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들의 오도송 모음 (제2부)

2022. 10. 5. 06:35선시 만행 한시 화두

11)청허(淸虛) / 휴정(休靜) / 서산대사(西山大師. 1520~1604)

 

髮白非心白 (발백비심백) 古人曾漏洩 (고인증누설)

今廳一聲鷄 (금청일성계) 丈夫能事畢 (장부능사필)

忽得自家底 (홀득자가저) 頭頭只此爾 (두두지차이)

萬千金寶藏 (만천금보장) 元是一空紙 (원시일공지)

 

머리가 희어진다고 마음마저 희어지지 않는다.

이는 옛사람들이 이미 말한 것이다.

지금 대낮에 닭 우는 소리 듣나니

대장부로서 내가 할 일을 다 마쳤네.

홀연히 내가 지닌 것을 내 속에서 발견하니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있는 그대로 그렇다.

천언만어의 경전들이 본시 하나의 빈 종이일 뿐이다.

 

@ 휴정(休靜, 1520~1604)은 평남 안주 출신으로

호는 청허(淸虛)이고, 서산(西山)인 묘향산에 오래 머물렀으므로

서산대사(西山大師)라고 한다.  9세에 어머니를, 10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안주 군수를 따라 한양에 가서 12세에 성균관에 입학했다.

15세에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하고

지리산으로 들어가 부용 영관(芙蓉靈觀, 1485~1571)을 스승으로 모시고

10여 년 동안 수행했고, 영관의 법을 이어받은 후

금강산 · 묘향산에서 수행했다.

 

@선시2

主人夢說客 주인은 손에게 제 꿈 이야기하고

客夢說主人 손은 주인에게 제꿈 이야기하누나

今說二夢客 이제 두 꿈 이야기하는 나그네

亦是夢中人 이 또한 꿈속의 사람일세

 

@선시3

十 年 端 坐 擁 心 性 (십년단좌옹심성)

寬 得 深 林 鳥 不 驚 (관득심림조불경)

昨 夜 松 潭 風 雨 惡 (작야송담풍우악)

魚 生 一 角 鶴 三 聲 (어생일각학삼성)

 

십 년을 단정히 앉아 마음자리 다스리니

깊은 숲에 새들도 놀라지 않네

어젯밤 송담에 비바람 몰아치더니

고기에 뿔이 하나 돋고 학이 세 번 울더라.

 

12) 향곡당(香谷堂) 혜림(惠林:1912~1978) 선사

 

忽然兩手全體活 (홀연양수전체활)

홀연히 두 손을 보니 전체가 살아났네

三世佛祖眼中花 (삼세불조안중화)

삼세의 불조는 눈 속의 꽃이요

天經萬論是何物 (천경만론시하물)

천경만론(天經萬論)이 무슨 물건인고?

從此佛祖總喪身 (종차불조총상신)

이로부터 불조들이 모두 몸을 잃었도다.

鳳巖一笑千古喜 (봉암일소천고희)

봉암사에서 한 번 웃음은 천고의 기쁨이요

曦陽數曲萬劫閑 (희양수곡만겁한)

희양산 굽이굽이 만겁토록 한가하네

來年更有一輪月 (내년갱유일륜월)

내년에도 또 있겠지. 둥굴고 밝은 달

金風吹處鶴戾新 (금풍취처학려신)

가을 바람 부는 곳에 학의 울음 새롭구나.

 

@스님의 법호는 향곡(香谷)이고 휘는 혜림(蕙林)으로,

운봉성수(雲峰 性粹, 1889~1946) 스님의 문하이다.

스님은 서기 1912년 정월, 경북 영일군 신광면에서 출생하였다.

성은 김씨(金氏)이고 속명은 진탁(震鐸)이다.

부모님의 영향으로 신식 교육을 받지 않고

15세까지 서당에 다니며 전통적인 훈육을 받아 4서 3경을 통독하였다.

