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불이공(色不異空) 색즉시공(色卽是空)

2024. 9. 5. 13:30경전과교리해설

色不異空(색불이공) 空不異色(공불이색)

色卽是空(색즉시공) 空卽是色(공즉시색)

 

이는 <반야심경>에 나오는 말인데

色과 空이라는 말은 불교 문꼬리만 잡아도 듣는 말이다.

色과 空이란 어떤 뜻인가? 먼저 사전적인 의미를 보자.

 

<중국 보타낙가산의 해수관음상>

色은 물질을 말하며 존재론으로 보면

<~있다> 즉 存在가 되고 유(有)가 된다.

有는 無와 空에 상대한 말로

이는 實有, 假有, 妙有등의 분별이 있다.

삼계실유(三界實有)와 같이 실유(實有)한 것,

인연이 다른 법에 의한 가유(假有),

원성실성을 묘유(妙有)라 한다.

 

실체론으로 보면 우리가 말하는 물질은

그 형상이 있고 가사적(可視的) 임으로

有라고 하지만 실체가 있는 實有가 아님으로

가유(假有)라고 한 것이다.

아비달마론에서는 물질의 최소 단위를

<인허(鄰虛)>라고 부르는데

인허진(鄰虛塵)이라고도 한다.

신역(新譯)에서는 극미(極微)하며

색법의 가장 작은 부분(極小分)을 뜻하는 말이다.

인(隣)은 허공과 같은 것으로 색법의 근본이 된다.

승론외도는 이 인허(鄰虛)는

삼재(三灾)의 말겁시(劫末時)에도

부서지지 않고 허공에 분산하여 상주한다 여겼다.

불교의 소승유부종에서는

비록 극미(極微)를 세워 실유(實有)하다고 하나

이것도 인연의 소작으로 업력이 다(盡)하면

극미도 또한 없어지므로

무상생멸이 분명하다고 하였다.

가유(假有)라는 의미다.

 

뜻으로는 색을 변괴(變壞), 변애(變礙),

질애(質礙)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변괴는 전변(轉變) 파괴(破壞)하는 것이고,

변애(變礙)는 변하여 달라지는 것,

질애(質礙)는 형질이 있고 서로 장애되는 것을 말한다.

 

空은 공간, 허공이라 하며 실체가 없는 것으로

허(虛)요 무(無)다, 존재론으로 보면

<~아니다><~이 없다>라는 의미로 非存在가 된다.

 

색불이공의 <무(無)>는 비(非), 불(不)이란 의미이며,

사물의 존재를 부정하는 말이다.

무(無)는 승의(勝義)로 해석하면

유(有)와 무(無)의 2종이 있다.

혹지(惑智)의 무(無)와 승지(勝智)의 無가 있다.

혹지의 무(無)는 단견(斷見)이 되고

승지(勝智)의 무(無)는 유무를 벗어난

묘무(妙無를 말한다.

유와 무의 상대적 의미를 벗어났기에 경전에서는

진공(眞空)이라 말하는 것이다.

 

(법흥사의 만드라)

색불이공(色不異空) 공불이색(空不異色)이란

의미를 살펴보자.

물질은 허공과 다르지 않고,

허공은 물질과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청담스님은 <한글 반야심경>에서 이렇게 해설했다.

「실체가 없다(空)고 하지만 그러나

실체가 없는 본래의 그 성품은

물질적 현상(色)을 저버리고 있는 것도 아니고

또 물질의 현상(色)이 실체가 없는 (空)

원리를 떠나서 존재하지도 못한다.

곧 거짓 있고 거짓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라고 했고, 色卽是空 空卽是色은

「물질적 현상은 그 실체를 살펴보면

곧 아무 것도 없는 공(空)으로 되고

또 실체가 없는 본성(空)도 물질적 현상

그것과 동떨어진 별개의 것은 아니다.

곧 묘하게 있고 묘하게 없는 것이다」라고 해설했다.

 

쉽게 요약하면 물질은 실체가 없음으로

실체가 없는 허공과 다르지 않다.

