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라, 그러면 삶은?

2024. 6. 4. 10:03삶 속의 이야기들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 명가명비상명(名可名非常名)」

익히 알려진 이 말은 노자의 도덕경 첫머리에 나오는 말이다.

도(道)라고 말해지는 도는 참다운 도(道)가 아니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은 참다운 이름이 아니다 라는 의미다.

이는 곧 모든 존재의 본질은 세상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로서

정의(定義)될 수 없다는 것을 천명한 것이다.

 

노자의 도(道)를 종교적인 견지에서 보면

힌두교적으로는 <쉬바>, <브라흐만>의 탐구가 되고,

회교도의 견지에서 파악하면 <알라> 신이 되고,

기독교적으로 파악하면 <하나님>이 되고,

불교적으로 파악하면

<공(空)> <법(法)> <법성(法性)>등 이라 할 수 있다.

말은 각자의 종교적인 견지에서 다르게 표현되었지만,

이는 소통을 위한 방편일 뿐

궁극적인 그 본성을 가리킴에는 말로 들어낼 수 없다는 점이다.

 

느낄 수는 있지만 표현될 수 없는 것이 바로 도(道)라는 속성이다.

<신심명(信心銘)>의 말을 빌리자면 도(道)라는 것은

「허공과 같이 둥글고 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지만

말로써 표현할 길이 없다(圓同太虛 無欠無餘 言語道斷)」

라는 것이 되는데 말로서 규정지을 수 없는 것을

어떻게 <이것이 도(道)>라고 특정하여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사람들이 말하는 <도(道)>란 것은

참된 도(道)가 아니라는 의미다.

삶도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삶 또한 답이 없기에

무어라 규정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부자로 살던, 거지로 살던, 대지식인으로 살던,

일자무식의 무지렁이로 살던

어찌 어느 것을 일러 이것이 참된 삶이다 라고

특정하여 말할 수 있겠는가?

존재의 본질은 말의 영역을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며칠 전 옛친구들과의 모임이 있었다.

대학 입학 동기들이라 졸업한 후에도 매년 어김없이

만남을 이어가는 사이다 보니 지나온 햇수를 따져보면

반백 년도 훨씬 넘은 오랜 친구들이다.

 

그런데 이런저런 이야기 중에 책 읽는 이야기가 나오자

느닷없이 한 친구가

“논어 그 책 읽어보니 나하고 아무런 상관도 없더구먼.

먹고 사는 데는 한 푼 값어치도 도움이 안 되는

말 같지 않은 소리더구먼. 라고 하자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라.

뭔 개떡 같은 소리인지 모르겠다고 하며

다른 한 친구가 도덕경의 이 구절을 들먹이며 한술 더 뜬다.

 

모든 만남이 그러하듯 친구들과의 만남은 으레 술잔이 오가게 되고

이런저런 살아온 잡다한 이야기를 거침없이 쏟아내기 마련이다.

더구나 함께한 친구들 모두가 망팔(望八)을 넘어

산수(傘壽)를 바라보는 나이다 보니

세상사 이런저런 일 모두 겪은 본 나이인지라

무엇에 구애받을 나이는 더욱더 아니다.

그렇지만 삶에 대해 이런 편협된 생각들을 가지고 있을 줄이야.

 

세월의 무게를 느낄 정도의 나이가 되면 대개

「왜 살아야 하는지? 무엇 때문에 그렇게 살았는지?」 하는

삶의 의미를 되씹어 보게 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삶의 의미를 되씹어 보는 것은 세상 사람들의 말을 벗어나

존재적인 측면에서 바라보는 것을 의미한다.

젊었을 때야 세상 사람들과의 눈맞춤을 위해

앞만 보고 달리는 것도 벅찰 때라 이런 말들은

스쳐 가는 공허한 소리로 치부해 버릴 수도 있겠지만,

모든 일에서부터 손을 뗀

속된 말로 백수로 살아가야만 할 나이에도

세속적인 욕망과 생각으로 정의된 말을 따라

남은 생을 살아간다면

그런 것을 어찌 참된 삶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주변을 돌아보면 삶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도

칠팔십 년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어디 한 둘이겠는가?

삶 속에 어떤 뿌리를 내림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삶은

이 순간에서 다음 순간으로 옮겨가는 움직임에 불과한 것이다.

마치 목인(木人)이 움직이듯

삶이 부여하는 것을 음미하지도 못한 채 말이다.

그것을 삶이라고 세상 사람들이 말한다고 해서,

호의호식(好衣好食)하며 산다고 해서

그것이 참된 삶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살다 보면 나이가 들고 직장이나 일에서 물러나게 되면

노후 문제가 걱정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화두로 대두되는 것은

아마도 건강과 경제문제일 것이다.

