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乙巳)년 새해에 부치는 글

2025. 1. 11. 12:50삶 속의 이야기들

 

바위처럼 앉아 있어도 세월은 가고,

달팽이처럼 기어가도 세월은 간다.

무심한 세월,

그 머물지 않은 세월의 한 해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어제와 오늘이 다를 바 없지만

사람의 마음은 무언가 분별 짓지 않으면

좀이 쑤시는지 모든 것을 분별하여만 직성이 풀립니다.

세월은 오는 것도 아니고, 가는 것도 아니지만

사람들은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을 구별하고

낮과 밤을 구별해 놓았습니다.

아마도 지닌 아픔과 고통스러운 것은 잊어버리고,

어제보다는 오늘이, 내일은 오늘보다 낫기를 바라는

중생의 그 바램 때문일 것입니다.

(사량도)

올해는 을사(乙巳)년의 해라고 합니다. 역(易)으로 따져

을사(乙巳)는 푸른 뱀을 의미합니다.

갑(甲)과 을(乙)은 역에서 봄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봄은 푸른 새싹이 돋아나는 계절이므로

푸른 뱀(靑蛇)의 해라고 한 모양입니다.

뱀에 대한 이미지는 동서양을 불문하고

그리 호감이 가는 동물은 아닙니다.

창조와 변화 그리고 지식을 상징하는 것으로

묘사되기도 하지만 아무리 미사여구를 동원해도

구약에서 이브를 유혹한 동물로 비유되듯

날름거리는 뱀의 혀를 보면

그리 호감이 가지 않는 동물임은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분별하는 마음은 뱀 같은 마음입니다.

선가(禪家)에서는 그래서 불성을 깨닫는

최대의 장애를 다문박식(多聞博識)

이라고 한 것도 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뱀은 지식을 상징하는 동물이라고 합니다.

<대지도론>에 보면

사리자의 전생 이야기에 뱀 이야기가 있습니다.

불타의 십대제자 중 지혜 제일인자로 불리는

사리자는 전생에 뱀으로 태어난 적이 있습니다.

경전에 따르면 아주 오랜 옛날 옛적에

어떤 임금이 숲으로 사냥을 나갔다가 뱀에게 물렸습니다.

뱀의 독을 치료하고자 귀한 약재는 물론

나라 안에서 용하다는 의원 모두 불러 치료했지만

뱀의 독이 너무 강하여 소용이 없었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임종을 기다리고 있는데

그 나라의 한 주술사가 임금에게

〞이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유일한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그 방법은 이 뱀의 독은 무서운 독이라

임금을 물은 그 뱀을 잡아서

그 뱀이 자신이 뱉은 독을 빨아드리게 하면 됩니다.〟

라고 조언했습니다. 임금은 반신반의 하면서도

다른 방도가 없어 전국의 땅꾼을 모아서

그 뱀을 잡도록 명을 내렸다.

땅꾼들의 노력으로 그 뱀을 잡아 오자

궁전 앞뜰에 장작불을 피우고

주술사가 뱀에게 네가 뱉은 독을 다시 빨아드리지 않으면

이 장작불에 태워죽이겠다고 엄포를 놓습니다.

그러자 뱀이 주술사에게 말합니다.

〞내가 뱉은 독을 내가 다시 빨아드리니

차라리 저 불 속으로 뛰어 들어가겠노라.〟하고

불 속을 뛰어들었다고 합니다.

우화에 나온 이 뱀은 자기 말에 책임을 지고

행동으로 신의(信義)를 표출해 낸 것입니다.

 

지식이란 가부(可否)를 떠나서 사람이 살아가는데

희망과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이 가지 않는 지식이란 궤변이요,

허망한 미사여구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지식이란 신의(信義)가 근본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는

신의(信義)라는 말이 있는지 회의가 듭니다.

앞에서는 이 말을 하고 돌아서서는 뻔뻔하게

바로 뒤집어 버리는 사람들,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버리는 기회주의자들에게는

자기가 한 말에 책임을 지고

신의(信義)를 지킨다는 이런 이야기는

지금의 우리 사회에서는 우화 같은 이야기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지식은 그 속성상 이분법적(二分法的)입니다.

시(是)와 비(非)를 가리고,

가(可)와 부(不)를 가리는 것이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나>라는 것이 개입되는 순간

지식은 더 오염되어 버립니다.