따라서 실체가 없는 것으로만 보면

물질이 곧 허공이다라는 의미다.

그 역(逆)도 마찬가지다.

 

심경의 이 구절을 자귀대로만 보면

무언가 허전하고 비어 있는 느낌이 든다.

색과 공이란 이분법적인 명제로 상대하여

답을 내는 것도 무언가 허전하다.

현대를 살고 있는 일반인들은

<묘(妙)하게 있고, 묘(妙)하게 없다> 라는

이 말의 참 의미를 어떻게 이해할까?

단편적이고 다소 산만하지만

현대 물리학의 지식을 빌어

물질(色)과 시공간(視空間)의 의미를 더듬어 본다.

 

(보타낙가산의 백의양류관음상)

물질(物質)이란 특정한 시간(時間)에

특정 공간(空間)을 점유하고 있어야 한다.

하나의 공간에 두 개의 물건이

같은 시간에 동일한 위치를 점유할 수 없는 것이다.

고전적인 물리학에서는 그 특정한 시간을

절대시간으로 특정한 공간을

절대공간이라개념으로 인정되어 왔다.

그런데 특정한 공간, 특정한 시간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일까?

시간이란 다른 위치에 있는 각각의 관찰자에 따라서

동시성과 흐름을 달리하는 상대적인 것이며,

따라서 모든 관찰자에 공통되는

절대시간이란 없는 것임을 밝힌 것이 상대성이론이다.

따지고 보면 공간과 시간은 名目, 생각의 형식,

일상적관용어에 불과한 것이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현대물리학에서는 절대공간과 절대시간의 개념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에 의하여

그 허구성이 들어났으며, 고전물리학의 철칙이었던

인과율(因果律)은 하이젠베르크가

불확정원리를 도입하여 양자역학을 수립함으로써

원자(原子)의 세계에서는

통용될 수 없는 개념으로 전락하였고,

고전물리학에서 생각했던 단순한 질량적물질은

양자(量子)물리학(物理學)에서는

합리적 원리를 초월하는 자기모순에 가득찬

正體를 알 수 없는 신비로운 것으로

보여지게 되었다고 말한다.

 

우리가 사물을 볼 때 보는 그 순간은 현재인가 과거인가?

새해 일출을 보기 위해 바다로 산으로 간다.

새해 아침에 보는 태양은 정말 새해 아침의

한 순간에 보는 태양인가?

태양을 바라 볼 때 빛이 지구에 도달하는 시간은

8분이 걸린다고 한다.

우리가 보는 태양은

8분 전에 존재했던 태양을 보고 있는 것이다.

만약 몇 십광년이나 떨어진 별을 본다고 하면

아무리 성능 좋은 망원경으로 보드라도

그것은 몇백만년 전의 별을 보고 있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관찰자가 보는 공통된 절대시간은

없는 것이다.

언제 어디서 보는 가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이다.

 

물질이 존재하려면

일정한 공간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자명한 일이다.

그런데 그 공간은 절대적일까?

거울이란 틀에 비추어진 형상은

거울면이 평면일 때와 굽어있을 때

달리 보이는 것은 익히 알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또 믿고 있는 공간은 어떤 것일까?

현대물리학에서는 물질을 담고 있는 각각의 공간은

각각 다른 曲率(곡율)에 의하여 歪曲되어 있다고 한다.

모든 공간이 유크리트적 동질의 공간이 아니라는 것,

즉 절대적공간은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평면 위에서 정삼각형은

그 내각의 합이 180도이지만,

곡선 즉 지구와 같은 거대한 구(球)선상에서는

정삼각형을 그려도 그 내각의 합이

180도보다 크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우주물리학에서는 시공(時空)은 기울어져 있다고 한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에 의하면,

重力은 공간과 시간을

휘어지게 하는 결과를 낳는다고 하였다.

이는 2차원적인 평면기하학이

球의 표면에 적용할 수 없듯이

유크리드의 기하학은 曲線에서는

적용되지 못한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다.

