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에게 남긴 성철 대종사스님의 편지

2024. 4. 13. 23:34붓다의 향기

이 편지는 스님이 열반에 드시기 전

옛적에 해인사를 찾아온 미국인 비더라는 교수와 나눈 대화 중

미진했던 부분을 훗날 다시 글로 회신한 것이지만

불교를 공부하는 신도들에게도

또한 좋은 길잡이가 될 것 같아 소개한다.

한국 불교의 위대한 선승(禪僧)이라는 것에만 매료되어

찾은 이도 있었지만, 불교와는 거리가 먼 한 이방인이

먼 이곳 땅, 그것도 오지인 해인사를 찾아와

스님을 만났다는 것만으로도 예사롭지 않은 일이지만

스님이 직접 글로 써 이방인에게 회신한 것은

대승불교의 목적인 <下化衆生>의 참 의미를 실천하신

선행의 길잡이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전일 내방하셨을 때 어리석음을 무릅쓰고 쓸데없는 말들을

너무 많이 해서 참으로 부끄러웠습니다.

자기도 잘 알지 못하면서

남의 질문에 대답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이렇게 물어주시니

대답을 안할 수 없어서

몇 자 적어 보내니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진리는 언어문자에 있지 않고 자기 마음속에 있다.

그러니 진리를 알고자 하면 자기 마음을 깨달아야 한다.

만약 언어문자 속에서 진리를 찾고자 하면 땅을 파고서

하늘을 찾는 것과 같다.

때문에 진리를 영원히 찾지 못하는 것이다.

오직 자기 마음을 닦아서 깨달아야 한다."

 

이것이 불교경전의 근본 입장입니다.

일체의 진리가 자기 마음속에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경전이 일시적으로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좋은 지도자를 만나서

"진리는 마음속에" 란 것이

이해되면 경전은 필요 없습니다.

그래서 경전이 불교 입문의 필수 단계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속의 진리를 개발하는 데 제일 큰 장애물은 언어문자다.

그러니 천만 년 동안 경전 공부하는 것이

일 일간 마음 닦는 것만 못하다.

"경전을 버리고 자기 마음을 닦아라"라고

부처님은 항상 훈계하시고

제자들에게 좌선(坐禪)을 가르친 것입니다.

그래서 경전을 전공하는 학승(學僧)과

좌선에 전념하는 수도승(修道僧)은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일자무식한 사람이라도 자기 마음을 깨치면

『팔만대장경』을 다외운 사람들에

비교할 수 없는 큰 지혜의 힘을 얻게 됩니다.

따라서 불교의 생명선은 경전지식이

풍부한 데 있지 않고 스스로의 마음을 깨치는 데 있습니다.

예를 들면 지나(支那)불교사상의 가장 위대한 인물이었던

선조의 육조 혜능 대사는 일자무식이었습니다.

그에 반해 그의 동문인 신수는 불교뿐 아니라

세간지식에 있어서도

당시 그를 능가할 자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혜능과 신수의 스승은 일자무식이지만

스스로의 마음을 깨친 혜능에게 법을 전했고

이렇게 해서 혜능의 법손(法孫)들이

지나불교를 지배하게 된 것은 천하가 다 찬탄하는 바입니다.

경전을 전공하는 자가 없지 않지만 일생을 이것으로 계속한다면

불교의 근본입장에서 볼 때 이것은 일종의 탈선입니다.

이조 오백 년 불교사상 최고의 지위에 있는

서산 대사는 항상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차라리 일생 동안 아주 무식한 사람으로 지낼지언정

경전을 전공하는 학승은 되지 않겠다."

 

불교에서는 출가승려(出家僧侶)와

재속신도(在俗信徒)가엄격하게 구별되어 있습니다.

일체를 희생하고 모든 중생을 위해

독신으로 수도하는 자를 승려라 하고

세속에서 각종 생활을 영위하면서

불교를 믿는 사람을 신도라고 합니다.

만약 승려로서 대처(帶妻)하게 되면 자연히 가족 중심으로

불교가 생활도구화 되고 만다고 봅니다.

그러면 일체 중생을 위해 산다는

불교의 대자비 정신에 배치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승려의 대처를 엄단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승려가 환속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일단 환속하게 되면

승려의 자격은 상실이 되고 신도가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세태가 변해간다 해도 자기는 아주 잊어버리고

오직 남을 위해

대자비를 구현하는 승려만이 불교의 진리를 깨달을 수 있지요.

 

승려가 되기 위해서 버려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마음의 집착입니다.

이 집착을 버리지 않으면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합니다.

 

집착 중에서도 가장 강한 것이 있는데

이것은 바로 성욕(性慾)입니다.

성욕을 끊지 않고서는 성도(成道)할 수 없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에는 독신이 전제가 되는 것입니다.

 

모든 식물은 적정량의 염분이 함유되어 있어

그것만으로 건강유지에 충분하다고 의학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자연식이라고 봅니다.

 

음식물이란 건강 유지에 적량이면 그만이지

구미에 따라서 특별 가공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다년간 무염식(無鹽食)을 계속하는 것이

특별한 의의를 가진다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는 자기 마음 속이 부처가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지 못하는 사람을 위한 임시방편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마음이 곧 부처라는 것을 알게 되면

기도는 불필요하다는 것보다

오히려 배격되는 것입니다.

 

누구나 평등하게 가지고 있는

자기 마음속의 부처를 보지 못하는 것은

자기 본심을 덮고 있는 사악(邪惡),

즉 번뇌망념(煩惱妄念)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본심의 부처를 보려면

이 망념의 요소들을 퇴치해야 합니다.

불문에 들어오는 길에는 네 명의 문지기가 있습니다.

네 명의 문지기는 망념을 분쇄하는 장군들이며

그들의 발밑에 깔려 있는

인간들은 사악의 본 모습들입니다.

그러므로 네 문지기의 각 표정은

사악을 구축할 때의 자비와 위험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절의 불문(佛門)에 들어오는 사람은

각기 자기 마음속의 문지기로 하여금

 

자기 마음속의 사악을 항복받고

본래 부처인 자기 마음으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사찰은 국가 사회에 정신적 양식을 공급하는 지도자.

즉 진리의 사도자(使徒者)를 양성하는 수도장입니다.

그러므로 일반인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하는

관광지로 개발할 수 없습니다.

해인사에서 관광개발을 반대하는 것은

사찰 본래의 사명인 수도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당연한 행동이라고 봅니다.

정부가 여하한 계획을 세웠던 간에

우리는 수도자의 입장에서 끝까지 노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료: 펌)

@사진: 성철스님의 생가인 산청 겁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