옳다고 우기다가도 내게 불리하면

금방 잘못되었다고 백 천 가지 이유를 만들어냅니다.

그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한때 우리 사회는 지식이 곧 힘이었습니다.

새로운 문물과 과학지식이 절실히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러한 지식을 얻기 위해 우리의 교육열은

다른 나라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높아지고

그 결과는 우리 경제를 이끌어가는 동력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때부터인가 지식은 경쟁의 도구로 전락했습니다.

남들보다 앞서야만 성공할 수 있고,

모든 경쟁에서 이끌 수 있다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행복을 불러온다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지식을 많이 쌓음으로써 경쟁에서 이기고,

또 부(富)와 명성을 얻게 했지만,

그것은 행복이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자신에게도 행복보다는

더 큰 갈등과 번뇌를 초래하고 있지 않습니까?

지식은 권모술수의 수단으로 전락하여

팬덤현상과 같은 집단을 형성하고 자만심과

교만을 키워 대중들을 선동하는 도구로 오염되어 가고 있습니다.

 

참된 지식을 가진 사람들은 우리는 지성인이라고 부릅니다.

지성인이라면 적어도 자기가 말한 대로 행해야 하며,

행하는 바 그대로 말해야 하며,

몸과 말과 행동이 거짓이 없이 맑고

투명하게 깨끗해야 할 것이며,

설령 이익을 구하는 것이라면, 적이 아니라

친구라는 마음으로 행동하고, 말해야 하는 것이며,

아전인수(我田引水), 내로남불과 같은

그런 말과 행동으로 욕심을 내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또한 설령 다툼이 있을지라도

평등심과 자비심을 잊지도 않고 버리지 않아야

지성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식은 속성은 시비를 가리는 것입니다.

내가 옳으면 상대는 당연히 잘못된 것이 됩니다.

내가 선인(善人) 이면 상대는 악인으로 취급됩니다.

시비의 논쟁 속에는 내 편과 네 편이 갈라지게 마련입니다.

내 편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나의 우월성을 돋보여야 합니다.

그래서 다문박식(多聞博識)을 자랑합니다. 그래서

지식은 상대적인 우월감을 낳게 하고,

아만을 낳는 탐욕의 도구로 전락한 이기적인

마음의 동력이 되어 버린 지 오래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사회가 맑아지고,

나도 너도 함께 행복해지는 가장 근본적인 것은

<나>를 내세우면

그 상대적인 <너>와 괴리가 생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마음의 분별이 생기면 나와 남이라는 괴리가 생기게 되고,

거기서 갈등이 생기고, 사랑과 미움,

시기와 질투 등 번뇌가 생기게 됩니다.

<나>라는 것이 없어지면 상대적인 <너>도 없어집니다.

<나>와 상대적인 <너>가 사라지면 <나>가 <너>가 되고

<너>가 <나>가 됩니다. 평등해 집니다.

그러므로 우월감이 아니라 평등심을 갖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남의 고통을 너그럽게 들어주고, 남의 행복을 축복해 주는 것은

종국에는 곧 나를 위함이 됩니다.

불교에서는 이를 자비(慈悲)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는 막연한 감상적인 말이 아닙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란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긴다는 애견(愛見)의 마음이 아니라,

너와 내가 평등함으로 행하는 자비를 말합니다.

애견(愛見) 하는 마음은 그렇듯 한 말 같지만,

상대적인 우월감을 품고 있습니다.

가진자가 베푸는 것이 아니라

나누어 갖는다는 마음으로 행하는 자비를 말합니다.

 

새해에는 분별하는 마음을 놓읍시다.

보수니 진보니 하는 이념적인 투쟁도 놓아버립시다.

나와 너와의 관계도 그렇고,

나와 사물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행복과 불행은 다 마음에서 일어납니다.

옭고 그름도 다 마음에서 일어납니다.

마음에 옳다 그르다 하는 생각이 들면

다툼이 일어나고 갈등과 시비가 일어납니다.

평온했던 내 마음이 번뇌가 쌓이게 됩니다.

선가에서는

「一心不生(일심불생) 萬法無垢(만법무구)」라 했습니다.

분별을 놓아 버린 마음, 나를 놓아 버리고

모든 것을 평등하게 보는 그런 마음으로

이 한 해를 맞이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