아이슈타인에 의하면 3차원이 실제 휘어져 있고,

그 만곡(彎曲:활모양 굽은 곡선)이 질량을 가진

물체의 重力場에 의해 야기되었다고 설명한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에 따르면

공간의 만곡(彎曲)은

질량체(質量體)의 중력장(重力場)에 의해 일어난다.

질량을 가진 물체가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그 물제 주변의 공간은 휘어져 있으며,

그리고 그 휘어진 정도는 그 물제의 질량에 달려 있다.

예를 들면 恒星이나 流星같은

질량을 가진 물체가 있는 곳에는

언제나 그 주의의 공간이 휘어져 있으며, 그

曲率은 물제의 질량에 좌우된다.

그리고 상대성 이론에서 말하듯 공간은

시간과 분리될 수 없듯이 시간 역시

물체의 존재에 의하여 영향을 받아

우주의 여러 영역에서 각각 다른 속도로 진행하고 있다.

따라서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은

절대적 공간과 시간의 개념은 완전히 폐기된다.

공간과 시간을 포함하는 모든 측정은

상대적일뿐만 아니라 시간의 全구조가

우주 안에서의 물질의 분포에 따라 결정된다.

이는 <빈 공간>의 개념이 그 의미를

상실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보는 물체는 정상 평면이 아니라

이그러진 공간 위에 비추어진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정상으로 보는 것은

그 이그러짐이 너무 극소하기 때문에

그 차이를 못 느낄뿐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색이 곧 공이란 말은

존재(色가 곧 비존재(空)라는 말과 같은 의미다.

물질과 공간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를 보자.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모든 물질은 질량을 지니고 있는데

그 질량은 에너지의 어떤 형태에 속하는

추상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추상적인 속성이란 물질의 양면성을 말하는 것인데

우리가 어떻게 보는냐에 따라

그것들은 때로는 입자(粒子)로,

때로는 파동(波動)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입자로 나타난다는 것은 물질적 이동이며.

파장으로 나타난다는 것은

비물질적인 이동을 말하는 것이다.

정지해 있는 물체라고 해도

그 질량 속에 에너지가 담겨져 있으며

이 둘 사이의 관계는 익히 알려진 아래 등식으로 표현된 것이다.

<E=mc²(c는 빛의 속도로 불변수이며 초속 30만 km.)>

 

빛의 속도인 이 불변수 C는 상대성이론에 있어서는

근본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우리가 광속에 가까운 속도를 지닌

물리적 현상을 기술할 때는

상대성이론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특히 전자기(電磁氣)적 현상에 적응되며

빛은 전자기적현상의 한 例에 불과한 것이다.

이것은 물질이 비물질로, 비물질이 물질로

변화하는 속도가 너무나 빨라서

우리가 육안으로서는 감지할 수 없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물질의 최소단위를 분자라 하며

그 분자는 원자를 구성하고 있다.

원자는 핵과 전자를 구성하고,

핵은 양자와 중성자

그리고 무수한 아원자적입자(亞原子粒子)로 구성되어 있다.

原子와 원자를 구성하는 素粒子를 관찰하는데 있어서는

그 입자들은 공간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객체로서는 파악할 수 없으며,

그것은 存在와 非存在 사이에서

천변만화하는 에너지(氣)의 일시적인 형태,

또는 에너지 장의 변화의 과정이나

작용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

작용을 장(場)으로 표현하는 데

장(場)의 개념은 전자기력과 결부되고

중력과도 결부되어 있다.

중력의 장은 모든 질량을 가진 물체에 의하여 생기고

感知되며 그로부터 나오는 힘은 언제나 引力인데 반하여

전하에 의해서만 감지되는 전자기장(電磁氣場)은

인력(引力)과 반발력(反撥力)을 일어킨다.

 

중력의 장에 적합한 장이론은 일반상대성이론이며

이 이론에서 질량을 가진 물체의 주위의 공간에 대한 영향은

그에 상응하는 전기역학에서의

전하체의 영향보다 훨씬 심대하다.

