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심마(是甚麽) 세 번째 이야기, 삶과 죽음

2024. 3. 4. 23:44붓다의 향기

 

인생의 시작은 태어남이요 그 끝은 죽음이다.

태어난 자는 누구도 죽음을 피해 갈 수 없다.

부자로 태어나든 가난뱅이로 태어나든,

출세하여 대통령이 되든 거리의 노숙자로 살든 간에

생명을 가지고 태어난 자라면

그 누구도 필연적으로 죽음을 맞게 된다.

죽음은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인간의 고통이요 위험이다.

 

(비바시불)

불교에서는 생노병사(生老病死)라는

4가지 고통을 들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죽음을 가장 두려워하고 있다.

그래서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기증 사실임을 알면서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이를 피하고자 애를 쓰고 있다.

우리는 죽음에 대해 말하는 것조차 꺼리게 되고,

심지어 생각하는 것마저 피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죽음이 두려워 다른 것에 몰두하려고 애를 쓴다.

우리는 결코 자기 죽음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죽음에 대해 생각할 때 죽음은

항상 다른 사람의 죽음을 의미하고

결코 자기 죽음은 아니다.

(시기불)

이런 우화가 있다.

 

아버지가 아들을 데리고 동물원으로 놀러 갔다.

사자 우리 앞에 이르자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한다.

「와! 동물의 왕 사자구나.」

아들이 묻는다.

「아버지, 왜 사자를 동물의 왕이라 부르지요?」

그러자 아버지가 말한다.

「사자는 힘이 세서 못 잡아먹는 동물이 없단다.

그래서 동물의 왕이라고 한단다.」

아들이 묻는다.

「그러면 사자가 아버지도 잡아먹을 수 있겠네요.」

「그럼, 사자가 우리를 뛰쳐나오면.」

그러자 아들이 한참 무엇인가 생각하더니 아버지에게 묻는다.

「아버지, 그럼 내가 집에 갈 때 버스를 타고 가야 해요,

아니면 전철을 타고 가야 해요?」

 

(비사부불)

우리는 죽음의 위험에 대해서 말할 때

항상 이렇게 자신을 제외하고 있다.

죽음은 결코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 죽음은 남의 죽음이다.

아들은 아버지가 죽어도 나의 죽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들의 관심은 아버지의 죽음보다도 집에 가는 일이다.

우리가 살면서 삶이 고통스러울 때

차라리 빨리 죽었으면 하고 생각하지만,

막상 죽음이 닥치게 되면 살고 싶어 안달하게 된다.

 

(구류손불)

이런 우화가 있다.

 

「어느 산골에 칠순 노인이 살고 있었다.

가세도 찢어지게 궁하고 슬하에 자식마저 없어

산에서 나무를 해다가 저잣거리에 나가 팔아

겨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나무를 지고 산언덕을 내려올 때마다

힘에 부대껴 여간 고통스럽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정말 지옥 같다고 느낀 노인은

그때마다 ‘저승사자가 눈이 멀었지,

왜 이 늙은이를 안 잡아가누!’ 하고 불평을 쏟아냈다.

그러던 어느 날 저승사자가 정말 나타났다.

‘영감, 이제 가시렵니까?

뭘 도와 드릴 것 없습니까?’ 하고 물었다.

막상 저승사자가 나타나니

노인은 죽는다는 것이 겁이 났다.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하는 말

‘아직은 살만하니, 제 지게나 산 아래까지 좀 져주시게나’ 」

 

(구마함모니불)

시심마(是甚麽)?

이 뭐 꼬?는 나는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다.

이는 곧 삶이란 무엇인가?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묻고 있는 질문이 된다.

삶의 끝은 죽음이요, 죽음의 시작은 삶이다.

삶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으면 죽음을 이해해야 한다.

죽음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삶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존재하는 것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존재하고,

그것은 통찰되어야 한다.

죽음 역시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고

따라서 죽음 또한 통찰되고 직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죽음을 회피하는 사람은

삶도 회피하는 것이다.

역으로 말하면 죽음을 직시할 수 있는 자만이

죽음을 초월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는 의미다.

 

(가섭불)

죽음을 회피하면 항상 죽음의 지배하에 놓여 있고,

만일 죽음을 직시하면 죽음을 초월한다.

죽음을 직시할 수 있는 자만이 죽음을 초월할 수 있다.

이를 불교는 「생사일여(生死一如)」라 말한다.

죽음을 초월하는 길은 명상이다.

깊은 명상을 통해 자발적으로

그리고 의식적으로 죽음의 순간에 접할 수 있다.

명상은 죽음이다.

인간은 죽음으로써 다시 태어난다.

인간은 현상의 세계에서 죽어

본체의 세계에 태어난다,

인간은 일시적인 세계에서 죽어서

영원의 세계에 태어난다.

명상의 심오한 황홀경으로부터 깨어날 때 삶

전체는 변형된다.

그러고 나서 아무런 두려움도 없이 살게 된다.

왜냐하면 이를 깨달은 자에게는
더 이상 죽음이 없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이 하나이기 때문이다.

(석가모니불)

@불교는 인간의 육체를 사대(四大)와

오온(五蘊)의 구성물이라고 말한다.

이 구성체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만남에 대한

부수적인 효과일 뿐이다.

그러나 부모로부터 태어나기 전에도 나는 있었고,

그리고 육체가 흙 속에 묻혀 사라져 버린 후에도

계속 존재할 것이다.

<나>는 영원히 존재한다,

그러나 아직 그것을 알지 못할 뿐이다.

있다는 것은 본래 있는 것이다.

없던 것이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없다면 본래부터 없는 것이다.

선가(禪家)에서 말하는

『득지본유(得之本) 실지본무(失之本無)』의 의미가 이를 말한다.

경전에 말하는 『생사일여』란 말의 참뜻은

죽음을 만나고 죽음을 직면하고

죽음의 도전을 받아들일 때만

죽음이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경지에 이르면 깊은 내면을 통찰할 수 있고

육체도, 마음도, 에고도 사라진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고 경전을 말한다.

그리고 <보임(保任)>을 하면

다시 말해 용기를 갖고 그 사실을 계속 직시한다면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것이 사라지더라도

자신은 존재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본질이며

<시심마(是甚麽)> 이 뭐꼬?

나는 누구인가? 라고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