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4. 25. 21:06ㆍ경전과교리해설
세상 엿보기 아난칠몽경(阿難七夢經)
아난칠몽경(阿難七夢經)은 동진(東晋 317~420))의 제9대 황제 효무제(孝武帝: 재위 376~396년) 때
천축삼장(天竺三藏)인 담무란(曇無蘭)에 의해 한역된 1권 458자의 작은 경이다.
이 경의 내용은, 부처님께서 사위국의 보회강당(普會講堂)에서
바사닉왕(波斯匿王)에게 4제(四諦)를 설하고 계실 때
아난이 일곱 가지 꿈을 꾸고 부처님을 찾아와 꿈의 내용을 풀이해 달라고 청하자,
부처님께서 아난의 꿈을 차례로 설명한 것이다.
(화순 쌍봉사의 아난과 가섭존자상)
꿈 해몽으로 전개되는 이 경의 내용이 마치 그 시대나 현시대 상황을 예견이나 한 듯 하다.
번역자인 담무란은 초기 잡밀교 경전인 대관정신주경(大觀頂神呪經), 청우주경((請雨呪經),
기기병경(時氣病經)을 백시리밀다라와 함께 공저한
천축의 승으로 알려져 것 외에는 별도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축무란이 한역본이 출간한 시기는 진(晉)의 제9대 황제 효무제(孝武帝) 시대인데
백제에 불교를 전한 천축승 마라난타가 동진에서 건너온 시기도 백제 침류왕 원년(384년)이니,
동진의 왕조로 보면 효무제(재위 373~397년) 재위 시대가 된다,
이때에는 격의불교(格義佛敎)가 융성한 때였고, 동진은 불교를 숭상한 나라였다.
특히 동진의 효무제는 불교에 심취한 황제였지만, 정사를 돌보지 못하고,
후일 주색에 빠져 불운한 죽음을 맞은 황제이기도 하다.
그래서 경전의 일반 양식을 빌어서 해몽이란 콘텐츠로
이 경(經)을 지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동진(東晉)의 역사를 보면.
(주가각)
효무제(晉 烈宗 孝武皇帝 司馬曜, 362년 ~ 396년)는 중국 동진의 제9대 황제로 자는 창명(昌明)이다.
어린 나이에 보위에 올라 태후의 섭정을 받다가 성인되어 친정(親政)을 펼 때는
황제에 걸맞은 기량과 권위를 보였으나 시간이 지나자
아우인 낭야왕 사마도자에게 정사를 위임하고 자기는 밤낮으로 주색에 빠져 지냈다.
그 후 불교에 심취하여 노인, 승려, 비구니를 가까이 두어 총애했고
신하들은 당파 싸움을 자행해 동진의 정치를 더욱 혼란을 치달았다.
그 와중에 396년 9월 후궁들과 주연을 베푼 뒤 총애하던 장귀인과 같이 잠자리에 들었는데,
장귀인에게 “넌 이제 30세가 넘었으니 이제 널 버리고 다른 여자를 취하겠다”고 말했다.
이는 술김에 한 농담이었는데 장귀인이 이걸 진담으로 알아듣고
결국 그날 밤 장귀인은 자고 있던 효무제를 죽였다.
재위 25년 향년 35세의 나이로 허망하게 죽음을 맞이한 것이었다.
(국녕사의 나한)
그의 아들 효무제의 태자 사마덕종은 추움과 더움을 분별하지 못하는 저능아였고,
사마도자는 장귀인과 간통하던 관계라서 이를 숨기고 추궁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해 10월에 융평릉(隆平陵)에 안장되었다.
효무제는 일찍 죽은 데다가 뒤를 이은 황제들이 무능하여 나라가 결국 망국으로 치닫았다는 등
후한의 영제, 남송의 남송 도종과 유사한 점이 많다.
그래도 어리석은 데다가 사치에만 매달린 영제나 도종과 달리 달리 효무제는
처음에는 유능했지만, 말년에 방탕에 빠져 어이없게 살해당한 불운의 황제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국녕사의 나한)
꿈 해몽이란 일반 경전에서 볼 수 없는 형식이다.
따라서 이 경이 위경(僞經)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당시 시대상황을 빗대어
일반적인 경전의 형식을 빌어서 나온 것으로도 생각해 볼 수 있지만
2000여년이 지난 오늘날도 암시하는 바가 크, 경구(警句)의 의미로 어눌한 사족(蛇足)을 붙여본다.