여기에서도 대상체 주위의 공간은

다른 대상체가 힘을 느끼게하는 상태에 있게 되나

이번에는 그 상태가 기하학

즉 공간의 구조 자체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질량과 공허한 공간- 充滿(색, 존재)과

眞空(공, 비존재)-은 근본적으로

두 개의 개념이 아니라 분리될 수 없는 개념이다.

질량체가 있는 곳에서는 언제나 중력의 장이 있게 되며

이 장은 그 물체를 둘러싸고 있는

만곡된 공간을 채우고 있으며

그 둘은 구별될 수 없는 것이다.

 

다시말해 물질은 그 중력의 장과 분리될 수 없으며,

그 중력의 장은 만곡(彎曲)된 공간과 분리될 수 없다.

그러므로 물질과 공간은 단일한 전체의 분리될 수 없는

상호의존적인 면으로 이해된다.

물질적 대상들은 주위 공간의 구조를 결정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 주위의 환경에 의해 본질적으로 영향을 받는다.

물체란 단지 다른 물체가 존재하기 때문에

慣性을 갖게 된다. 이는 心經에서 말하는 물질과

공간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있으며

또한 더나아가서 상호의존적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물리학에서는 원자는

하나의 원자핵과 전자로 구성되어 있다.

원자핵은 양성자와 중성자

그리고 무수한 아원자입자(亞原子粒子)를 구성하고 있다.

원소는 입자적(粒子的) 이동을 하고

아원자는 파동적(波動的) 이동을 한다.

 

원소의 양면성 즉 입자상(粒子像)과

파동상(波動像) 사이에 존재하는 외견상의 양태가

모순으로 보이는 것은 亞原子的 단계에서 물질은

어떤 한정된 장소에 확실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존재하려는 경향을 나타내며,

原子的 사건들은 확실성 있게 한정된 시간에

한정된 방식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발생하려는 경향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다.

 

현대물리학의 양자이론의 형식론에서는

이러한 경향성은 확률로서 표현되며

파동의 형식을 취하는 수학적인 量과 연관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어떻게 粒子가

동시에 파동이 될 수 있는 하는 이유이다.

그것은 음향이나 물결처럼

실재하는 3차원적 파동이 아니다.

그것은 공간의 특정지점과 특정한 시간에

입자를 찾아내는 확률과 관계있는

파동의 모든 특유한 속성을 가진 추상적이고

수학적 量인 확률파(確率波)이다.

원자물리학의 모든 법칙들은 이러한 확률로 표현된다.

우리는 원자적 사건을 결코 확실성 있게 예언할 수 없다.

단지 그것이 어떻게

일어날 것 같은가를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이 원리는 심경에서 말하는

<색불이공(色不異空)> 즉 존재(색)가

비존재(공)와 다르지 않다는 의미와

상통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물리학의 양자론은 우주의 근본적인

全一性을 드러내 주는 것으로 이해되며

불교적인 의미에서 본다면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는 존재(색)가

곧 비존재(공)라는 의미로도 해석될 수가 있는 것이다.

 

原子와 원자를 구성하는 素粒子를 관찰하는데 있어서는

그 입자들은 공간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객체로서는 파악할 수 없으며,

그것은 存在와 非存在 사이에서

천변만화하는 에너지(氣)의 일시적인 형태,

또는 에너지 장의 변화의 과정이나

작용에 지나지 않는다고 의미가 된다.

 

공간 속으로 확산되어 가는 波動像은

명확한 위치만을 암시하는

粒子像과는 기본적으로 다르다.

물리학자들은 물질은 상호 배타적인 것으로

즉 입자들은 또한 파동이고,

파동은 또한 입자들이라고 말한다.

波動模型에 있어서는 움직이는 입자들이란

본래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確率波>의 도입은

그것을 전혀 새로운 맥락 속에 놓으로써

파동치는 입자의 파라독스을 해결해 준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훨씬 더 근본적인

다른 한쌍의 반대개념, 즉 존재와 비존재와 같은

대립개념으로 이끌어 간다.

이러한 쌍을 이루는 대립도

원자적 實在에 의해서 초월되어 진다.

우리는 원자적 입자가 일정한 장소에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렇다고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다.

