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 운달산 김용사 응진전 석조십육나한상

2023. 6. 23. 19:49국내 명산과 사찰

문경 운달산 김용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直指寺)의 말사로 현재 대웅전을 비롯하여

48동의 전각이 조성되어 있고,

일제강점기 31본산이 시행될 때

제8교구의 본사이기도 했던 김룡사는

문화재로는 보물 2점, 유형문화재 3점, 등록문화재 2점,

문화재자료 1점 등 모두 8점를 보유하고 있다.

이번 포스팅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응진전의 석조 16나한상에 관한 것이다.

 

응진전(應眞殿)은 사찰에서 석가모니를 본존으로 모시면서

그 제자들에 대한 신앙 세계를 함께 묘사한 불교 건축물이다.

대개의 사찰에서는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좌우에 아난(阿難)과 가섭(迦葉)을 협시로 모시고,

다시 그 주위에 16나한상을, 끝부분에 범천(梵天)과

제석천(帝釋天)을 함께 봉안한다.

그러나 때로는 아난과 가섭 대신에

미륵보살과 제화갈라보살(提和竭羅菩薩)을 안치하여

삼세불이 이루어지게 배열하는 경우도 있다.

김용사 응진전은 후자를 따르고 있다.

 

이와 함께 안치되는 십육나한은 수행이 완성되어

이미 성자의 위치에 오른 수많은 아라한(阿羅漢) 중

말세(末世)의 중생에게 그 복덕을 성취하게 하고

정법(正法)으로 인도하게 하겠다는 원(願)을 세운 성자들이다.

이들이 일찍이 많은 영험담과 함께

민간에서 크게 신봉되어 나한 신앙을 형성하게 됨에 따라

사찰 중요 당우의 하나인 응진전에 봉안된 것이다.

수행을 통해 더 이상 번뇌가 새어 나오지 않는 경지에 이르면,

공양받을 만하다고 하여 '응공(應供)'이라 불리는

아라한의 경지가 된다. 아라한을 줄여서 '나한'이라 부르고,

그들은 진리와 하나가 되었다고 하여 '응진(應眞)'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아라한들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기 위해

그 상(像)을 만들어 안치한 전각을 '나한전'

또는 '응진전'이라 부르게 되었다.

후불탱화(後佛幀畫)로는

주로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나

십육나한도가 많이 봉안된다.

 

 

김용사 응진전은 임진왜란 당시

불타버린 것을 다시 지은 전각으로,

전면 3칸, 측면 3칸 다포식 맞배지붕 형태의 건물로

법당에는 목조(木造) 석가여래좌상(3구)을 본존으로

미륵보살과 제화갈라보살을 협시로 봉안하고

삼존불 중심으로 좌우에 석조 나한상(羅漢像 16구)과

제석천(帝釋天 2구), 사자(使者 2구), 동자(童子 1구)를 포함한

24구의 존상이 봉안되어 있다.

삼존불 뒤에는 설법인(說法印)을 한 영산회상도,

나한상 뒤편에는 나한도가 조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 제작 시기와 조각승이 밝혀지지 않은

석가여래삼존불좌상과 동자상을 제외한

20구가 ‘문경 김룡사 응진전 석조 십육나한 좌상 일괄’로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512호로 지정되었다.

@김룡사 대웅전 석가모니 삼존불 좌상의

복장 유물에서 나온 발원문에 의하면

나한상은 1709년 대웅전의 석가삼존상과 함께 조성되었으며,

조각승은 수연, 숭식, 효선, 적행, 여철, 옥징으로 명기되어 있다.

 

@응진전의 주불인 석가모니불은 좌협시로

미륵보살, 우협시로 제화갈라보살을 봉안하고 있는데

<한국 사찰 문화재>의 자료집에는 석조(石造)로 설명되고 있으나

문화재청 설명에는 목조(木造)로 되어 있다.

조성 시기는 나한상과는 같은 시기에 조성된 상이 아니라

17세기 중반에 조성된 상으로 추정된다.

후불탱으로는 설법인을 한 영산회상도가 봉안되어 있다.

이를 통해 경북 도내 일대의 석조불좌상의 제작자와

제작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들로 인정됐다.

