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길(제1부) 조고각하(照顧脚下)

2024. 2. 18. 21:21붓다의 향기

 

 

조고각하(照顧脚下)란 이 말은 <발밑을 조심하라> 는 의미다.

눈비 내린 미끄러운 길이나

돌밭 너들길을 걸어갈 때

미끄러지지 않도록 발밑을 잘 살피고,

또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잘 살피며 가라는 의미다,

또 높은 계단을 오를 때,

때로는 어두운 밤길을 걸을 때 흔히 듣는 말이다.

그런데 이 평범하고 상식적인 말이

어떻게 선가(禪家)의 보도처럼 회자하고 있을까?

 

『조고각하』란 말은 <종문무고(宗門武庫)>와

<오가정종찬(五家正宗贊)> 등 여러 곳에서 설해져 있다.

임제종의 오조법연(法演) 선사에게는

뛰어난 제자 세 명이 있었다.

세상에서는 이 세 사람을 삼불(三佛)이라고 불렀는데,

곧 불감(佛鑑 불감혜근), 불안(佛眼 불안청원),

그리고 불과(佛果 불과극근) 선사를 가리킨다.

불과선사는 종문제일서(宗門第一書)라고 칭송받는

<벽암록>을 남긴 원오극근 스님을 말한다.

조고각하(照顧脚下)는 오조 선사와

삼불과의 대화에서 비롯된 것으로

선어에서 삼불야화(三佛夜話)의 화두로 회자하게 된 것이다.

 

*​<종문무고>는 대혜종고 선사가

평소 주위 제자들에게 이른 말을 모아놓은 책으로,

대혜선사는 바로 불과(佛果) 즉 원오극근의 제자이니,

종문무고에 실린 <조고각하> 이야기는

대해스님이 직접 스승에게서 들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출전 : 오등회원(五燈會元) 卷第十九 오조(五祖) 법연(法演)

 

도봉산 망월암

삼불(三佛)이 스승 오조 법연(五祖法演) 선사를 모시고

밤에 정자에서 대화하다가 거처(居處)로 돌아가는데

등불은 이미 꺼져 있었다.

법연선사가 어둠 속에서 “각자 한마디씩 말해 보아라.” 하니

불감은

“아름다운 봉황이 노을 진 하늘에 춤을 춥니다.”라 했고,

불안은

“무쇠 뱀이 옛길에 비껴 있습니다.”하고,

불과는

“발밑을 살펴보십시오.”라 했다.

 

오조 법연선사가 말하기를

“나의 종지(宗旨)를 멸할 자는

바로 극근(佛果 圓悟 克勤) 이로구나.”라 하였다.』

불과선사의 말을 극찬한 것이다.

 

原文: 『五燈會元 卷第十九 五祖法演章

三佛侍師於一亭上夜話, 及歸燈已滅。

師於暗中曰; 各人下一轉語。

佛鑑曰; 彩鳳舞丹霄。

佛眼曰; 鐵蛇橫古路。

佛果曰; 看腳下。

師曰; 滅吾宗者, 乃克勤爾』

 

원문에서 말한 ‘看腳下(간각하: 발밑을 살펴보라)’가

‘照顧脚下(조고각하)’로 변이된 것이다.

 

(수락산)

<발밑을 살펴보라> 는 말의 의미를 쉽게 한번 생각해보자.

오조 법연의 질문에 대한 불감선사와 불안선사의 말은

우리네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너무 난해하고,

황당하기까지 하다. 그리고 너무 비약적이고 초현실적이다.

하긴 선어(禪語)가 상식적인 말이나

이해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말이 아니다.

비현실적이고 초현실적이며 너무 난삽한 것이 많아

평범한 일반 중생의 지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그런 경지의 말이 아니다.

 

<발밑을 조심하라> 불과선사의 이 말은 너무나 멋진 말이다.

살아서 펄펄 뛰는 생생한 소리다.

어두운 밤길에 발밑을 조심하라는 이 말은

삼척동자도 알아들을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한 말이다.

어떤 미사여구나 난해한 한 마디 말도 사용되지 않았다.

사유가 개입되지 않은 한치의 수식어가 없는 직설적인 말이다.

깨달은 고승들은 이렇게 번갯불 같은 선어를 뱉어낸다.

죽은 언어를 쓰지 않고 살아 있는 말을 한다.

 

@옛적 밭농사는 거름을 측간의 변(똥)을 이용했다.

가세가 궁한 운문선사가 어느 날 밭에서 거름을 주려고 똥통을 메고

밭고랑 사이에 내려놓고 똥통을 막대기로 휘휘 젓고 있는데

어느 한 중이 불쑥 나타나 운문선사에게 묻는다.

「불법(佛法)이 무엇입니까?」

막대기로 똥통을 젓고 있던 운문선사는 막힘없이 바로 말하기를

「마른 똥 막대기(乾屎橛)이다.」

 

건시궐(乾屎橛) 은 똥 막대기를 말한다.

옛적 사람들이 일을 보고 뒤처리하든 막대기다.

불법(佛法)이 똥 막대기라니.