(용문석굴의 아난상)
아난칠몽경(阿難七夢經)
~동진(東晉) 천축(天竺) 축담무란(竺曇無蘭) 한역~ 권영대 번역
아난(阿難)이 사위국(舍衛國)에 있을 때 일곱 가지 꿈을 가지고 와서 부처님께 여쭈었다.
첫째는 물이 고인 땅에서 불꽃이 하늘에 닿은 것이요, 둘째는 해와 달이 없어지고 별들도 없어진 것이요,
셋째는 출가한 비구가 굴러서 더러운 구덩이에 빠졌는데 재가한 속인이 머리에 올라타고 나오는 것이요,
넷째는 돼지 떼들이 와서 전단향 숲을 치받고 괴이하게 여기는 것이요,
다섯째는 머리에 수미산을 이었는데 무겁지 아니한 것이요,
여섯째는 큰 코끼리가 작은 코끼리를 버리는 것이요,
일곱째는 화살(華撒)이라는 사자 왕이 머리에 일곱 개의 털이 났는데,
그가 죽어서 땅에 있으니 모든 짐승들이 보고는 두려워하다가
나중에 그 몸뚱이에서 벌레가 나오는 것을 보고야 먹는 것이었다.
이러한 악몽(惡夢)을 꾸고 와서는 그에 대해 부처님께 여쭈었는데,
마침 부처님께서는 사위국에 보회강당(普會講堂)에서
바사닉왕(波斯匿王)에게 고(苦)․집[習]․멸(滅)․도(道)를 설명하시다가
아난이 근심하고 괴로워함이 말할 수 없음을 보셨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꾼 꿈은 모두 다가오는 오탁악세(五濁惡世)에 대한 것이지
너에게 해로운 것이 아니거늘 어째서 근심하는 얼굴빛을 하고 있느냐?
(원통사의 아난상)
첫째 물 고인 땅에서 불꽃이 하늘에 치솟는 꿈은,
곧 다가오는 세상에 비구들이 착한 마음은 점점 적어지고 악함이 치성하여
서로 살해함이 헤아릴 수 없는 것을 나타냄이요,
蛇足1) 자급자족이 아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우선이다.
이는 속(俗)이나 비속(非俗)이나 마찬가지다. 돈이 있어야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가정을 꾸려 나가려면 일정한 수입이 있어야 하고,
절은 절대로 절에 딸린 식솔과 대중포교와 새로운 불사(佛事)를 일으켜야 하고,
기존의 법당을 유지관리 등 이를 위해서 돈이 있어야 운영이 된다.
개인적으로는 절제된 욕망이 고행이 되어 이를 벗어버리고
몰래 자신의 탐욕이나 욕망 충족을 하기 위해 그릇된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초심을 벗어나게 되고, 초심을 이탈하면서부터 수행은 게을러지게 마련이다.
해이한 마음은 마(魔)가 끼어들게 되고, 탐욕이 지나치면
결국에는 살인이라는 극악한 행동까지도 서슴지 않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매스컴에 오르내리는 승려나 목사들의 횡령이나 사기 행각,
간음이라는 비행(非行)을 저지르게 되는 것은 모두 이를 대변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국녕사의 나한)
둘째 해와 달이 없어지고 별 또한 없어지는 꿈은,
부처가 열반한 뒤에 모든 성문이 부처님을 따라 열반하고
세상에 있지 않으니 중생의 눈이 없어짐을 나타냄이요,
蛇足2) 어두운 바다를 항해하는 배들이 갑자기 어둠을 밝혀주는 등댓불이 사라지면 우왕좌왕하게 되듯,
속(俗)이나 비속(非俗)에서도 중추적, 지도적 인물이 사라지게 되면 방황하게 되고,
진리를 향한 마음은 카오스에 빠지게 된다.
이는 바로 오늘날 우리의 사회가 직면한 국내외의 정치문제, 성장과 분배의 경제문제,
입시 위주의 교육문제, 남녀의 평등과 성차별의 문제, 인성 등에 대한 가치관의 혼란이 아닌가?
(주가각의 나한)
셋째 출가한 비구가 굴러서 깨끗하지 못한 구덩이에 빠졌는데 재가한 속인이 머리에 올라 나오는 꿈은,
곧 다가올 세상에서 비구들이 독한 질투를 품고 서로 살해하여
도사(道士)의 머리를 베게 되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면
속인은 이것을 보고 간(諫)하고 꾸짖지만 듣지 아니하고
결국엔 죽어서 지옥에 들어가며, 반면 속인은 정진하여 죽어서 천상에 나는 것을 나타냄이요.
