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길 현실과 불교 이상(理想)의 괴리

2024. 6. 17. 12:29붓다의 향기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세계의 궁극적인 목적은

여러 가지로 말할 수는 있겠지만 인

간의 본능적인 욕망으로 대별 한다면

곧 5가지의 욕망 즉 오욕락(五欲樂)이요,

그것을 즐기는 오감(五感)의 충족이라 할 수 있다.

오욕(五欲)은 식욕, 색욕, 재물욕, 명예욕, 명예욕을 말하고

오감(五感)은 시각(視覺), 청각(聽覺), 후각(嗅覺),

미각(味覺), 촉각(觸覺)의 다섯 가지 감각을 말한다.

우리가 현실의 삶에서 추구하는 이상은

결국 오욕과 오감에 대한 쾌락을

충족시키기 위한 삶이 되는 것이다.

쾌락은 의타적(依他的)이 아니라

오로지 자아중심적(自我中心的)이기 때문에

이러한 삶은 이기적(利己的)인 삶이 밖에 될 수 없는 것이다.

 

현실을 보자. 월드컵이나, 세계의 유명 음악 축제나

스포츠 경기 또는 영화축제도 그렇고

현재 세계적으로 유행한다는 K-팝, K푸드 등을 추구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겠는가? 이는 모두

오감(五感)의 만족시키기 위한 쾌락인 것이다.

눈을 즐겁게 하고, 귀를 즐겁게 하고, 입을 즐겁게 하고

아름다운 연인과 육체를 즐기고, 재산을 불리고

명예를 추구하는 이것들을 이상적인 삶의 목표로 삼고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 걸음 더 나아가 혹자는 사람 살면서

이런 즐거움과 쾌락이 없다면

무슨 재미로 살겠는가 하고

아예 논쟁의 여지도 두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므로 삶의 목적이 오로지 현실적인

이러한 쾌락의 추구임으로 <내가 누구냐?>하는 존재 의식보다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데 관심이 집중되는 것이다.

 

일례로 매스컴에 떠드는 성범죄 사건들에 대해서만 보드라도

사람들은 나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좀 너무했다는 식으로 여길 정도로

잠시 문제의식을 느꼈다가도 금방 잊어버리게 되는 것도

현실에 대한 이런 가치관에 기인한 것이 아니겠는가?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 종교적인 면에서

천당이나 극락을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는 나이 든 소수 사람의 기복적(祈福的)인 바램이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지 쾌락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죽음이란 심각한 것이라고 인정은 하면서도

그건 당장 오늘의 내 일이 아닌 남의 일이요,

먼 내일의 일이라 치부해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교가 추구하는 이상(理想)과 비교한다면

엄청난 괴리(乖離)가 있는 것이다.

불교의 이상적인 기쁨은 해탈의 기쁨인데,

쾌락이 육감적인 면이라면 불교에서는

정신적인 면 곧, 법의 기쁨이라는 의미에서

환희(歡喜), 희열(喜悅), 법열(法悅)이라고 하는 것이다.

오감(五感)은 오욕(五欲)에서 일어나지만

오감의 바탕은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라는

육근(六根)인데 이것이 곧 오온(五蘊)이요,

<나>라는 존재의 주체인 것이다.

 

불교에서는 이 오온(五蘊)은 사대(四大)의 인연 화합한 것에

불과함으로 실체가 없어 <가아(假我)>라고 보는 것이다.

이는 마치 수천 개의 부속품이 모여

자동차라는 것이 만들어지지만

자동차라는 실체는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인연화합으로 생겨난 것은 무상(無常)한 것이다.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곧 고(苦)가 되는 것이다.

 

<가아(假我)>는 이처럼 지수화풍(地水火風)이라는

사대(四大)가 화합한 것이기 때문에

진아(眞我)가 아닌 것이다. 인연으로 생겨난 이름만 있을 뿐

실체가 없는 허깨비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당연히 이로 인한 오욕(五欲), 오감(五感) 또한

<가아(假我)>가 지어낸 허상(虛像)인 것이다.