건강을 걱정하게 되는 것은 곧 죽음이 두렵기 때문이다.

절이나 교회에 가보면 나이가 든 노인들이 많은 것도

기실 따지고 보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그래서 철학자들은 나이가 들면

무신론자도 종교를 가지게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삶의 본질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노후 문제도, 죽음의 문제도 삶의 한 부분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부분이 전체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삶을 단지 현실적인 문제로 정의될 수는 없는 것이다.

참된 삶이란 존재적인 접근에서 탐구되어야 하는데

이는 말의 영역을 벗어나 있기 때문에

이것이 참된 삶이라고 정의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삶이란

나의 삶이 될 수도 있고 아니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부(富)와 재산에 대한 욕망 또한 살면서 벗어나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현자들은 지족(知足)이란 말로 위무(慰撫)하기도 하지만

수긍하기도, 따르기도 어려운 것은

우리네 살림살이기 그렇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것보다 눈앞에 보이는 부동산이나 보험,

예금통장, 적금, 연금 등 이런 것들에 관심이 깊어지고

또한 사회적으로는 남들의 눈을 의식하여

얕잡아 보이지는 않는지, 남들에 처지지는 않는지 하는 걱정과

우려에 관심이 앞서는 것도 사실이다.

또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신으로 숭배되는 사회풍토에서

가족 관계조차도 재산이 없으면

자식들로부터도 눈총을 받게 되는 것도 그렇고,

손주들 돌보는 것도 가족이란 울타리 안에서 의무가 되어

소일꺼리라고 말은 하지만 하루의 일과 중

제일 큰 몫을 차지하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로 이것이 삶이다 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부(富)와 재산이라는 것도, 친구나 가족이라는 것도

막상 죽음에 이르면 모든 것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지만

언젠가는 나도 죽겠지만 그 죽음이 오늘은 아니고

내일도 아니라고 여기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디 한둘인가?

생각해 보자. 그대의 장례식장에 수백 명이 몰리고

부의금이 몇억이 될지라도 그것이 관속에 놓인

그대의 죽음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것 또한 우리가 부딪혀야만 현실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것이 삶이다 라고 정의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이 삶의 한 부분은 될지 몰라도 삶의 본질은 아니기 때문이다.

 

살아가는 삶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의 길은 밖으로 나가 내가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길이고,

다른 길은 나 자신의 안으로 들어가 내가 그 누구도 아님을 깨닫는 길이다.

나를 증명한다는 것은 나의 우월성을 찾는 길인데

이는 물질적인 성취 또는 만족을 구하는 것이 받치고 있고

자신의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가 삶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밖을 향해 오로지 실리(實利)의 세계,

유용성(有用性)을 찾는 것인데 이는 일반적으로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양상이기도 하다.

그러나 쓸모없음이 없다면

유용(有用)한 것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장미가 아름답지만, 세균과 썩은 흙이 없다면

뿌리가 어떻게 존재하며,

가시가 없는 줄기가 어찌 꽃을 키우겠는가.

삶이란 것은 삶 그 자체는

쓸모가 없는 것도 소용됨도 없는 것도 있다.

그 목적이 무엇인가? 어디로 가는 것일까?

그 결과는 무엇일까? 이런 의구심이 들지만,

삶에는 아무 목적도 아무런 결과도 목표는 없다.

삶은 끊임없는 환희이며

매 순간순간 그것을 즐기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결과를 생각하기 시작하면 삶을 즐기는 일을 놓치게 된다.

목적은 마음의 일부이고,

그리고 삶은 마음 없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존재란 설명이 필요 없다. 철학과 논리는 설명에 지니지 않는다.

노자가 말한 무위(無爲)의 삶도,

불교에서 말하는 무심(無心)도 이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옛 성인들이 말하기를 지혜로운 이는

언제나 존재에 관심을 두고,

무지한 사람은 언제나 행하는 것, 해야 할 것에 관심을 둔다.

존재는 그들에게는 문제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왜 존재의 의미를 잊고 살까.

만약 누군가가 “지금 몇 시입니까?”라고 묻는다면

그대는 시계를 보고 대답한다. 그

러나 시간이 무엇입니까? 하고 묻는다면,

그때는 시계가 아무런 도움이 안 될 것이다.

시간은 사라질 수는 있지만 볼 수는 없는 것이다.

시간은 철학적인 문제가 아니라 존재적이기 때문이다.

삶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교회를 찾고

절을 찾는 것은 철학적인 문제가 아니라

존재적인 의미가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천당, 극락을 기원하고 신의 구원과 가피를 구하는 것은

욕망을 구하는 자신의 삶을 논리적 철학적으로 계산된 행동이며

거기에는 존재라는 의미는 개입될 여지가 없게 된 것이다.