세수 20세인 1932년, 금정산 범어사(梵魚寺, 동래) 금강계단에서

운봉화상을 전계사로 구족계를 받았다.

이후 조실 운봉선사의 문하에서 10여 년간 시봉하였다.

운봉스님은 1944년, 법등의 부촉을 위해

건당식을 베풀고 법호를 내리니, 이때의 법호가 바로 ‘향곡(香谷)’이다.

향곡 스님께서는 1971년부터 ‘73년까지

선학원 제11대 이사장을 역임하시다

말년에 묘관음사에 주석하며 후학을 제접하셨고

1978년 12월 18일 인시(寅時)에 입적하셨다.

열반 3일 전에 남긴 그의 열반송이 전한다.

 

木人嶺上吹玉笛(목인영상취옥적)

목인은 잿마루에 옥피리 불고

石女溪邊亦作舞(석녀계변역작무)

석녀는 개울가에 또한 춤을 추네
威音那畔進一步(위엄나반진일보)

위음왕불 이전으로 한 걸음 나아가니

歷劫不昧常受用(역겁불매상수용)

역겁에 불매하여 언제나 수용하리

 

13)고암상언(古庵祥彦,1899~1988)선사

 

禪定三昧壺中日月 (선정삼매호중일월)

凉風吹來胸中無事 (양중취래흉중무사)

 

선정삼매는 항아리 속 일월 같고

시원한 바람 부니 가슴 속엔 일이 없네

 

@1899년 10월 5일 경기도 파주군 적성면 식현리 425번지에서

양주 윤 씨 문(炆) 거사를 부친으로,

하동 정씨를 모친으로 태어났다.

선사의 아명(兒名)은 지호(志豪)였으며

어릴 때는 한학을 공부했다.

선사는 속세의 인연이 있었던지

어릴 적부터 스님만 보면 그 뒤를 따라가 보고 싶었다.

그리고 선사는 출가수행에 대해 동경을 버리지 못해

열일곱 살 되던 가을에 출가의 뜻을 세워

삼각산 도선사와 도봉산 망월사 등지에서 행자 생활을 했다.

열아홉 살이 되던 1917년 7월에 해인사에서

제산(霽山)화상을 은사로 득도하여 사미계를 받으니,

법명이 상언(祥彦)이었다. 곧 해인사에서 사미과를 이수했지만,

은사이신 제산스님이 직지사로 옮김에 따라서 운수행각을 떠나게 되었다.

 

전국의 제방 선원을 두루 거치며 정진하다가

선사의 세수 마흔 살 되던 해

천성산 천성선원에 주석하시던 용성선사를 참방했다.

고암스님에게 용성선사가 물었다.

“조주 무(無)자의 열 가지 병에 걸리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다만 칼날 위의 길을 갈 뿐입니다(但行劍上路)”

“세존이 영산회상에서 가섭에게 꽃을 들어 보인 뜻은 무엇인가?”

“사자 굴 속에 다른 짐승이 있을 수 없습니다(獅子窟中無異獸)”

“육조스님이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그 뜻은 무엇인가?”

일어나 삼배(三拜)한 고암스님이 답하였다.

“하늘은 높고 땅은 두텁습니다(天高地厚)”

그러고는 스승인 용성선사께 고암스님이 물었다.

“스님의 가풍은 무엇입니까?”

용상선사는 주장자를 세 번 내치며 제자에게 반문하였다.

“너의 가풍은 무엇이냐?”

이 물음에 제자인 고암스님도 주장자를 세 번 내리쳤다.

이를 본 용성선사는 그제야 ‘만고풍월 萬古風月’이라고 칭찬하고

이어서 전법게를 내려 인가하였다.

부처와 조사도 알지 못하고

머리를 흔들며 와도 또한 알지 못하며

운문의 호떡은 둥글고

진주의 무는 길기도 하지

 

그리고 송( 頌)을 읊으셨다.

만고에 풍월을 아는 자 누구인가?