섬광 같은 예지가 아니라면 이런 말이 나올 수 없을 것이다.

그 순간을 잊어버리고, 그 순간을 벗어나

과거를 생각하고 미래를 생각했다면

더 고상하고 더 심오한 미사여구로 포장할 수 있었겠지만

깨달은 고승은 그렇지 않았다.

그것이 부처의 말이든 고승의 말이든 그것은 죽은 소리다.

생명력이 없는 소리다.

이는 마치 조주 선사의

「차나 들게나」 하는 <끽다거(喫茶去)> 의 선어(禪語)와 같은 소리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 생각해보자.

발밑을 보아야 하는 순간은

어둠 속에서 길을 걷고 있는 지금의 바로 그 순간이다.

내일도 아니고 모래도 아니고 밝은 대낮도 아니다.

어둠 속을 걸어야 하는 바로 지금의 순간이다.

걸어가면서 고개를 들어 위를 보고,

또 저 멀리 앞을 보는 것은

현재가 아닌 미래의 길을 보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지금의 순간이 아니라 미래를 말하는 것이다.

이는 시간의 길고 짧음의 문제가 아니다.

(강화 마니산)

<멀리 보지 말라. 밖은 어둡다.

지금은 다른 것을 생각할 여지가 없다.

지금 바로 네 발밑을 보라.

그렇지 않으면 발을 허딛게 된다> 라는 의미다.

불과선사의 말은 이를 암시하는 것이다.

생명력을 지닌 현실적인 말이다.

이는 우리가 구별하는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의 구별이 아니라

바로 지금의 순간을 의미하는 현실이다.

초현실적으로 과거나 미래를 생각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시간적인 구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둠 속에 길을 걷고 있는 바로 지금의 순간을 말하고 있다.

멀리 돌아가지 말고 바로 그대 마음을 보라는

<직지인심(直指人心)>의 말처럼

바로 선(禪)의 본질을 궤뚫고 있는 말이다.

 

(설악산 울산바위)

 

앞을 본다는 것은 삶의 길에서 보면 욕망이요,

미래에 대한 꿈이다. 우리가 꿈을 꾸는 세계는

미래의 어떤 공간이다. 무엇인가 바램을 찾는 공간이다.

공간이란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 속에서

경계를 구별 짓는 말이다.

공간이 설정되면 나도 있고 너도 있게 된다.

경계가 설정된다. 경계가 설정되면 전체가 아니라

부분으로 나누어지게 된다.

모든 갈등과 시시비비가 여기서 시작된다.

우리가 추구하는 삶의 행복이란 따지고 보면

어떤 공간에 안주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 공간은 현재가 아니라 미래다.

그것은 과거도 아니다. 미래의 공간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삶의 가치와 행복은

지금이 아니라 고개를 들고 쳐다보아야 할

미래에 있다고 착각하고 살고 있다.

 

그러나 삶의 가치든 행복이든 무엇이든

그것이 있는 자리는 지금 이 공간 속이다.

미래가 아니다. 더더욱 과거는 아니다.

욕망은 미래로 인도하지만

삶은 바로 지금 이곳에 있기 때문이다.

실재(實在)는 지금 여기에 있고

꿈은 미래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욕망이란 사람의 마음속에 환영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발밑을 보라는 의미는

미래의 그 어떤 시간이 아니라

지금 바로 그대가 발을 내닫는 현존 하는 이 순간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바로 그 순간 속에 그대가 없다면

삶의 행복과 안전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것은 욕망이 그려내 허상에 불과한 것이다.

 

(도봉산 신선봉 가는 길)

조고각하(照顧脚下)는

지금 어둠 속에서 걷고 있다는 이 순간을 잊어버리고

위를 보고나 또 앞을 보고 가지 말고

걷고 있는 바로 지금의 이 순간을 직시하라는 의미다.

그렇지 않다면 이는 꿈을 꾸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욕망을 품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현재의 순간이 아니라 미래를 향하고 있는 것이다.

조고각하가 의미하는 것은

지금 있는 이 순간에 머물라 있으라는 의미다.

머문다는 말은 곧 깨어 있으라는 말과 같은 의미다.

 

@욕망의 본성이란 자신의 마음속에 환영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욕망은 사념, 관념, 육체의 향락과 만족을 위한 공간을 만드는 길이다.

이 길이 안전할까, 저 길이 안전할까?

이리하면 행복할까, 불행할까.

욕망은 분별을 만들어 내고

그 분별을 그대 자신을 순간에서 벗어나게 하여

타인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방인의 행복이 나의 행복은 아니다.

순간에 머문다는 것은 부분이 아니라 전체적이라는 의미다.

한 생각에 오로지 할 때 그기에 생명력이 생겨나고,

환희가 솟아나기 때문이다.

(수락산 매월정)

 

<발밑을 살펴보라> 는 이 말은

이것저것 살피지 말고 마음이 짓는 환영 속에 메이지 말고,

지금에 이 한순간 깨어 있으라는 의미다.

그 한 순간이 바로 사념이 사라진,

분별이 사라진 절대 빈공간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