이는 삶을 지식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요, 명가명비상명(名可名非常名)이라면

삶은 어떤 것이 참된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오월의 여왕이라 불리는 장미를 보자.

장미를 X라 불러도, 장미를 Y라고 불러도

장미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네 삶도 그렇다. 삶을 철학적으로,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욕망과 현실적인 유용성으로 정의한다고 해도

삶의 한 조각의 설명일뿐 완전한 본질은 설명되지 않는다.

세상 사람들이 각자 나름대로 자기의 삶을 장대하고,

화려한 말로 이런 것이 삶이다 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삶의 한 부분일 뿐 전체의 삶은 아니다.

그렇다고 그런 부분들을 모두 모은다고 해도

그것을 삶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삶이 존재하는 공간은 내일이 아니라

지금 바로, 이 순간이다.

찰나에 변하는 순간을 어떻게 말로 정의될 수 있을까?

삶이 말로써 정의되는 순간 그것은 이미 지나간,

흘러간 삶의 작은 파편일 수밖에 없다.

세월의 무게를 느낀다는 것은

존재의 의미를 되돌아볼 때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삶의 길이 목표가 없다는 것은 <버림>이 아니라

어떤 의무나, 철학적 논리적 사고에서 벗어나

이 순간에 깨어 이 순간에 충실할 때

삶의 의미가 존재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내일이 아니라 지금 바로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기쁨을 느끼고 행하며 산다는 것이

존재의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그런 삶이 아니라

나의 삶, 곧 존재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삶의 가치든 행복이든 무엇이든 그것이 있는 자리는

지금이라는 이 공간 속이다.

노후대책이니, 천당 극락에 대한 욕망은

그대를 미래로 인도하지만 삶은 지금 이곳에 있다.

실재는 지금 여기에 있고 꿈은 미래로 인도한다.

꿈속에 산다면 이 순간 속에 그대라는 존재는 없는 것이다.

선어(禪語)에 조고각하(照顧脚下)라는 말이 있다.

발밑을 조심하라는 의미이다.

현실 속에서 욕망을 가지는 것은 꿈을 꾸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꿈을 꾸는 것은 멀리 보는 것이다.

꿈을 꾼다는 것은 욕망을 품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현재가 아니라 미래를 향하고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지금 있는 이 순간에 그대가 존재하는 공간이다.

 

@도라고 불리는 것은 참된 도가 아니라는 이 말의 참뜻은 무엇일까?

세상 사람들이 옳다고 이 길이 바로 참된 삶의 길이다라고

그렇다고 말한다고 해서 그것이 도는 아니라는 의미다.

참된 말이 아니라면 버려야 한다. 그러나 말을 잊는다는 것,

버린다는 것은 어렵다. 말이 마음에 달라붙어 있기 때문이다.

말이 중요해지면 그 의미가 상실된다.

상징이 비대해져서 내용은 완전히 사라지기 때문이다.

표면이 그대의 중심을 망각하도록 최면을 걸기 때문이다.

종교라는 것도 그렇다.

그리스도는 내용이고 기독교 정신은 단지 하나의 말이다.

붓디는 내용이고 불경(佛經)은 단지 말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한다 해도 그것은 교회와

이론, 성경 그 말들 때문이다. 붓다에 대해 말한다 해도

그것은 경전에 쓰인 말에 지나지 않는다.

그대의 마음이 말들과 이론, 경전들로 짐을 지고 있다면

그것들은 계속 문을 두드릴 것이다.

길을 달라. 우리는 나가고 싶다고.

선어(禪語)에서 말하는 가리키는 달을 보지

손가락을 보지 말라는 것은 또한 이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가리키는 손가락은 말이요, 달은 본질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말에 너무 탐닉하면

 그 모든 것을 잃어버릴 것이다. 종국에는 길다란 수집물만을 갖게 될 것이다.

철학자들, 직업적인 성직자들, 유명 지식인이라 칭하는

그런 사람들이 내던진 말들과 이론, 논리,

그리고 모든 것의 표본을.... 그

러나 아무것도 가치가 없다.

삶의 문제는 지식이나 이론이 아니다.

그런 말들을 따라가면 내용을 놓치기 때문이다.

참된 삶의 길을 놓치게 된다. 존재의 본질을 놓치게 된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지식을 배우지 않은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는 본질적이 아닌 모든 것을 모두 떨쳐버리기 때문이다.

무위(無爲)의 도를 말한 노자가 도덕경 첫머리에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 명가명비상명(名可名非常名)>를

서술한 것은 삶의 길에 이것을 일깨우기 위해 암시한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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