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 운달산 김용사(金龍寺) 제2부
2023. 7. 1. 16:38ㆍ국내 명산과 사찰
문경 운달산 김용사 제1부에 이어 제2부에는
김용사의 전각 뒤편에 조성되어 있는 석불과 삼층석탑,
그리고 명부전을 위주로 살펴본다.
우리나라의 사찰은 신라 때부터 비보사찰(裨補寺刹)이 많았다.
조선의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하에서도
선정된 자복사찰(資福寺刹) 또한 그러하다.
왕실의 지원을 받으면 당연히 국운의 융창과 왕실 보호가 따랐다.
이는 분명 풍수지리의 이점을 살려
사찰 자체의 번영을 위함은 아니었다.
그런데 김용사의 석불과 삼층석탑에 대해서는
매우 흥미로운 기록이
『운달산김룡사사적(雲達山金龍寺事績)”』 에 드러나 있다.
“……기축(己丑, 1709)에는 영산전 앞에 극락전을 세웠으며
왼쪽에는 한산전을 건립고 오른쪽에는 원통전을 건립하였으니
이들 또한 모두 여러 스님이 창립하였다.
석탑(石塔)과 석상(石像)을 그 뒤쪽에 세워
혹은 선익(蟬翼)을 눌러주고 혹은 촉맥(促脈)을 비보 하였다.
그 아래에 또 상실과 중신의 두 요사가 있으니
이들도 모두 설잠 스님이 완성을 보았다.”
*선익(蟬翼) 풍수에서 매미의 날개처럼 좌우에서 혈장을 감싸주는 구릉
*촉맥(促脈) 풍수에서 기운이 손상된 맥
이로 보아 김용사의 삼층석탑과 석불은
왕실 보호가 아닌 풍수지리에 의한
사찰의 비보(裨補)를 목적으로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일반 사찰의 석불 조성과 비교하면
목적이 다른 것이다.
김용사 석불입상: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655호
김룡사의 석불입상은 자연석을 돌기둥 모양으로 깎아 만든
돌부처이지만 입체감은 없다.
광배는 없고 전신부와 대좌가 조성되어 있다.
얼굴은 후박하게 둥근 형태이며 나발(螺髮)과
삼각형으로 뾰족한 육계(肉髻)가 부조되어 있다.
수인(手印), 옷 주름 등 전신(全身)이 매우 얕고
투박하게 부조(浮彫)되었으나
얼굴만 비교적 자세하게 표현되어 있다.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서 그런지 전신에 이끼가 끼어 있고,
분명하지는 않지만, 약사여래와 같이 왼손에
무엇인가 들고 있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대좌는 상대와 중대만 조성되어 있다.
옆에는 석등이 보인다.
상대는 앙련(仰蓮)이 중대는 팔각방형으로
보살, 나한상이 부조되어 있다.
1725년에 출간된『운봉사사적(雲峰寺事蹟)』에 의하면,
서쪽 계곡 건너에 있는 석탑과 함께 풍수사상에 입각하여
1709년에 조성된 것으로 확인된다.
조선시대 대부분의 민불처럼
투박한 조형성을 특징으로 보이고 있지만,
1709년이라는 제작연대를 알 수 있고
김룡사의 풍수적 약점을 비보(裨補) 하려는 목적 등이
사적기에 기록되어 있어
당시 시대 상황을 알 수 있다는 관점에서
학술적인 가치가 있다고 평가되고 있다.
삼층석탑;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668호
김룡사 삼 층 석탑은 응진전의 북동쪽 상부에
자연석으로 이루어진
석축 위에 있다. 1709년에 지덕(地德) 비보를 위해
석불입상과 함께 조성된 비보사탑(裨補寺塔)이다.
비보사탑은 대개 통일신라 시대와 고려시대에
국운 융성과 왕실 보호를 위해 집중적으로 조성되었다.
조선 후기에 풍수적 지덕 비보를 위해
김룡사처럼 탑과 불상을
동 시기에 함께 조성한 예는 그리 많지 않다.
