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성원융(法性圓融) 무이상(無二相)이라

2025. 1. 24. 15:02법성게

 

만유(萬有)의 본성인 법성(法性)은

두루 원만(圓滿)하고 서로 어우러져(融和)

두 가지 모습이 없다는 이 말은

평이한 말 같으나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이해하기가 어려운 말이다.

법성의 이명(異名)이 제법실상, 진여(眞如),

열반(涅槃), 불성(佛性), 법계(法界)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 것으로만 보더라도

그 변화가 얼마나 무궁무진한가를 알 수 있다.

그만큼 이해하기가 난해한 말이란 것이다.

 

법성(法性)의 법(法)은 실재(物, 事)를 의미하며

성(性)은 체(體)를 의미한다.

체(體)란 곧 불개(不改), 부동(不動),

공적(空寂)함을 의미한다.

중생의 본래 마음을 본심(本心)이라 하고

이는 곧 부처님의 본래 마음과 같아서

불심(佛心), 보리심, 불성(佛性)이라고 부르듯

사물의 본성을 법성(法性)이라고 명한 것이다.

 

법성이 원융(圓融)하다는 것은

만약 분별 망집의 견에 따라서 말하면

천차만별의 제법(諸法)이 모두 사사물물(事事物物)에

차별적 현상(現象)이 인정되고,

제법이 본래 갖추어진 이성(理性)에 따라서 말한다면

사리(事理)의 제법이 두루 원통(圓通) 무애(無碍)하여

둘도 없고 다름도 없어서 마치 물과 얼음과의 관계와 같다.

그 형상은 달라도 본질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법성이 원융하다고 한 것이다.

 

원융(圓融)이란 말은 교학에서 말하는

불이문(不二門)의 교리와 같은 것이다.

사람들은 모든 것을 상대적으로 보아서

생(生)과 사(死) 또는 옳은 것과 그른 것,

착한 것과 악한 것, 아름다운 것과 더러운 것,

긴 것과 짧은 것 등등 반드시 둘로 차별하여

취하고 버리는 마음이 있으므로

번뇌와 호(好), 불호(不好)의 갈등이 생기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들은 둘이 다른 듯하지만

다른 것이 아니요, 둘이면서 둘이 아니다.

만법이 서로 들어가서 하나가 되지마는

그러나 둘을 떠나서 따로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그러므로 대승경(大乘經)에서는

「번뇌(煩惱)가 곧 보리(菩提)요,

생사(生死)가 곧 열반(涅槃)이며

중생(衆生)이 곧 본각(本覺)이요,

사바(娑婆)가 곧 적광(寂光)이다.」라고 말하는 것도

이러한 이체(理體)에 근거한 것이다.

 

일례로 우리 마음을 유리구슬이라 상상해 보자

유리(琉璃)구슬이 청정하여 때가 없으면

푸른 물질을 만나면 푸른 구슬로 보이고,

붉은 색깔의 물질을 만나면 구슬은 붉게 보인다.

그러나 붉게 보이는 구슬이나

푸르게 보이는 구슬은 둘이 아니다.

그렇다고 붉은 것과 푸른 것이 같은 것도 아니다.

현상으로 드러난 것이 차별이 있다고 해서

그 본체를 보면 다르지 않지만

드러나 현상으로 보면 같은 것도 아니다.

 

중생들이 사는 세계를 사바세계(娑婆世界)라 한다.

사바세계를 흔히 환(幻)의 세계라 한다.

그런데 이 사바세계가 어찌 열반의 세계라 말하며,

번뇌가 어찌 보리라고 말하며

생사가 곧 열반이라고 하는가?

가령 빛과 어둠을 보자.

어둠과 빛은 공존(共存)하지 않는다.

아니 공존(共存)할 수가 없다.

빛이 들어오면 어둠은 자연히 사라진다.

그러나 어둠이 사라지는 곳은 없고,

어둠이 모여 있는 곳도 없다.

만약 빛이 사라지면 그 어둠은 다시 들어온다.

어디서 온 곳이 없고, 공존하는 것도 아니다.

완전히 상대적이라면 둘은 떨어져 있어야 한다.

그러나 상대적이지만 떨어져 있는 상대도 아니고

그렇다고 둘이 공존(共存)하는 것도 아니다.

번뇌가 어둠(無明)이라면 보리(菩提)는 빛(明)이다.