 

목조 석가여래 삼존불상 3구, 석조나한상 16구,

제석천 2구 사자 2구, 동자 1구 총 24구를 모셨다고 하는데

현재 동자상 1구는 보이지 않는다.

 

김용사 대웅전의 석가모니불 좌상의 복장 유물인 발원문에 보면

나한 좌상은 수연(守衍) 스님 등이

1709년에 조각했음을 알 수 있다.

나한 좌상에는 그의 스승인 승호파(勝湖派) 양식과

17세기 말~18세기 초 경상북도의 조각 양식이 잘 드러나 있다.

이 나한 좌상의 정확한 제작연대와 조각가가 밝혀져 있고

18세기 초반 경상북도 지역의 불상 조각 상황을 잘 보여주는

지표자료로서 학술 가치가 높은 석조물로 평가되고 있다.

 

응진전의 신중탱

 

@나한상의 배열은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홀수의 나한은 향(向) 좌측,

짝수의 나한은 향(向) 우측에 봉안되어 있다.

제석천과 직부사자는 향 우측에,

범천과 감재사자는 향 좌측에 배치되어 있다.

@응진전 나한상들은 모두 가부좌를 튼 모습을 하고 있으며,

대부분은 양손을 무릎 위에 올린 자세를 취하지만,

염주나 죽비를 쥐고 있어 수행자의 모습이

두드러진 나한상들도 있다.

그리고 해태를 가사 속에 두거나, 봉황 목을 움켜잡아

마치 서수(瑞獸)들을 애완동물처럼

다루는 모습이 형상화되기도 한다.

나한상들 아래에는 보관을 쓰고 홀(笏)을 쥔

제석천 2구와 두건을 쓰고 두루마리를

한 손에 들고 있는 사자 2구가 있다.

좌측 입상은 직부사자이고 바로 옆 홀을 들고 있는 제석척으로 좌상을 하고 있다.

(홀수 쪽 나한상)

좌측 맨 끝에 서있는 입상은감재사자이고 그 옆은 범천으로 홀을 들고 좌상을 하고 있다.

 

 

 

좌측은 감재사자 우측은 범천이다

이상의 16나한상이나 권속들은 주존을 비롯한

석가 삼존불과 모든 부분에서 현격한 형태적 차이점이 있다.

나한상 등에는 조각승 수연(守衍)의 스승인

승호파(勝湖派) 양식에 기반한 1

7세기 말 ~ 18세기 초

경상도 일대의 조각 양식이 잘 드러나 있다.

즉 둥글넓적한 얼굴에 두툼하게 늘어진 귓불 형태,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린 자세

그리고 염주나 봉황을 안고 있는 점 등이다.

 

@승호파(勝湖派)는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까지

경상도 일대에서 활발하게 조각 활동한 화승들을 일컬으며

대표적인 조각가로는 경주를 중심으로 활동한

상륜 스님을 들 수 있다.

 

@십육나한상은 주로 십육나한도에 의거하여 조성한 것이다.

십육나한도는 석가모니의 제자 중 16명의 나한을 그린 그림으로 

석가모니가 열반한 뒤 미륵불이 나타나기까지 열반에 들지 않고

이 세상에 있으면서 불법을 수호하도록

부처에게 위임받은 제자들이다.

부처의 수많은 제자 중 ‘16명’으로

십육나한을 구성하게 된 경위는 아직 명확히 알 수 없다.

 

십육나한 신앙은 당나라 현장(玄獎)이

『대아라한난제밀다라소설법주기

(大阿羅漢難提蜜多羅所說法住記)』를 번역한

7세기 이후 크게 발달하여 당말 오대, 송대에 이르기까지 유행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말세신앙(末世信仰)과 함께 8세기 후반부터

십육나한에 대한 신앙이 성행하여 많은 작품이 제작되었다.

그중 조선 후기 나한도의 대부분이 십육나한도이다.

 

조선 후기 십육나한도는 대체로 나한을 모시는 전각인

응진전이나 나한전에 봉안되었으며,

사찰 내 나한전이 없는 경우는 대웅전이나 미타전,

칠성각이나 삼성각 등에 봉안되기도 하였다.

보통 내부 중앙의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홀수의 나한도는 향(向) 우측,

짝수의 나한도는 향(向) 좌측에 봉안된다.

 

[자료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십육나한도(十六羅漢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