고암을 독대하니 풍월이 만고로다

용성스님은 인가와 함께 고압이라는 당호를 내렸다.

조계종 3대, 4대, 6대 종정을 역임하셨다.

 

14)해안선사(海眼禪師 1901-1974)

 

鐸 鳴 鐘 落 又 竹 覓 (탁명종낙우죽멱)

鳳 飛 銀 山 鐵 壁 外 (봉비은산철벽외)

若 人 問 我 喜 消 息 (약인문아희소식)

會 僧 堂 裏 滿 鉢 供 (회승당리만발공)

 

목탁소리 종소리 또한 죽비소리에

봉황은 은살철벽을 넘어 날았다네

내게 기쁜 소식을 누가 묻는가.

회승당안의 만발 공양이라 하노라.

 

@근·현대 호남 불교의 큰 어르신으로 추앙받고 있는

해안선사(海眼禪師)는 경봉스님과 함께

‘東 경봉 西 해안’으로 불리며 선풍을 떨쳤던 선승(禪僧)이다.

스님은 1901년 음력 3월 7일 전북 부안군

산내면 격포리에서 아버지 김해 김씨 치권공과

어머니 은율 송씨의 3남으로 출생했다.

이름은 성봉(成鳳)이라 했으며,

커서는 봉수(鳳秀)라 불렸고 당호는 해안(海眼)이다.

 

스님은 17세가 되자 호남의 대 본찰인 백양사에서 머리를 깎고

송만암 대종사를 계사로 사미계를 받았으며

그해 백양사 지방학림에 입학하였다.

이듬해 무오년 스님의 나이 18세가 되는 해

12월, 납월 팔일

성도절(成道節:석가모니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룬 음력 12월 8일)을 앞두고

선원에서는 연례행사로 7일간 용맹정진을 하게 되었다.

스님은 학명 조실스님으로부터 ‘은산철벽을 뚫으라’는 화두를 받고

생사의 간두에 서서 화두 일념에 자타를 홀연히,

마침내 깨달음을 얻었다. 위의 오도송은 그때 지은 것이라고 전한다.

위 오도송은 내소사 천왕문의 주련에도 걸려있다.

#열반송

생사 없는 곳에 따로 한 세계가 있으니

때 묻은 옷이 떨어져 다하면 바로 이달 밝을 때이니라

(生死不到處 別有一世界 垢衣方落盡 正是月明時)

내소사 단풍나무 숲길 왼편

정갈하게 단장된 부도밭에 해안선사 부도비가 있다.

부도비 뒷면에는 ‘생사가 이곳에서 나왔으나,

이곳에 없다(生死於是 是無生死)’라 적혀있다.

 

15)의상대사(625~702)

年年世世花常似 (년년세세화상사)

世世年年人不同 (세세년년인부동)

人面不知何處去 (인면부지하처거)

桃花依舊笑春風 (도화의구소춘풍)

 

해마다 꽃은 항상 같으나 해마다 사람은 같지 않구나

사람 얼굴은 어느 곳으로 가는지 알 수 없으나

복숭아 꽃은 옛날처럼 봄바람에 웃고 있구나.

 

#출생 625(진평왕 47)

사망 702(성덕왕 1)

 

한국에 화엄종을 최초로 일으켰다.

8세 위인 원효를 만나 친교를 맺고

그와 함께 고구려 보덕 화상에게 〈열반경〉을 배우기도 했다.

661년 원효와 함께 해로를 통하여 중국에 가던 중

원효는 한 고분에서 깨친 바가 있어 발길을 돌리고

의상은 중국 화엄종의 제조였던 지엄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귀국 후 부석사 등 많은 사찰을 세우고 교화 활동을 폈다.

원효가 저술에 힘쓰고 개인적인 교화 활동을 편 데 반해,

의상은 교단 조직에 의한 교화와 제자들의 교육을 중시했다.