粒子는 確率模型임으로

여러 장소에 존재하는 경향을 지니고 있으며,

그리하여 存在와 非存在 사이의

기이한 종류의 물리적 實在를 표현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입자의 상태를

고정된 대립개념으로서 기술할 수 없다.

입자는 어느 한정된 장소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며,

또한 나타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그 위치를 변화하지도 않으며,

또 정지된 채 머물러 있는 것도 아니다.

변화한다는 것은 확률모형이며,

그러므로 일정한 장소에 존재하려는 입자의 경향들이다.

 

이제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란

의미를 살펴보자.

현대물리학에서는 場은 언제 어디서나 존재한다.

그것은 결코 제거될 수가 없다.

그것은 모든 물질적 현상의 수레라고 했다.

수레는 물건을 이동하는 수단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것으로부터 양성자가

파이중간자를 생기게 하는 허공이다.

소립자들의 나타남과 사라짐은

단지 場의 운동 형태에 불과하다.

이는 비물질인 허공에서

물질이 생겨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어떤 입자나 다른 강하게 상호작용하는

소립자가 없더라도 가상적 소립자들이

허공으로부터 스스스로 생겨났다가

다시 허공으로 사라지는 것이 명백하게 밝혀졌을 때

결국 물질과 빈 공간 사이의 구별은 없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물리학에서는

<진공도식(眞空圖式)> 이라는 것으로 입증하고 있다.

 

장이론에 따르면 그러한 종류의 사건들은

항상 일어나고 있다. 진공이란 완전히 비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반대로 그것은 끝없이 생기고 사라지는

무수한 입자들을 함유하고 있다.

바로 여기에 현대물리학이 도교에서 말하는

<허(虛)>나 불교의 <무(無)> 또는 <진공>에 가까운

유사성이 있는 것이다.

물리학의 장이론에서는 이를

<물리적 진공>이라고 부른다. 다시말해서

가상적(假想的) 소립자들과 眞空의 관계는

본질적으로 動的관계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眞空은 진실로 생성과 소멸의 끝없는 리듬으로 고동치는

<살아 있는 虛요, 無이다>

진공의 동적인 성질의 발견은

물리학자들에 의하여 현대물리학에서

최고로 중요한 발견 중의 하나로 간주되고 있다.

 

<공(空)>은 단순히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아니라

소립자의 세계로 모든 형태를 지닐 가능성을 갖고 있다.

이러한 형태들은 독립된 실체들이 아니라

단지 근본적인 허(虛)의 일시적 출현이다.

 

사물에 대한 우리들의 지식습득의 방식은

직관적인 방법과 추론적인 방법을 통해서 얻을 수 있다.

반야심경은 직관을 통한 지식임으로

일반인이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따르는 것이다. 그

직관을 선정(禪定)이라 한다. 그

래서 무언가 허전하고 비어 있음을 느끼는 것이다.

 

원자세계의 특징은

존재하려는 경향성, 제한에 대한 반작용으로서의 움직이는

소립자들, 어떤 量子狀態에서

돌연히 다른 상태로 전환하는 원자들,

그리고 모든 현상들의 본질적인 상호관련성,

원자 현상을 일으키는 근본적인 힘

은 陽電荷의 원자핵과 陰電荷의 電子들 사이의

電氣的인 引力이다. 이 힘과 전자파 간의 상호작용이

자연의 여러 가지 현상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그러므로 원자의 세계는 곧 우주의 세계다,

우주란 하나의 상호 관련된 전체이고

그 안의 어느 부분도 결코 더 근본적인 것이 아니며,

따라서 어느 한 부분의 속성은

다른 모든 부분의 속성으로부터

결정되어 진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경을 본다면 이는 色과 空의 관계는

서로 배타적인 대립의 상태로서 생각될 수가 없으며

다만 동일 實在의 양면성으로서 공존하면서

연속적인 협력관계 속에 존재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된다.

거시적(巨視的)으로 본다면

공이 곧 색이라는 말의 공(空)은 <없다>라는

무(無)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고 기능을 다하고 있는 생동하는

불성(佛性)의 표현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