허상인 오온은 실상이 아닌 생로병사(生老病死)를

또한 실상으로 여기기 때문에 이것이 고(苦)가 되며,

이 허상의 실체를 깨달아 이런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을

불교는 해탈(解脫)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무엇을 안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인데

이는 마치 붉은 렌즈를 통해 사물을 보면

비치는 모든 것이 붉게 보이듯 그 마음이란 것이

<가아(假我)>의 마음이기 때문에

허망한 마음 곧 망상(妄想)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망상의 마음으로서 <나>라고 여기는 존재가

<허상>임을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를 알 수 있는 것은 망상인 마음이 아닌 방법이 필요한데

그 망상인 마음은 말과 글자에 의존하고 있으므로

그것을 벗어난 방법인 소위 선가(禪家)에서 말하는

불립문자(不立文字)인 명상을 통한 깨달음(覺)인 것이다.

언어에 의한 지식이 아니라 증(證)이라는 의미다.

 

비유하자면 거울은 삼라만상을 다 비추지만,

거울이 자신의 거울을 볼 수 없는 것이다.

그 비추는 거울을 보기 위해서는 다른 거울이 필요한데

그 다른 거울이 바로 명상, 자각(自覺)이라는 거울인 것이다.

그래서 마음으로 마음을 깨치기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말과 글이 아닌 불립문자(不立文字)인

선(禪)이란 고행을 수행자들이 택해 행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나>라고 여기는 <아(我)>가

실체가 없는 <무아(無我)>임을 깨닫는 길이 어렵다는 것이다.

 

애욕에 대한 한 예를 보자, 부처가 법륜을 구르기 시작할 때도

외도들은

「“애욕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저희들끼리 자랑하기를,

'구담(瞿曇) 사문과 바라문들은 항상 미연에 방지하고

장래를 걱정하여서 애욕은 더럽고 부정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아름다운 형상에 취하여

5욕(欲)을 스스로 즐기는 것보다는 못하다.

곱고 부드러운 촉감이 있으니 또한 즐거우니,

무슨 허물이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비방했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방법이나 정도의 차이야 있겠지만 별반 다르지 않다.

애욕이란 인간의 본능적인 오감(五感)의 하나이기 때문에

예나 지금이나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인 이상

어떻게 그 본능을 초월할 수 있겠는가 하고 반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모든 욕망과 쾌락은 실체가 없는 이 몸을

<나>라고 여기는 망상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거짓된 쾌락이다. 다시 말해서 없는 것을 있다고 여기고,

고(苦)를 낙(樂)으로 여기는 망상이기에

이를 극복하고 벗어나야 하는데

이런 관점에서 보면 위의 외도의 이런 주장은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인 해탈과는 당연히 괴리(乖離)되는 것이다.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신의 존재 여부,

만물의 실체와 인간의 실체에 대한

탐구가 시작되어 왔다는 사실은

이러한 것들이 실존적이며 본능적인 문제라

그만큼 난해하고 또한 사람들의 긍정적인 수렴을

끌어내기도 힘들다는 사실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노자의 <도덕경>에서는 하근기(下根機)가

웃지 않으면 도(道)가 아니라고 하듯

석가모니불 역시 화엄경을 보면

처음 깨달음을 얻은 후 이를 사람들에게 알려야 할지 말지를

7일간 숙고했다고 하지 않은가? 쉽게 생각해 보자.

 

“지금 몇 시입니까?” 하고 묻는 사람은 있어도

“시간이 무엇입니까?”라고 묻는 사람이

주변에서 본 적이 있던가?.

그렇듯 우리의 삶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묻지만

<내가 누구지?> 하고는 묻는 사람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잠시 삶에서 한 걸음 물러나 인생을 돌아보고

나를 돌아보면 삶이 달라질 것이다.

예를 들면 환자의 병(病)을 치료하려면

마취제(쾌락)만으로는 임시로 통증은 멈출 수 있지만

치료가 된 것이 아니기에 근본적인 치료를 위해서는

그 병이 무엇인지 알고, 그 병을 일으킨 원인을 찾아야

완전한 치료를 할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 병이 무엇인지를 찾는 것은 실존의 문제요,

그 원인을 밝혀 해결하고 내린 처방이 바로 해탈인데

그 해탈 방법이 증오(證悟)인 것이다.

