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심마(是甚麽) 두 번째 이야기 항아리의 비유

2024. 3. 1. 17:29붓다의 향기

우리는 삶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도 한평생을 살아가고 있다.

7~8십 년을 살면서도

삶 속에 어떤 뿌리를 내림도 없이 떠돌아다닌다.

우리의 삶이란 단지 이 순간에서

다음 순간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태어나서 살다가 죽는 것뿐이다.

그래서 삶이 부여하는 것을 음미하지도 못한 채

지내다 보니 모두가 허망한 것뿐이라고 느낀다.

삶은 정녕 의미 없는 것일까? 의미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일까?

 

시심마(是甚麽)? <이 뭐꼬?>란 의미이다.

우리는 삶에 대해서 많은 질문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이 한가지 질문에 도달하게 된다.

시심마(是甚麽)?

그러나 이 질문의 대답은 외부로부터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질문 자체에 감추어져 있다는 것이 문제다.

왜냐하면 삶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유동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를 답 없는 질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답 없는 질문이기에 황당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선어(禪語)에서 회자하는 이런 말이 있다.

「千江流水 千江月」

달은 하나지만 흐르는 천 개의 강물 위에

천 개의 달이 비춘다는 의미다.

강물에 비치는 하늘의 달은 하나인데

강이 천 개이면 강물에 비치는 달도 천 개가 된다.

사물을 보는 우리들의 마음, 삶에 대한 인식도 그러하다.

하늘의 달을 보지 못하고

오로지 강물에 비친 달그림자만 보고

진실인 줄 알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다 어느 날 광야에 회오리바람이 일 듯,

홀연히 잠이 깨어난 듯, 하늘의 달을 보고 싶지만,

그 마음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다른 마음이 일어나 이를 방해한다.

“그것 부질없는 짓이야.” 하고.

 

우리의 마음이란 우리가 쌓아 온

과거의 경험. 과거로부터 배워 온 지식,

과거에 있었던 모든 것들이 뇌리에 쌓여 기억되어 있다가

드러나는 것에 불과하다. 사념(思念)인 것이다.

이 마음은 과거에 있었던 것이 쌓인 것이지

결코 현재에 있는 것은 아니다.

삶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비친 강물의 달을 보는 것이지

하늘의 달을 보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플라스틱으로 만든 조화(造花)처럼

우리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아름답게 포장되고 잘 정립되어 있다.

거친 들판에 핀 한 송이 장미와는 달리 생명력이 없다.

생명력이 없는 조화를 보고

영원한 삶의 의미를 찾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이미 만들어져 있는 것은 과거다.

그것은 과거의 산물이다.

살아 있는 현재가 아니다. 강물에 비친 달그림자일 뿐이다.

 

삶이 황당하게 느껴지는 것은 바로 이런 마음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삶에 대한 뭇 성인들이나 고승(高僧),

경전의 금옥(金玉) 같은 아름다운 말이 많이 있지만

우리가 만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질문에 대한 그 대답이 과거로부터 끌어온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의 그림자인 성경을 보고,

부처를 보는 것이 아니라 부처가 말했다는 경전을 보기 때문이다.

그것은 달이 아니고 강물에 비친 달그림자이다.

고작해야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불과한 것이다.

과거를 현재로 가져와 현재의 판단기준으로 삼기 때문이다.

 

그런 지식으로 가득 찬 마음으로는

천 개의 강물에 비친 달을 설명할 수 있어도

하늘의 떠 있는 달을 보지 않고

진실의 달을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그 달이 무엇인가? 도(道)요, 진리(眞理)다.

선가(禪家)에서 회자하는 부모 미생전(未生前)의 본래 마음이다.

그러니 시심마(是甚麽)? 이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영리한 말은 채찍의 그림자만 보고도 위험을 알지만,

우둔한 말은 송곳으로 찔러도 알지 못한다는 말처럼,

중생의 마음은 과거에 매달려 깨어 있지 못하고

잠들어 있기 때문이다. 마치 3종류의 항아리 같은 사람들이다.

 

@첫째는 뒤집힌 항아리와 같은 사람이다.

귀를 막고, 눈을 감고 있는 사람에게는

그 무엇으로도 들려줄 수 없고 보여줄 수도 없다.

먹고 살기도 힘든데 무슨 황당한 소리를 하느냐고 화를 내는 사람들이다.

둘째는 바닥에 구멍이 나 있는 항아리와 같은 사람이다.

그 항아리는 바닥에 똑바로 놓여있기는 하지만

바닥에 구멍이 나 있다. 그리하여 그 항아리가

가득 채워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일시적일 뿐이다.

