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 존자 주리반타카 이야기(2)

2024. 6. 8. 01:26삶 속의 이야기들

 

 

바보존자 주리반타가의 두 번째 이야기다.

명장 밑에는 졸장이 없다고 경전을 보면 10대 제자들을 비롯하여

붓다의 제자들은 모두 뛰어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중에서 유독 바보 존자로 불리는

주리반타가란 제자가 한 명 있었다.

파리어로는 Ksudrapanthanka로 불리는데

경전에서는 이를 음사하여 주리반타가(周利槃陀伽)라 한다.

주리는 소로(小路)라는 의미이며 반타카는 로(路)라는 의미다.

형과 같이 길에서 출생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경전에 따라 이를 계도(繼道)라고 소개되기는 하는데

그의 형은 로변(路邊)으로 불린다. 형은 총명하여

일찍 출가하여 바로 아라한의 경지에 올랐지만

늦게 출가한 주리반타카는 아둔하기 짝이 없었다.

게송 하나를 외우는데도 다른 비구들은

몇 시진도 걸리지 않은 짧은 게송을 일 년 동안에 외워도

외우지 못할 정도였으니 아둔하다는 말이

사치스럽게 들릴 정도로 머리가 나빴다.

출가한 지 수년이 지났지만,

그 모양이니 이를 참다못한 그의 형은

환속하라고 호통을 치며 내쫓았다.

이를 혜안으로 본 붓다는 불쌍히 여겨

주리반타카를 불러 라조하라낭(rajoharaṇaṃ)’이라는

매우 간단한 단어 하나를 일러주면 이를 암송하라고 알려 주었다.

이 말은 티끌 제거라는 뜻이다.

증일아함경에서 소세(掃蔧)”라고 표현되어 있는데

이는 제구(除咎)”를 의미하는 말로

먼지나 때를 없앴다는 의미이다.

주리반타카는 부처님이 일러주신 이 한마디 말과

함께 부처님이 건네준 천 조각을 만지며

오로지 일심으로 <라조하라낭>이란 이 말을 암송하며

마침내 이 한마디로 깨달음을 얻어 아라한의 경지에 올랐다.

 

훗날 다른 제자들이 부처님에게

"반특은 본래 성품이 우둔하여

겨우 게송 하나를 외운다는 말을 들었는데,

무슨 인연으로 도를 얻었습니까?"
라고 부처님께 묻자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꼭 많이 배워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실천하는 것이 제일이다.

반특은 겨우 한 게송의 이치를 알고 있지만

그 정밀한 이치는 신(神)의 경계에 들었으며,

몸과 입과 뜻으로 짓는 업은 고요해지고 깨끗해져서

마치 순금과 같다. 사람이 아무리 많이 알아도

그 뜻을 해득하지 못하고 또 실천하지 못하면

한낱 정신만 해치는 것이니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그리고 세존께서 다시 게송을 말씀하셨다.

 

비록 천 마디 말을 외우더라도
그 글귀의 뜻을 바르게 알지 못하면
단 한 마디의 법을 듣고서
온갖 악한 생각 멸함만 못하다.

비록 천 마디 말을 외우더라도
이치를 모르면 무슨 이익 있으리.
단 하나의 이치라도 듣고 실천하여
해탈하느니만 못하느니라.

아무리 많은 경전 외우더라도
깨닫지 못하면 무슨 이익 있으리.
단 한 구의 법 구절이라도 깨달아
그대로 실천하여 도를 얻음만 못하느니라.

 

이는 <법구비유경 술천품(述千品)>에 나오는 이야기다.

지혜도 좋지만, 실천 곧 행(行)이 따르지 않으면

불교의 교리는 물론 모든 종교의 교리도 무용지물이라는 의미다.

또 익히 아는 이런 이야기도 있다.

시선(詩仙)으로 불리는 백거이(白居易)가 항주 태수로 있을 때

그곳에 유명한 도림(道林) 선사 가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 불교가 대의가 무엇인지 묻자 도림 선사가 말했다.

『제악막작(諸惡莫作) 중선봉행(衆善奉行)

자정기의(自淨其意) 시제불교(是諸佛敎)』

이를 칠불통게(七佛通偈)라 부르는데 이 말은

악을 짓지 말고 선행을 많이 베풀고

스스로 그 마음을 깨끗이 하는

이것이 불교라는 의미인데 이 말을 듣자 백거이가 웃으면서.

이건 어린아이도 다 알고 있는 말이라고 하자

도림선사는

<그렇지, 어린아이도 알고 있는 이치지.

그러나 팔십이 된 노인들도

이를 실천하지 못하고 있지> 라고 응수했다고 한다.

 

법당에 보면 석가모니 부처님의 협시보살로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모시고,

아미타부처님의 협시로는 관음보살과

대세지 보살을 모신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부처님을 원리(原理)라고 본다면

문수와 대세지를 지혜를 상징하고

보현보살과 관음보살은 행(行) 곧 실천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대승의 대의라 할 수 있는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이란 말도

곧 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머리에서 얻어진 지혜는 가슴에서 다시 느껴져야 한다.

불교에서 무심(無心)을 말하지만 이를 체증하여

실제 행동 곧 실천으로 드러나지 않으면

무심을 백번 깨우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선가에서 『어심무사(於心無事) 어사무심(於事無心)』

이라고 하지만

이 또한 머리로서만 이해해야 할 말이 아니다.

실제 삶 속에서 행해져야 하고 그렇게 살아야

선가의 이 말의 진가(眞價)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요즘 불교 공부를 한다는 사람들을 보면

불교를 철학적으로,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말을 익히는데만 치우쳐 부처가 이른

참 대의(大意)를 망각하고 있는 것이 실망스럽기 그지없다.

그래서 옛 선사들은

『길에서 부처를 만나면 때려죽여라.』

라고 까지 말하지 않았던가?

 

곽암선사의 십우도(十牛圖)의 마지막 제10수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정녕 불교의 대의가 어디에 있는지를?

 

곽암선사의 십우도 10수 입전수수(入鄽垂手)

 

柴門獨掩(시문독엄) 千聖不知(천성부지)

埋自己之風光(매자기지풍광) 負前賢之途轍(부전현도철)

提瓢入市(제표입시) 策杖還家(책장환가)

酒肆魚行化令成佛(주사어행화령성불)

 

<번역>

싸리문 걷어 닫고 홀로 앉으니 천명의 성인도 모른다.

자기의 풍광을 묻어 버리고 옛 성현의 걸어간 길도 저버렸다.

표주박 차고 저자에 들어가 지팡이를 짚고 집으로 돌아간다.

술집, 고깃집, 생선가게(의 사람들을) 교화하여 성불하게 한다.

 

지식과 행이 따로 놀면 중생도 있고 부처도 있지만

둘이 함께 놀면 중생과 부처가 어디 있겠는가?

여보시게, 달이 저리 밝으니 술 한 잔 하고 가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