이 탑의 전체 높이는 2.85m로, 단층 기단부와 3층 탑신부
그리고 상륜부로 구성되어 있다.
1층 탑신석 남면에는 삼층석탑의 가장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방형의 틀을 파서 불상을 새겼다. 2층 탑신부 이상은
탑신석 체감이 적으나, 옥개석 체감은 매우 큰 편으로
일정한 체감률을 보여 주지는 않는다.
전체적으로 기단부에 비해 탑신부의 너비가 좁은 편이어서
가늘고 긴 느낌이 든다.
김룡사와 관련된 자료 중 <김룡사사적>에 의하면
1709년 삼층석탑과 석불 등을 조성하였다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김룡사 삼층석탑은 양식적으로는 그 가치가 미미하지만,
조선 후기 석탑의 연구가 거의 전무한 상황에서
절대적 편년의 기준을 제시한 점에서
비보 사찰의 연구에 좋은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명부전:
김룡사 명부전 내의 불단은 'ㄇ'자형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지장보살 삼존상을 비롯하여 시왕상, 판관, 사자,
인왕상 등 총 21구의 목조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목조 지장보살 삼존상 및 제상 21구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85호로 지정되어 있다.
높이는 지장보살좌상(본존) 88㎝, 도명존자(좌) 134㎝,
무독귀왕(우) 124㎝.
김룡사 명부전에는 목조 지장보살 삼존상 외에도
시왕상 및 하부 권속들을 포함한 21구의 존상들이 봉안되어 있고,
동자상들 4구는 현재 직지사 성보박물관에 있다.
무독귀왕 내부에서 발원문이 발견되어
이 불상들이 1714년(숙종 40년)에 제작된 사실이 확인되었다.
내용 및 특징
김룡사 명부전은 사찰의 중심 권역에서 동편으로 떨어진
별도의 공간에 자리하고 있다.
사찰에 전하는 기록에 따르면
명부전은 1714년에 담유(曇裕)와 탁밀(卓密)에 의해 중창되었다.
명부전에는 나무로 만든 지장 삼존상(3구), 시왕(10구),
귀왕상(2구), 판관상(2구), 사자상(2구), 인왕상(2구)이
⊓모양의 불단에
좌우대칭으로 봉안되어 있다. 명부전에서 시왕의 배치는
통상적인 방식대로 향 우(向右)측에 1·3·5·7·9의 홀수 대왕을,
향좌(向左) 측에 2·4·6·8·10의 짝수대왕을 두었다.
결가부좌 한 지장보살좌상은 양손을 무릎 위에 올린 모습이다.
양손은 같이 엄지와 중지를 맞댄 수인을 결하고 있다.
지장보살은 둥글고 넓적한 얼굴에 두툼한
귓불을 가진 모습으로 조각되었다.
반개한 눈은 정면을 바라보고 있어 예배자들과
직접적인 시선 교환이 이루어질 수 있다.
눈썹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진 콧대는 반듯하고
콧날은 오뚝하다.
얇은 입술의 양 끝을 살짝 올려 옅은 미소를 짓고,
턱도 두툼하여 엄숙하기보다는
전반적으로 부드러운 인상을 풍긴다.
지장보살좌상은 승각기, 편삼과 대의를 걸친
전형적인 조선 후기 불상 착의법을 따른다.
승각기와 전신을 덮는 대의 자락을
모두 간결한 선으로만 처리하였다.
특히 복부 부근에 좌우대칭을 이루는
‘W’ 형태의 옷 주름이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다.
좌우 협시인 도명존자·무독귀왕을 비롯한 권속들의 상호 표현은
지장보살좌상과 거의 같지만, 지물이나 착의 형식은
각각의 성격에 따라 달리 표현하였다.
젊은 승려 모습으로 표현된 도명존자는
가사와 장삼을 걸치고 합장하였고,
무독귀왕은 양관(梁冠)을 쓰고 붉은색 단령포를 입고
보함을 들고 있는 모습이다.