번뇌와 보리(菩提)의 관계도 그러하다.

보리란 깨달음의 지혜 곧 도(道)를 말한다.

 

<문수사리보초삼매경>에 의하면 이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도(道)의 지혜가 일어나면, 번뇌는 바로 사라져 버리니,

그 번뇌가 모여 있는 곳을 알지 못합니다.

장소도 없고, 방향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도와 번뇌는 함께 합하지 않습니다.

또 번뇌와 평등하면 바로 도(道)라고 이름합니다.

도에서는 번뇌도 평등하니,

번뇌와 도는 평등하여 차별이 없고,

일체의 모든 법도 평등합니다.

만일 이러한 이치로 분별한다면 번뇌는 바로 도입니다.

왜냐하면 번뇌를 근거로 도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번뇌는 형상도 없고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번뇌를 찾는 것이 바로 도가 됩니다.」라고 했다.

번뇌도 그 실체는 공(空)이고,

도(道) 또한 실체가 없는 공(空)이다.

둘이 공하다는 것은 차별이 없다는 것이다.

평등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번뇌가 곧 도(道)라는 의미다.

 

우리가 익히 들어왔던 선가(禪家)의 화두에

「만법귀일(萬法歸一) 일귀하처(一歸何處)」란 말이 있다.

만들어진 것이나, 태어난 것은 사라지기 마련이다.

현상은 사라졌지만, 그 본성은 어디로 가는가? 하는 질문이다.

 

<문수사리보초삼매경>을 보면 이렇게 말한다.

「변적보살이 연수보살에게 물었다.

“일체의 온갖 법은 어디로 향하여 갑니까?”

又問:“軟首!一切諸法爲何所趣?”

연수보살이 답했다.

“향하여 가는 곳은 자연 그대로 진실합니다.”

答曰:“所趣自然。”」

 

자연 그대로 진실하다는 말은

일체의 온갖 법은 자연 그대로 청정하다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진실한 법을 말할 때 그 진실한 법이란

일체의 법이

다 존재의 대상이 아님을 아는 경지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일체 온갖 법은 다 지을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체의 모든 법은 지을 대상이 없으므로,

자연 그대로 환영(幻影)과 같이 모양도 없고 둘의 차별도 없다.

<법성게>에서 말한

「법성원융(法性圓融) 무이상(無二相)

제법부동(諸法不動) 본래적(本來的)」이다.

일체의 모든 법은 온갖 즐거움을 벗어났고,

일체의 모든 법은 볼 수 없으며,

일체 온갖 법은 눈의 한계[眼句]를 초월했다.

다시 말해 모든 법은 평등하여 차별이 없고,

모든 법은 어리석고 어두워서 가는 길이 없다.

행위도 없고 사람도 없으며, 사람의 말과 가르침도 없고

처소(處所)도 없다. 말과 가르침이 없으니

생기는 일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경은 이어서

「“만일 도를 구한다면, 모든 법이 ‘영원하다’

‘영원하지 않다’는 견해가 없어야 하고,

얻을 대상도 없어야 합니다.

또 모든 법이 ‘청정하다’ ‘청정하지 않다’라든지,

‘공(空)하다’ 공(空)하지 않다‘라든지,

’나가 있다‘ 나가 없다’라든지,

‘괴롭다’ ‘즐겁다’ 하는 따위를 헤아리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법에는 얻을 대상이 없으니,

온갖 법이 생사(生死)에 있다거나,

혹은 열반[滅度]에 있다고 보지 않아야 합니다.

이와 같이 행한다면 도(道)를 향하여 나아갈 수 있습니다.”」

라고 했다.(문수사리문경)

 

또 번뇌가 열반이란 말을 공(空)의 입장에서

그 의미를 한번 생각해 보자.

모든 법이 다 공(空)하다면 사라질 것이 없다.

사라지지 않는 것이라면 곧 나지 않는 것이고,

없어지지 않는 것이라면 곧 사라지지 않는 것이고,

항상 하지 않는 것이라면 곧 나지 않는 것이다.

번뇌가 공(空)이라면 번뇌를 끊을 것이 없으므로

사라지지 않고, 번뇌의 자리가 없으므로 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번뇌가 공하면

열반도 공하여 둘이 다 평등한 것이다.

차별이 없는 것이다.