 

16)원효대사(617~686)

 

靑山疊疊彌陀窟 (청산첩첩미타굴)

첩첩한 푸른 산은 아미타의 굴이요

滄海茫茫寂滅宮 (창해망망적멸궁)

망망한 큰 바다는 적멸의 궁전이로다.

物物拈來無罣碍 (물물념래무가애)

어느 것 잡아 와도 걸릴 것 하나 없네!

幾看松頂鶴頭紅 (기간송정학두홍)

몇 번이나 보았는가? 소나무 위 학 머리 붉어짐을."

 

@출생: 617년(진평왕 39)/ 입적: 686년(신문왕 6)

 

당나라로 유학 가던 길에 해골 물 일화를 통해 득도한 신라의 승려.

속성은 설, 아명은 서당, 신당, 이름은 사례이며

원효는 출가한 뒤의 이름으로

의상과 함께 고구려의 고승으로서

보덕에게 <열반경>, <유마경> 등을 배웠다.

661년 의상과 함께 당나라에 유학을 가기 위해

당항성으로 가는 중 어느 토굴에서 자다 목이 말라

바가지에 있던 물을 달게 마셨는데,

다음 날 아침 보니 토굴이 아닌 무덤에서

해골에 고인 물을 마셨다는 것을 알고는

“마음이 일어나므로 갖가지 현상이 일어나고

마음이 사라지니 땅 막과 무덤이

둘이 아님을 알았다고 깨달은 뒤 유학을 포기했다.

불교뿐 아니라 유교와 도교, 법가사상 등에도 해박했으며,

요석공주와의 사이에서 후일 대학자가 된 설총을 낳았다.

 

<원효대사 오도송>

心生卽 種種法生 (심생즉 종종법생)

心滅卽 龕墳不二 (심멸즉 감분불이)

三界唯心 萬法唯識 (삼계유심 만법유식)

心外無法 胡用別求 (심외무법 호용별구)

我不入唐 (아불입당)

 

마음이 생하는 까닭에 가지가지 법이 생기고

마음이 멸하면 부처님 모신 감실과

해골이 묻혀 있는 무덤이 다르지 않네.

삼계가 오직 마음이요, 만법이 오직 식이다.

마음밖에 법이 없는데 무엇을 따로 구하랴.

나는 당나라에 가지 않겠다.

17)무학대사(1327~1405)

靑山綠水眞我面 (청산녹수진아면)

明月淸風誰主人 (명월청풍수주인)

莫謂本來無一物 (막위본래무일물)

塵塵刹刹法王身 (진진찰찰법왕신)

 

푸른 산 푸른 물이 나의 참모습이니,

밝은 달, 맑은 바람의 주인은 누구인가.

본래부터 한 물건도 없다 이르지 마라.

온 세계 티끌마다 부처님 몸, 아니런가.

 

@무학 자초(無學自超, 1327~1405)는

고려 말기~조선 초기의 승려이다.

속성은 박이고 이름은 자초(自超)이며,

법명은 무학(無學) · 계월헌(溪月軒)이다.

조선 태조에 의해 왕사가 되었으며, 한양 천도를 도왔다.

 

무학은 1327년 경남 합천군에서 태어났다.

무학의 부모는 몽골 원 제국 간섭기 고려 시대,

왜구에게 끌려갔다가 돌아온 하층민 출신인데

갈대로 삿갓을 만들어 팔았고, 이러한 사정으로 인하여

무학 선사의 어린 시절 기록 등은 남아 있지 않다.

어린 시절의 그가 또래보다 나이가 꽤 들어 보이는 등

지나치게 못생겨서 내다 버렸으나

학들이 와서 아이를 감싸므로 그의 부모는

그가 특별한 아이라 생각하여 도로 데려왔다 한다.

 

무학대사는 1344년 18세에 송광사에 들어가

소지 선사 밑에서 승려가 되었다.

이후 용문산(龍門山)의 혜명 국사로부터 불법을 전수받고

묘향산의 금강굴에서 수도하였다.