무독귀왕과 유사한 옷차림의 시왕상은 의자에 앉아
홀을 받쳐 들거나 책을 펼쳐 보고 있는 모습이다.
시왕상은 표정이 없거나 미소를 짓거나
못마땅한 표정을 짓는 등 다양한 상호로 조성되었다.
하부권속은 귀왕, 판관 사자상들이 두 구씩 남아있다.
귀왕은 시왕들과 같은 양관을, 판관은 복두(幞頭)를 쓰고
양손에 두루마리를 들고 있다.
귀왕과 판관은 시왕의 판결을 돕는 하부 권속들로
시왕도나 경전의 변상도에 주로 시왕 주위나 뒤에 배치된다.
불단 아래에는 장군상과 사자상이 각각 대칭으로 배치되어 있다.
투구와 갑주를 두른 장군상은 한 손을 들어
내려칠 듯한 자세로 조각되었고, 향좌 측에 있는 사자는
지물로 창을 들고 있다.
현재 직지사 성보박물관에 봉안 중인 4구의 동자상들은
해태 형상의 서수(瑞獸)와 노는 모습,
벼루를 들고 있는 등 다양한 모습으로 조각되었다.
김룡사 명부전 무독귀왕에서 발견된 발원문에는
명부전 존상들의 제작 시기가
1714년(숙종 40)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불상들을 조성했던 조각승 집단에 대한 언급은 없다.
김룡사 명부전 목조 지장보살 삼존상과 시왕상 등은 임진왜란 이후
전국적으로 활동하는 조선 후기 조각승 집단의
불상 조성 경
향을 반영하는 존상이다. 무독귀왕에서 발견된 발원문에는
존상을 조성한 승려 이름이 기입되는 연화질(緣化秩)이 없어
조성에 참여했던 조각승은 알 수 없다.
하지만 명부전 화주인 탁밀을 통해 김룡사 명부전에 관여했던
조각승 집단이 단응·탁밀에 속한 조각승들로 추정할 수 있다.
단응과 탁밀 집단이 조성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명부전 존상들은 의성 고운사(1670년), 안동 광흥사(1692년),
문경 대승사(18세기)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자료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고운사 명부전 지장보살 삼존상
문경 대승사 명부전
상선원(上禪院)
김용사는 선방(禪房)으로 이용되는 전각이 유달리 많이 보인다.
상선원도 그중 하나다.
현재 출입이 통제되어 있어 안을 볼 수가 없었는데
상선원의 주련이 눈길이 끈다.
이에 대한 명료한 해설이 법보신문에 나온 것이 있어
이번 기회를 통해 옮겨본다.
주련(柱聯)
摧殘枯木倚寒林 (최잔고목의한림)
幾度逢春不變心 (기도봉춘불변심)
樵客遇之猶不顧 (초객우지유불고)
郢人那得苦追尋 (영인나득고추심)
앙상한 고목이 차가운 숲에 의지했나니
몇 번이나 봄을 만났으나 변심하지 않았노라.
나무꾼도 이를 보고 본체만체하거늘
초(楚)나라 사람이 무슨 일로 애써 찾는가.)
김룡사 상선원의 편액은 조선 후기에 전서(篆書)로 써진 글씨로
고졸(古拙)한 멋이 있다.
주련은 ‘경덕전등록’ 권제7
명주대매산법상선사(明州大梅山法常禪師)편을 비롯하여
여러 선문어록에 실려 있다. 흔히 고목게(枯木偈)라고 한다.
대매법상(752~839) 선사는 마조도일(馬祖道一)의 제자로
절강성 대매산으로 들어와 40여 년 은거하며 수행하였다.
당시 염관제안(鹽官齊安 ?~842) 스님 밑에 있던 어떤 스님이
대매산에서 주장자 할 만한 것을 구하러 다니다가
길을 잃고 암자까지 와서 물었다.
“화상(和尙)께서는 얼마 동안, 이 산에 계셨습니까?”