번뇌가 공하다면

번뇌를 끊을 것이 없으므로 도달하는 곳이 없다.

도달함이란 얻는다는 뜻이다.

도달함이 없으므로 얻을 것도 없으니,

괴로움도 즐거움도 없는 것이다.

열반이 공하다는 것은 열반이 아주 없어지거나

없어지지 않음도 없고,

항상 있거나 항상 있지 않음도 없기 때문이다.

번뇌 또한 그러하다.

그러므로 번뇌가 열반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일체중생이 대승의 교리에서 말하는

공(空), 무상(無相), 무원(無願)인 법 가운데에서

탐욕․성냄․어리석음을 일으키지만,

일체중생이 탐욕, 성냄, 어리석음을 일으키는 곳이

곧 여래의 머무르는 바 평등한 법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중생에게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 있느냐?

하는 질문이 있을 수 있다.

<문수사리부사의경>에 이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문수사리보살은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공(空)을 말로써 말하기 때문에 있으며,

탐욕, 성냄, ․어리석음도 말함으로써 있나니

부처님께서 비구에게 말씀하시되,

‘생김 없고[無生] 일어남 없고[無起] 짓는 것 없고[無作]

함이 없는 것[無爲]이 있으므로

이는 모든 행의 법이 아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생김 없고 일어남 없고, 짓는 것 없고,

함이 없는 것은 모든 행의 법은 아니나

있지 않은 것은 아니니,

만일 있지 않은 것이라면 곧 생김과 일어남과

짓는 것과 하는 모든 행의 법에서 벗어난다고 할 수 없을 것인데,

있기 때문에 벗어난다고 말할 뿐입니다.

이와 같아서 만일 공(空)이 없다면,

곧 탐욕, 성냄, 어리석음에서 벗어남이 있지 않으려면,

공이 있기 때문에

탐욕 등의 모든 번뇌를 벗어난다고 말합니다.”」라고 했다.

 

다시 말해 일체 법은 있는 바가 없고

다만 명자(名字)와 말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모든 법은 이것도 없고 저것도 없으니

모두 있는 바가 없다는 것인데,

이것과 저것이 있는 바가 없는 것이라면

이는 진여(眞如)를 말하는 것이다.

만일 이것이 진여라면 곧 진실이요,

만일 진실이라면 곧 보리(菩提)라는 것이라는 의미다.

그러므로 법성원융이란 곧 보리로 가는 길,

구경의 깨달음의 경지에서 행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깨달음에 이르는 길은 분별심을 놓아 버리는 것이다.

강물 위에는 왜가리도 놀고, 오리도 놀고 있다.

왜가리는 다리가 길고, 오리는 다리가 짧다.

그러나 왜가리는 오리를 탓하지 않고,

오리는 왜가리를 탓하지 않는다.

길고 짧은 것을 구별하는 것은

사람들의 분별심이지 왜가리와 오리는 무심하다.

강물 또한 그 둘을 구별하지 않는다.

현상을 현상 그대로 보고 인정하면 본성을 알게 된다.

 

세상은 선한 사람도 있고, 악한 사람도 있다.

악인(惡人)을 비난하는 것도,

선인(善人)을 칭찬하는 것도

편협된 분별심에 기인한 것이다.

선도 악도 그 실체는 없다.

실체가 없으니, 공(空)이고, 공이면 평등한 것이다.

그러므로 평등한 마음으로 보는 것이 원융의 참 의미가 된다.

선(善)에 기울지 않고, 악(惡)에도 기울지 않는 것은

중도(中道)를 의미한다.

중도의 마음이란 이(理)에도

사(事)에도 치우치지 않는 마음이다.

왜냐하면 선인이나 악인이나 그 본성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깊이 들어가 보면

선악 시비, 보리 열반 모두 명자상에 불과하다.

실체가 없는 공(空)이다.

없는 것에 집착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도의 길이나 삶의 길이나 현상은 현상대로 인정하되

편협된, 집착된 마음을 버리고

그 실체를 바로 보면 그것이 바로 정도라는 것이

원융이란 말이 주는 교훈이다.

그것이 무엇이겠는가?

이는 곧 명자(名字)에 의거한 것이 아니라

깨달음에서 나오는 보리행(菩提行)이라는 것이다.

무작(無作)이요, 무원(無願)이요,

무위(無爲)의 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