蛇足3) 오늘날 사찰이나 교회를 보면 종단의 한자리 차지하기 위해
벌어지는 이전투구(泥田鬪狗)가 다반사고, 때로는 재력 있는 신도나,
명망 있는 신자를 유치하기 위해서, 때로는 교회나 사찰의 머릿수를 늘이기 위해
수행자들끼리 암투를 벌리는 것은 새로운 일도 아니다.
수행자가 탐욕을 부리면 세속인의 탐욕보다 더 심하게 된다.
그런데 아이러니칼하게도 이를 중재하는 사람이 교회나 사찰 안의 수행자가 아니라
외부의 속인들이라는 것이다. 천당 극락을 가는 길은 수행자보다 세속인이 앞선다는 의미일까?
(국녕사)
넷째 돼지 떼들이 와서 전단향 숲을 치받고 괴이하게 여기는 꿈은,
곧 오는 세상에서 속인이 절에 들어와서 비구들을 비방하고
좋은 점과 나쁜 점을 찾으며 탑을 헐고 비구를 해칠 것을 나타냄이요,
蛇足4) 종교단체를 움직이고 종교적 행사를 치르는 것은
사실 그 안의 수행자들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외부 속인들의 힘에 좌지우지하게 되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미 거대한 보수적 종교단체는 수행자들보다 신도나 불자로 칭하는 일반 속인들에 의해서
사찰이나 교회 운영에 일익을 하고 있기에 이로 인한 비행도 자행될 수밖에 없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국녕사의 나한)
다섯째 머리에 수미산을 이었는데도 무겁게 느끼지 않은 꿈은,
곧 부처가 몇도 한 뒤에 아난이 1천 아라한을 위해서 경전을 내는 스승이 되는데
한 구절도 잊어버리지 않으며, 깨달은 것이 또한 많지마는 무겁다고 여기지 아니함을 나타냄이요,
蛇足5) 오늘날 진리는 전하는 것은 사람보다도 컴퓨터에 더 의존하고 있다.
예배도, 참배도 온라인 시대다. 그러나 진리는 소리나 글자의 크기나 무게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속도에 있는 것도 아니다. 아무리 글자를 크게 쓰고, 황금으로 도금을 하고,
번개처럼 빨리 전파한다고 해서 진리가 양이 커지고 무게가 늘어나는 것도 아니고,
그 의미나 가치를 더하는 것도 아니다.
팔만사천이 아니라 팔억사천 경문을 머리에 담은들 어찌 그 무게로 따질 수 있을까?
지식은 양(量)으로 따질 수 있지만, 진리(眞理)는 양(量)이나 무게로 따질 수 없는 것이다.
(주가각)
여섯째 큰 코끼리가 작은 코끼리를 버리는 꿈은
앞으로 삿된 견해가 치성해서 나의 불법이 무너지면
덕 있는 이들은 다들 숨어 나타나지 아니함을 나타냄이요,
蛇足6) 정도(正道)가 무너지면 사도(邪道)가 활개를 치게 된다. 혼돈이란 그래서 생기는 것이다.
하나의 길이 아전인수격으로 여러 갈래로 갈라지고,
그 나름대로 이론을 붙여 혼란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정치만 보더라고, 정부도 국민을 위해서라고 외치고,
야당도 여당도 제각각 국민을 위한다고 외친다.
도대체 그들이 말하는 국민이 어느 나라 국민인지 혼돈을 자아낼 정도다.
정도는 네 편 내 편이 없지만, 사도는 네 편 내 편이 있어
상대를 공격하고 비난하고 힐난하게 되니
오늘날 진정한 지식인들이나, 수행자들은 숨어 버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호랑이굴에 여우가 떼거리로 모여 설치되니 호랑인들 숨어버리지 않겠는가?
(국녕사의 나한)
일곱째 화살(華撒)이라는 사자 왕이 머리에 일곱 개의 털이 났는데,
그가 죽어서 땅에 있으니 모든 짐승이 보고는 두려워하다가
나중에 그 몸뚱이에서 벌레가 나오는 것을 보고야 먹는 것이었다는 이 꿈은
사자가 죽은 것은 부처가 열반하고 1,470년 후에 나의 제자들이 덕 있는 마음을 닦아서
일체의 악마가 어지럽히지 못함이니, 일곱 개의 털은 7백 년 뒤의 일이라는 것을 나타냄이니라.”
蛇足7) 긴 장마가 계속되더라도 언젠가는 푸른 하늘이 나타나듯이
진리라는 것은 그러하다는 의미다. 그 시기는 경전에서는 말하지만,
경전의 수는 속인의 수(數)와 달라서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영원히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사라질 수도 없는 것이 진리라는 것이다.
(용문석굴의 아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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