물은 곧 새어 나가고 항아리는 텅 비게 된다.

단지 겉으로 보기에만 물이 들어가는 것처럼 보이나

그 항아리는 아무것도 들어가지 않는다.

사이비 철학자요, 지식인, 성직자들이 여기에 속한다.

마치 달을 본 듯 떠들어 대는 사람들이다.

세 번째는 바닥에 구멍도 나지 않고 거꾸로 놓이지도 않았지만,

오물로 가득 차 있는 항아리와 같은 사람이다.

그 항아리에는 물이 들어갈 수 있지만 물

이 그 항아리에 들어가는 순간 그 물은 오염되고 만다.

 

삶은 무어라 설명을 할 수 없다.

종교가나 철학자들이 말하는 모든 설명은 사후약방문이다.

강물에 비친 달을 보고 달을 말하는 것이다.

설명을 한다는 것은 생명력이 없다는 말이다.

설명하기 위해서는 정립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정립된 것은 과거이며 이미 죽은 것이기 때문이다.

 

학식이 있는 사람은 고정관념에 젖어 있어 변화되기 어렵다.

철옹성 같은 벽 뒤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고정관념 뒤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오염된 사람이라고 한다.

마치 오물이 가득 찬 항아리 같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지식은 과거의 것을 정리해 놓은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소리가 아니라 생명이 없는 소리다.

생명력이 없는 것은 죽은 것이다.

그래서 오물(汚物)이라고 한 것이다.

오물로 가득 찬 항아리에 맑은 물을 부어도

흘러나오는 것은 오염된 물뿐이다.

과거에 배워 온 것은 모두 오물이다.

지식은 또한 다른 사람들의 것을 빌려 온 것이다.

경전에서 빌려 오고, 남의 말에서 빌려 온 것이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빌려 온 것은 그 모두가 오물이다.

자기 것이 아닌 그런 지식을 가지고

사람들은 진실을 알지 못하면서도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가식으로 가득 차 있는 마음이다.

그런 지식은 스스로 기만하고 있는 것이다.

가려진 진실이 드러나면 거기에 희망을 걸었던

사람의 마음은 허망하기 그지 없게 된다.

그래서 삶이 공허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현실이라고 여겼던 모든 것이 꿈인 줄 알게 되면

어찌 허망하게 느끼지 않겠는가?

 

한 외도(外道)가 부처님에게 물었다.

「도가 무엇이냐? 진리가 무엇이냐?」 고.

외도란 특별한 지식을 갖춘 사람이다. 지식인이다,

학식이 뛰어난 사람이다.

지식으로 무장된 외도가 부처에게 논쟁을 건 것이다.

그러나 부처는 침묵했다.

논쟁이란 하나의 결론으로 유도하지만 삶은 결론이 없다.

도는 결론이 없다. 결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심마(是甚麽)?

이는 논쟁을 통해서 얻어지는 결론이 답이 될 수 없다.

달을 알고 싶으면 단지 고개를 들고 달을 보면 된다.

천 개의 강과 그 위에 비친 달을 논한다는 것은

무익함을 알기 때문이다. 부처가 무슨 말을 할지라도

외도는 그 말을 자기의 고정관념으로

해석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달마대사도 같은 말을 했다.

「직지인심(直旨人心)」 이라고.

먼 길을 돌아가지 말라. 네 마음을 바로 보면 된다는 말이다

천 개의 강에 비친 달을 찾으려 하지 말고

고개를 들어 바로 하늘을 보라는 것이다.

 

진리란 경전 속에도 없고, 말속에도 없다.

깨끗한 물을 담으려면 항아리 안을 비워야 한다.

항아리를 반듯하게 놓고, 새지 않도록 하고 안을 비워야만

맑은 물을 담을 수 있고, 그 항아리에서 넘치는 물 또한 맑은 물이 된다.

 

삶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의 길은 밖으로 나가 지식으로 무장하고,

갖은 아름알이로 욕망을 채우는 길이다.

마치 항아리에 갖은 오물을 채우듯.

그 항아리는 무엇인가?

현실이라는 항아리다. 에고의 항아리다.

다른 길은 그대 안의 모든 것, 사념, 에고, 관념 등을 비우고

그대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빈 항아리가 되는 것이다.

현실이 아니라 진실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존재의 깊은 오지로 들어가는 것이다.

 

시심마(是甚麽)? 이에 이르는 답을 찾는다면

그 길은 스스로 빈 항아리가 되는 길이다.

 

@사진: 중국 무이산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