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설정업장경(佛說淨業藏經)의 불이법문(不一法門)
2022. 10. 18. 20:57ㆍ경전과교리해설
불설정업장경(佛說淨業藏經)의 불이법문(不一法門)
여시아문(如是我聞)을 서두로 시작된 이 경은
무구광여래와 보월여래의 전생인 무구광(無垢光)보살과
용시(勇施)보살의 전생담을 빌어 음행(淫行)과 살인에 대한
업장을 정화하는 것을 주 내용으로 편찬된 것으로
이번 포스팅은 본 경의 내용 중 불이법문 위주로 편집했다.
부처님께서 비사리(毘舍利)의 암라수원(菴羅樹園)에 머무실 때
무구광(無垢光)이란 비구가 있었다.
어느 날 비사리성 어느 마을로 탁발을 하러 나갔다.
탁발은 수행의 한 방편으로 탁발을 함에도 두 가지 불문율이 있다.
하나는 부자나 빈자의 집을 가리지 않아야 하고,
둘은 한 마을에서 탁발을 받지 못하더라도
이웃 마을로 가서 탁발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무구광비구는 비사리성 한 마을에 들어가서 여러 집을 탁발하다가,
마지막으로 들린 곳이 불행해도 음녀(淫女)의 집이었다.
지금의 말을 빌리면 음녀(淫女)는 창녀(娼女)를 의미한다.
잘 생기고 준수한 청년 무구광비구를 보자
음녀는 흑심이 생겨 갖은 교태를 부리며
유혹했지만 무구광비구는 거절했다.
음녀는 자기 청을 들어주지 않으면
목숨까지 버리겠다고 협박했지만
무구광비구는 그것까지 받아드리지 않자
생각을 바뀌어 예까지 탁발을 나왔으니
그러면 공양만이라도 지어 올리겠다고 하자
무구광비구는 거기까지는 거절할 수 없어 음녀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 음녀는 밥을 지어 올리면서 밥에다 환각제를 타서
무구광비구의 의식을 흐리게 하여 뜻하는바 소원을 성취했다.
비몽사몽(非夢似夢) 간이라 기억이 아련한 상태로
음녀가 준 공양을 받아들고 정사에 돌아와 의식을 차리고 보니 후회막급이다.
비구가 자의든 타의든 간에 음행을 저질렀으니
율법에 가장 무거운 바람이 죄를 범한 것은 분명한 것이다.
“나는 이제 마땅히 남의 신시(信施)를 받을 수도 없구나.
이제는 파계한 사람이니 마땅히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라고
비탄에 빠지자 같이 수행하던 한 도반이 보다못해 부처님에게 다리고 갔다.
부처님은 무구광비구의 음행의 자초지종을 들은 후 무구광비구에 묻는다.
“너에게 본래 불음계를 범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느냐?”
“아니옵나이다.”
부처님께서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본래 마음이었는데 어떻게 범하였느냐?”
비구가 대답하였다.
“제가 나중에는 결국 욕심을 내었나이다.”
(처음에는 그럴 마음이 없었지만, 환각제로 인하여
자신도 모르게 음심이 일어났다는 의미다.)
“비구여, 이처럼 마음으로 음욕(婬慾)을 범하였느냐?”
“그러하옵니다.”
부처님께서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항상 마음이 더러우므로 중생이 더러운 것이요,
마음이 청정하므로 중생이 청정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더냐?”
“그러하옵니다.”
부처님께서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네가 일찍이 꿈속에서
음욕을 받을 때 마음이 깨달아 아느냐, 모르느냐?”
(꿈은 진실이 아니지만,
꿈속에서 행하는 행위에는 마음이 있지 않았냐 하는 의미다)
“깨달아 아나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음욕을 범할 적에 어찌 마음으로 말미암아
깨달아 안 것이 아니겠느냐?”
“그러하옵니다.”