이를 쉽게 풀이하자면 꿈속에서 이건 꿈이라고

설명하기 어려워도 깨고 난 다음 그것이 꿈인 줄은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듯이 <무아(無我)>라는 이 문제는

실존(實存)의 문제이기 때문에 말과

언어에 의한 논쟁의 문제가 아니라

깨달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지식적인 접근인 혜오(慧悟)가 아니라

이를 벗어난 증오(證悟)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 증오(證悟)의 방법이 바로 선종에서 말하는

불립문자(不立文字)인 선(禪)을 말하는 것이다.

 

이를 종합해 보면 현대인이 추구하는 오욕(五欲)과

오감(五感)의 쾌락을 충족시키려면 무엇인가를 가져야 하는데

즉 소유(所有)해야 하는데 불립문자를 통한 선(禪)을 행하고,

무아(無我)를 증득하고 해탈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말과 글은 물론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하는 것

곧 무소유(無所有)의 길을 가야 하는데

이것이 현대인들이 추구하는 이상과는

서로 상충되기 때문에 여기에 일반인들이

불교에의 접근이 용이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에 선택은 개인의 인식문제가 되겠지만

이를 종교적으로 본다면 현재의 삶을

단순히 이 한 생으로 끝나는 것으로 보느냐

아니면 영원한 삶을 염원하느냐 하는 문제와도 직결되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전자의 삶을 윤회(輪廻)라고 하는 데

이는 고(苦)를 벗어난 영원한 삶 즉 해탈이라고 하는

열반의 길이 아니기 때문에 여기에 도덕적 윤리를 더하여

바퀴가 굴러가듯 인과응보(因果應報)를 따라 생이 이어져 간다는 것이다.

이는 곧 중생의 꿈을 깨는데 너무 깊이 잠들어 있어(無明)

그만큼 긴 시간을 지나야

깨어나게 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선가(禪家)의 말을 빌리자면

거울에 비친 허상인 내 형상을 보는 것도 <나>요,

그 거울을 보고 비친 상이 허상임을 아는 마음도

<나>라는 것을 깨닫는 데 그토록 긴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눈이 펑펑 내려 허리까지 찾는데도

만나주지 않는 달마대사에게 한쪽 팔까지 잘라서 받친

2조 혜가스님의 법에 대한 그 구도심을

어찌 어리석은 중생이 헤아릴수나 있으랴마는

그 어리석은 마음의 바늘구멍만 한 소견으로

《무아(無我)》에 대한 《출요경(出曜經)》에 나온

짧은 이야기한 토막을 그대로 옮겨 본다.

 

“남편이 그림이 그려진 좋은 병 속에 똥을 가득 담고는

그 입구를 튼튼하게 막고 향기로운 꽃가루를 바른 후에 아내에게 말하였다.

‘당신이 나를 매우 사랑하니, 이 병을

마치 나의 몸처럼 잡고서 놀아도 될 것이오.’

아내가 이 말을 따라서 병을 잡고 놀면서 버리거나

여의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남편은 부인이 이 병에 애착하는 것을 보고

곧바로 쳐서 깨트리니, 냄새와 더러운 것이 넘쳐흐르고

벌레들이 기어 나왔다. 남편이 잠깐 있다가 부인에게 말하였다.

 

‘당신은 지금 이 병을 가지고 놀 수 있소?’

아내가 대답하였다.

‘나는 죽을 때까지 끝내 이 깨진 병에는 다가가지 않을 것입니다.’

남편이 말하였다.

‘당신은 이 일만을 보았을 뿐이오.

당신은 내 몸뚱이가 이 병보다 더 심하다는 것을 살피시오.

머리부터 발끝가지 분별하고 사유하면

서른여섯 가지 물건이 있을 뿐이니, 무엇을 탐낼 것이 있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