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 미생전 본래면목, 이 뭣꼬?란 말의 의미

2023. 7. 22. 23:00선시 만행 한시 화두

 

 

사찰을 순례하다 보면 바위에 이런 글귀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父母未生前本來面目(부모미생전본래면목) 이 뭣꼬?』

 

선가(禪家)에서는 이를 약(略)하여 한자로

「是什麽(시십마)」또는 「是甚麽(시심마)」라고 표현합니다.

「이 뭣꼬?」라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 부모로부터 태어나기 전

나의 본래면목이 무엇인가? 하는 의미가 됩니다.

 

본래면목(本來面目)의 본래(本來)는 처음부터,

원래, 근본 등의 의미로서 천성적이고

자연적인 모습을 지닌 상태를 말합니다.

따라서 본래면목은 인위적인 행위가 가해지지 않은 것으로

시비(是非)가 없고 분별(分別)이 없으며

조작(造作)이 없고 생멸(生滅)이 없이

타고난 그대로의 모습을 말합니다.

그래서 선가(禪家)에서는 본분사(本分事),

본분전지(本分田地), 본지풍광(本地風光)이라고도 말합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본래면목(本來面目)은

이치적으로 처음부터 부처와 중생이 하등의 차이도 없이

완전하게 동일한 모습으로 설정된 것으로

본래청정자심(本來淸淨自心)을 의미하고,

어떤 작위(作爲)나 부작위(不作爲) 이전에 발생해 있는

그 모습인 본래심(本來心)을 의미합니다.

이 경우에 '심(心)'은 심리 현상이 아니라

생명 활동 그 자체를 가리키는

자기의 본래적인 생명 활동이며,

자성 청정한 진실의 사람을 가리키는 본래인(本來人)이고,

본래의 모습은 맑고 적정하다는 것을 가리키는

본래담적(本來澹寂)의 상태를 일컫는 말로써

제법이 본래부터 청정하다는

자성에 대한 속성을 표현한 말입니다.

 

본래면목을 지닌 이 몸, 곧 <나>라는 존재는 어떤 존재일까?

교학에서는 우리 몸을 구성하고 있는 四大(사대)는 空(공)하고,

色受想行識(색수상행식)의 집합체인 五蘊(오온)은

주인이 없다고 말합니다.

<나>라고 하는 주인공이 없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렇다면 현실적인 의미에서,

다시 말해 생물학적인 견지에서 <나>라는 것을 생각해 봅시다.

 

<나>라는 존재는 저 하늘의, 저 무한의 우주와 비교하면

너무나도 작은 존재입니다. 무한대에 비교하면

무한소의 극미한 존재가 됩니다.

그러나 <나>의 육체는 수천만 개의 세포로 구성되고,

그 세포를 구성하는 또 다른 수천만 개의 극미세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생물학자들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의 인체는

7,000만 개의 세포로 되어 있다고 합니다.

7000만게의 세포란 곧 7000만개의

영혼이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리고 그 극미한 세포보다 더 작은 박테리아들이

그 속에 기생하고 있습니다. 찰나에 번식하는 그 박테리아는

하루 동안에도 수천억 만개의 박테리아로 증가합니다.

그들의 눈에는 극미한 <나>라는 존자가

무한대의 우주와 같습니다.

큰 것에 비하면 너무나 적고,

작은 것에 비하면 너무나 큰 존재,

그것이 바로 <나>라는 위치입니다.

<信心銘(신심명)>의 말로 표현하면

「지극히 작은 것은 큰 것과 같아서

그 상대적인 경계가 끊어지고(極小同大 忘絶境界),

지극히 큰 것은 작은 것과 같아서

그 끝과 끝을 볼 수 없다(極大同小 不見邊表)」

라는 말이 됩니다.

 

이렇게 無限大와 無限小에 자리한 영혼들이

까르마의 힘에 의하여 만들어 진 그것이

지금의 <나>라는 존재입니다.

그 세포, 그 극미세포, 그 박테리아와 연관되어 있고,

이 지구와 우주와 삼천대천세계,

그것들 모두가 까르마의 힘에 의하여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 됩니다.

영혼을 지닌 것들이 까르마의 업력에 의해

상호 작용하며, 움직이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화엄이나 법화경의 말을 빌리면

나라는 존재는「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에 존재할 뿐이며「

중중무진(重重無盡)」의 연기 속에 존재하는,

머무는 것일 뿐이라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 이는 고정된 어떤 실체가 아니라

무상(無相)이며, 무아(無我)인 실체가

곧 <나>라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父母未生前 本來面目 是甚麽」란

어떤 실체를 탐구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곧 본래 청정심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됩니다.

그 청정심은 부모로부터 태어나기 이전은 물론

그 이전의 시공간도 벗어나 있기에

본래 청정심이란 말은

부동(不動)의 존재 곧 여래를 의미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청정심이란 현재 과거 미래라는

시공간 안에 있으면서도 시공간을 벗어난 것이기 때문에

한정된 시공간의 경계 속에서만 통하는

언어 문자로서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情識難測」이요 「言語道斷」이라고

禪家에서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父母未生前 本來面目 是甚麽」이란

곧 「本來淸淨自心」이 무엇인가?

「여래가 무엇인가?」하는 질문이 됩니다.

이는 곧 「너의 본래 청정한 마음을 깨달아라.」

라고 하는 의미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