“만약 그렇다면 비구여, 생시나 꿈에나
음욕으로 범하는 것이 무슨 차별이 있겠느냐?”
“생시나 꿈에나 음욕을 범하는 것은 차별이 없나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내가 이전에 일체 모든 법이 다 꿈과 같다고 하지 않더냐?”
“그러하옵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꿈과 같은 모든 법이 진실이겠냐?”
“아니옵니다.”
“비구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생시나 꿈의 두 마음이 모두 진실이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비구야, 만약 진실이 아니라면, 이것이 있는 법이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비구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있는 바가 없는 법이 생함이 있겠느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비구여, 만약 법에 생함이 없다면 멸함이 있고,
얽힘이 없이, 해탈이 있겠느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비구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생함이 없는 법인데,
마땅히 아비지옥ㆍ아귀ㆍ축생 가운데에 떨어지겠느냐?”
“세존이시여, 생함이 없는 법은
오히려 있는 바도 없거늘 삼악도에 떨어짐이 있겠나이까?”
“비구여, 일체 모든 법의 본 성품은 청정한 것이다.
그러나 모든 범부는 어리석고 작고 무지(無智)하여서
있음이 없는 법이 진여(眞如)임을 알지 못하므로
헛되이 분별을 내고, 분별하기 때문에 삼악도에 떨어지느니라.”
다시 말씀하셨다.
“비구여, 모든 법은 참되지 않으면서도
갖가지 지은 것을 드러내고, 탐욕ㆍ진에ㆍ우치ㆍ범부 등에
집착하기 때문에 범부 등이 모든 법을 분별하지만,
여여(如如)하지 않으므로 이것은 진실이 아니니라.”
부처님의 이 설법을 요약하면 모든 것은 공(空)하여
그 실체가 없는 것으로 진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법은 염오(染汚)와 애착(愛着)이 없고,
더러움이 없어 일체 번뇌가 일어날 수가 없는 것인데
현실 속에서 일어나는 일체의 그런 행위는
중생의 무지로 인한 색심이나, 탐욕이라는
그런 분별심에 기인한 것으로 허망한 분별일 뿐이란 것이다.
그러므로 생시의 행도 진실이 아닌데
하물며 약물에 의하던, 과실로 인하던 꿈속에서 벌어지는 것들이
어찌 진실된 법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다.
이는 수행자는 업의 장애로 번뇌에 빠질 것이 아니라
법의 실체 곧 무상대도를 체득함에 있다고 암시한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고찰해 볼 점은
고의나 과실에 의한 형법상 죄의 유무를 논증하는 것이 아니라
법의 실체를 어떻게 말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 경에서는 용시비구의 전생담도 설해지고 있다.
용시비구는 무구광비구와는 반대로 탁발을 나갔다가
자기에게 연정을 품은 한 여인의 상사병을 치료하다가
빈번한 방문으로 결국 음행을 저지르게 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음행을 감추기 위해
그의 남편까지 살인하게 되었는데
이 두 비구의 공통점은 중생의 구제였지만
결과는 음행을 저질러게 되었다는 것이다.
차이점은 무구광비구는 약물에 의한 타의에 의한 것이고,
용시비구는 자의적이며 고의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두 비구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은 꿈속에 지은 것이나,
생시(현실)에서 지은 것이나 이는 모두
허망한 중생의 마음에서 야기된 분별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분별심은 법의 참모습을 가리는 장애 때문이라는 것이다.
(용시비구에 대해서는 본방 증도가 제118구 참조)
이어서 부처님은 장애에 대해 말씀하신다.
@“문수사리여, 대체로 장애라고 하는 것은 탐욕(貪欲)이 이 장애요,
진에(瞋恚)가 이 장애요, 우치(愚痴)가 이 장애며,
보시(報施)가 이 장애요, 지계(持戒)가 이 장애요,
인욕(忍辱)이 이 장애요, 정진(精進)이 이 장애요,
선정(禪靜)이 이 장애요, 지혜가 이 장애며,
부처님 생각(佛想)이 이 장애요, 법 생각(法想)이 이 장애요,
승생각(僧想)이 이 장애며, 공상(空想)이 이 장애요,
무상상(無想想)이 이 장애요, 무행상(無行想)이 이 장애요.