선사가 답하기를
“다만 온산이 푸르렀다 누레졌다 하는 것을 보았을 뿐이다.”
또 묻기를 “산을 벗어나고자 한다면 어느 쪽으로 길이 있습니까?”
“흐르는 물을 따라가라”라고 하였다.
그 스님이 염관 스님을 만나 대매산에서
어떤 스님을 만난 일을 이야기하였더니
“내가 강서(江西)에 머물 때 스님 한 분을 만난 후로
소식을 몰랐는데 혹시 그 스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스님을 보내서 혹시 그 스님이 아닌가 여쭈었더니
법상 스님은 주련에 걸린 게송으로 답했다.
최잔고목(嶊殘枯木)의 의미는 무엇일까?
속세에서는 말라서 죽어버린 나무가 꺾여진 모습을 말하지만
여기서는 체로금풍(體露金風)과 같다.
‘벽암록(碧巖錄)’ 제27칙에 보면 다음 구절이 있다.
“어떤 납자가 운문문언(雲門文偃) 선사에게 물었다.
나무가 마르고 잎이 떨어졌을 때는 어떻습니까?
운문 선사가 대꾸하기를 체로금풍이라고 하였다.”
동풍(東風)을 봄바람이라 하듯 금풍은 가을바람이다.
수행의 경지가 깊어져 감정의 물기가 싹 마르고
관념이 춤추는 것을 나뭇잎에 비유하였다.
감정과 관념이 모두 공(空)하여
그 본지(本旨)만 올곧게 드러난 것이다.
금풍은 청풍(淸風)이다. 따라서 최잔고목은 알음알이가
모두 떨어져 나간 모습이다. 의한림(倚寒林)에서 한림은
겨울의 잎이 떨어진 숲이다. 겨울 숲에는 아무것도 자랄 수 없다.
이를 불이 꺼진 차가운 재에 비유하여 냉회(冷灰)라고도 한다.
한림에 새싹이 돋아날 수 없고 불이 꺼진 차가운 재에
불이 다시 붙을 수 없으므로
망정(妄情)과 망상(妄想)이 일어나지 않는 경지다.
기도봉춘(幾度逢春)은 고목봉춘(枯木逢春)과 같다.
고목은 무심의 경지를 비유하여
고요함의 극치를 노래한 것이다.
선교(禪敎)에서 무심을 고목에 비유하는 것은
무심해야 본심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고목은 불성(佛性)을 말한다. 봄이 되면 만물이 싹을 틔우고
잎이 돋는 등 변화가 있지만
그 본체인 나뭇가지는 체로금풍 그대로다.
어찌 우리의 본심이 변하겠는가?
수행자는 외경(外境)에 흔들리거나 유혹되면 안 된다.
초객(樵客)은 나무꾼으로 세속과는 거리를 둔
은자(隱者)를 지칭한다.
초객은 곧 선객(禪客)이다.
나무꾼도 본체만체한다는 것은
경계에 맞닥뜨려도 부동심(不動心)한다는 것이다.
마지막 구절은 ‘장자’ 잡편 가운데
서무귀(徐無鬼)에 나오는 내용을 인용하였다.
영인(郢人)의 영(郢)은 초(楚)나라의 서울로 초나라를 말한다.
또 여기서 영인은 염관제안 선사다.
흐르는 물을 따라가라는 것은 발밑에 길이 있음이다.
스스로 알아차려야 비로소 얻었다고 하는 것이다.
‘장자’의 영인 이야기를 살펴보면
“초나라 사람이 코끝에 백토(白土)를 얇게 바르고
장석(匠石)에게 깎아 내달라고 하자
장석이 도끼 바람 소리가 날 정도로 휘둘러
백토를 다 깎아 내었지만,
코끝은 멀쩡했다”라고 한다.
이는 지기(知己)를 말한다.
선종에서 지기는 곧 견성(見性)이다.
출처 : 법보신문(http://www.beopbo.com)
법상 스님 김해 정암사 주지 /bbs465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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