자기 능력이나

분수에 맞지 않는 높은 자리에 앉아서

하는 일 없이 놀고먹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이런 사례는 멀리 찾을 것도 없다.

우리나라 공무원이나 국회의원들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막대한 국민 혈세를 받아먹으면서도

“시위소찬”하는 자들이 어디 한두 명인가?

불행히도 현행의 법으로서는

이런 무리는 처리할 방법이 없다.

옛같이 상방보검(尙方寶劍)이라도 하사받았다면

단칼에 처단할 수 있을 텐데

민주주의라는 미명 아래에서는

그런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미사여구에 금언(金言)과 문구로 법을 만들지만

그 법은 그들에게는 무용지물이다.

불체포특권이란 상방보검(尙方寶劍)을

그들이 쥐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회를 움직일 만한 위치에 있는 자들도 마찬가지다.

법망을 피해 가는 정교한 또 다른 상방보검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법은 있어도 두려워하지 않고

법 위에서 무소불위하며

시위소찬하더라도 탓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부처님도 일생 동안 성도 후 40여 년 동안 법륜(法輪)을 굴렸지만

8곳에 처한 무리에게는 어쩔 수 없다고 했다.

그것을 경에서는 “팔난처(八難處)”라 한다.

팔난처(八難處)란 중생을 제도하는데도

여덟 가지의 어려움에 부닥치면

어쩔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팔난처(八難處)란 지옥과 아귀, 축생 등

삼악도에서는 부처님의 법을 듣기가 어렵고,

북구로주의 장수천(長壽天) 등은 복이 많고

오래 살기에 부처님의 법을 들으려 하지 아니하며,

사람으로 태어나더라도 세지변총(世智辨聰)들은

재주와 잘난 것을 믿고 부처님 법을 들으려 하지 아니하며,

청각장애인과 시각장애인, 언어장애인은

부처님의 법을 듣고 싶어도

불구이기 때문에 듣지 못하고

부처님의 앞 세상이나 뒷세상에 나는 자는

부처님을 뵈옵고 법을 듣지 못하니

이를 합쳐서 8가지 어려움이라 하여

팔난처(八難處)라고 한 것이다.

천상의 가릉빈가의 소리가 아무리 아름다워도

귀를 열지 않으면 들을 수 없고,

삼천 년에 한 번 핀다는 성스러운 우담발라도

눈을 감으면 볼 수 없는 것이다.

경주 굴불사지에 핀 우담바라

우리의 마음이 모든 법의 근원이요

행복과 불행의 근본이 된다.

마음이 무엇인지 눈을 뜨자.

눈앞의 부귀영화는

봄날 아지랑이를 같고.

세상 사람들은 소리는

빈 계곡에 울리는 메아리 같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