불생상(不生想)이 이 장애니라.
그리고 그 장애의 이유를 설명하신다.
“일체의 모든 법의 성품에는 장애가 없지만,
모든 범부가 어리석고 작고 지혜가 없어서 스스로 분별을 내어서
보시ㆍ지계ㆍ인욕ㆍ정진ㆍ선정ㆍ지혜에 장애를 만드느니라.
왜냐하면, 문수사리여, 모든 어리석은 사람은 보시를 할 때
아까워하는 중생에게 공경심을 내지 않고,
공경하지 않으면, 진심(瞋心)을 내며,
진심 때문에 큰 지옥에 떨어지느니라.
자신이 계를 지키면 계를 범한 자를 보고는 가벼이 여기고 업신여기고,
그의 허물을 말하여 남으로 하여금 듣게 하며 공경을 하지 않나니,
공경하지 않기 때문에 악취(惡趣)에 떨어지느니라.
자신이 인욕을 닦으면, 그 인욕 때문에 교만한 마음이 생겨서
‘나는 인욕을 한다, 사람들은 추악하다’라고 하나니,
이러한 인욕은 방일(放逸)을 낳는지라,
곧 이것이 모든 죄의 근본임을 알지니라.
자신이 정진하면 해태한 자에게 이러한 생각을 하느니라.
‘저러한 어리석은 인간은 마땅히
남이 믿음으로 베푸는 공양을 먹지 않아야 한다.
내지 한 모금의 물도 받을 수 없다’라고 하느니라.
이리하여 항상 제 몸을 추켜세우고 남을 깔보나니,
마땅히 알라, 이러한 무리는 어리석고 작고 무지하니라.
스스로 선정을 행하면,
생각이 어지러운 자를 보고 이와 같은 생각을 하느니라.
‘나는 항상 정을 닦는다, 나머지 비구들은 모두 산란한 마음이 많고,
사론(邪論)을 설한다. 이러한 사람은 도(道)에서 거리가 멀다.
그러니 어떻게 능히 부처를 얻으랴’라고 하느니라.
이러한 생각을 지을 때 곳에 따라서 생각을 일으키는데
한 생각이 한 겁이 되어 생과 사를 받나니,
생ㆍ사를 받고 나서야 비로소 다시 보리의 도를 닦느니라.
스스로 많이 들은 것을 믿고,
이름이 없는 법에 참되지 않은 지혜로 망령되이 분별을 내며,
얻은 바가 있음을 보면 큰 교만을 일으키는,
이러한 무리를 나는 크게 우치하여 지혜가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노라.
모든 각(覺)으로 덮이면, 이것은 대인(大人)이 아니니라.
비록 또 대승의 길을 구하더라도,
‘나는 마땅히 세상에서 가장 뛰어날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서
성문(聲聞) 소승인 사람을 공경하지 않고 깔보고 업신여기어서
그 허물을 말하면, 그는 악한 마음으로
거친 말을 한 것 때문에 악취에 떨어지느니라.”
그리고 이어서 일체의 법에 마음이 장애가 없이
청정을 얻을 수 있는 법문을 말씀하신다.
곧 불이법문(不二法門)이다.
불이법문의 대표적인 경전은 <유마경>의 ‘입불이법문품’을 꼽는다.
불설정업장경의 이 법문은 <유마경>의 ‘입불이법문’과 맥을 같이 한다.
“만약 보살은 탐욕이 일체법임을 관하면
이것이 곧 모든 업장을 정화(淨化)하는 것이니라.
또 문수사리여, 만약 보살이 모든 오욕(五欲)에 애착하거나
즐거워하지 않고 또한 놓아버리지도 않으며,
욕(欲)의 실성(實性)이 곧 이 불법이라고 관하면
이것이 곧 업장을 정화하는 것이니라.
또 문수사리여, 만약 보살이 오개(五蓋)에서 보리를 구할 적에
그와 같이 관할 때, 오개 및 보리를 얻을 수 없게 된다면,
이것이 곧 모든 업장을 정화하는 것이니라.
또 문수사리여, 만약 보살이 구뇌법(九惱法)이
곧 인자한 마음인 것으로 관하고,
구뇌법을 사유(思惟)ㆍ관찰할 때
타인과 제 몸(己身)을 얻을 수 없게 된다면
이것이 최상의 자비이니 모든 법에 얻는 바가 없기 때문이라,
보살이 인(忍)을 관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이하면
이것이 곧 모든 업장을 정화하는 것이니라.
@九惱(부처님이 생전에 겪은 9가지 수난)
⓵淫女: 손타리에게 비방을 받음
⓶전처바라문녀에게 비방을 받음
⓷제바달다에게 엄지발가락의 상처를 입음
⓸나무에 다리를 찔림
⓹毘樓璃王(비루리왕)으로부터 두통을 앓음
⓺아사달다바라문 때문에 馬麥을 먹음
⓻찬 바람으로 인하여 등(背)를 앓음
⓼成道前에 6년간 고행
⓽바라문 마을에 들어가서 밥을 얻지 못함
또 문수사리여, 만약 보살이
범계(犯戒)가 곧 이 범함이 아닌 것으로 관하고
비니(毘尼: 율법) 아닌 것을 곧 이 비니로 관하며,
얽매임을 곧 이 해탈로 관하고,
생사가 곧 열반계(涅槃界)로 관하면
이것이 곧 모든 업장을 정화하는 것이니라.
또 문수사리여, 만약 보살이 탐욕의 세계가 곧 열반의 세계요,
진에(瞋恚) 와 우치(愚痴)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관하면
이것이 곧 모든 업장을 정화하는 것이니라.
또 문수사리여, 만약 보살이 일체의 법이 곧 불법이라는 것을 관하면
이것이 곧 모든 업장을 정화하는 것이니라.
또 문수사리여, 만약 보살이 일체의 법에는 체상(體相)이 없고
또한 근본이 없다는 것을 관하면
이것이 곧 모든 업장을 정화하는 것이니라.
또 문수사리여, 만약 보살이 간탐과 보시를 관하되
둘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고,
지계(持戒)와 훼계(毁戒)가 둘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으며,
진에와 인욕이 둘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고,
해태와 정진이 둘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으며,
어지러운 마음과 선정이 둘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고,
우치와 지혜가 둘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으면,
이것이 곧 모든 업장을 정화하는 것이니라.
또 문수사리여, 만약 보살이 모든 번뇌가 곧 이 불법임을 관하면
이것이 곧 모든 업장을 정화하는 것이니라.”
이 설법은 어설픈 알음알이 지식으로 이해하기 난해하다.
정(正) 반(反) 합(合)의 경계를 초월하고,
또한 대승불교 보살행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육바라밀의 가르침과도 상치(相馳)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 경에 따르면 악마의 왕 파순도 이 법이 섬뜩하여
부처님께 이 법을 설하지 말 것을 요청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정녕 불이법문(不二法門)의 실체가 무엇일까?
과거칠불의 마지막 부처인
제7존 釋迦牟尼佛 (석가모니불)의 게송이 떠오른다.
法本法無法 (법본법무법)
無法法亦法 (무법법역법)
今付無法時 (금부무법시)
法法何會法 (법법하회법)
법은 본래 무법이다.
무법이란 법도 또한 법이다.
이제 무법을 부촉할 때에
(두 법의) 어느 법을 두고 법이라 화통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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