1353년(공민왕 2년)에 원나라의 연경에 유학하여

인도의 지공(指空) 선사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원나라에 있는 동안 오대산(五臺山) 등 중국의 각지를 순례하였다.

나옹 혜근을 만나 서산(西山) 영암사(靈巖寺)에서

수년을 머물다가 1356년(공민왕 5년)에 고려로 돌아왔다.

 

1364년 나옹은 회암사를 중건하고 무학을 불러 수좌승으로 삼았다.

나옹이 사망한 뒤에는 무학은 전국을 돌며 수행하였는데,

이때 이성계와 처음 만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무학 자초의 법을 이어받은 승려로는

금강경오가해를 作 한 득통 기화(得通己和, 1376~1433)가 있다.

그는 21세에 관악산 의상암에 출가하고,

양주 회암사(檜巖寺)에서 자초의 가르침을 받았다.

 

18)숭산행원(崇山行願, 1927~2004) 선사

 

圓覺山下非今路 원각산 밑 오솔길은 지금 길이 아니고,

背囊行客非古人 등짐 지고 오르는 이, 옛사람이 아니로다.

濯濯履聲貫古今 뚜벅뚜벅 발소리 옛날과 지금을 꿰뚫는데,

可可鳥聲飛上樹 까악, 까악, 까악 까마귀는 나무 위를 나네.

 

@숭산 선사는 1927년 평안남도 순천군

순천읍의 기독교 집안에서 출생하였으며, 속명은 이덕인(李德仁)이다.

일제의 식민통치가 막바지로 치달아 가던 1944년

선사가 평안공업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일제에 저항하기 위해 지하 독립운동단체 활동에 가담하기도 하였으나,

몇 달 지나지 않아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심한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해방 이후

동국대학교 국문학과에 입학하였으나,

좌우익 사상투쟁으로 남한 정치는 극도로 불안하였고,

동족 간의 살상마저 자행되던 당시 시대 상황에 환멸을 느끼고

결국 인간 본연의 마음자리를 찾기 위해 입산수도를 단행했다.

1947년 10월 공주 마곡사에서 계를 받았다.

이후 수행의 필요성을 절감한 선사는 원각산 부용암에서

100일 기도에 돌입하였는데, 말린 솔잎가루로 연명하며

하루에도 수차례 얼음물로 몸을 씻는 등,

극한의 고행으로 용맹정진하며 99일째 되던 날,

차안(此岸)과 피안(彼岸)의 구별을 초월한

본각진성(本覺眞性)의 참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다음 날 아침, 선사는 한 행객이 배낭을 메고 산을 오르는데,

갑자기 한 무리의 까마귀 떼가 나무에서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을 보았다.

그 순간 선사는 확철대오(廓徹大悟) 하였고, 그때 남긴 것이 위의 오도송이다.

 

그 후 선사는 고봉 선사로부터 인가를 받고

수덕사에서 비구계를 수지하게 되었는데,

이로써 경허성우(鏡虛惺牛, 1849~1912),

만공월면(滿空月面, 1871~1946),

고봉경욱(古峰景昱, 1890~1961) 선사로 이어지는

덕숭 법맥의 계승자가 되었다.

 

19)정진(靜眞; 878~956)대사

 

열사람 선객이 함께 급제했으니

방 붙은 머리에 모두가 한가하도다.

비록 한 사람은 돌아보지 않으나

스스로 아홉 사람은 출세하리로다.

 

十 介 禪 子 同 級 第 (십개선자동급제)

榜 頭 若 過 摠 得 閑 (방두약과총득한)

雖 然 一 介 不 回 頭 (수연일개불회두)

自 有 九 人 出 世 間 (자유구인출세간)

 

@정진대사(878~956)는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활약한 승려로,

속성은 왕씨(王氏)이며 속명은 긍양(兢讓),

시호는 정진(靜眞), 탑호는 원오(圓悟)이다.

 

900년(효공왕 4) 당나라에 들어가 25년간 유학하고

924년(경애왕 1)에 돌아와 신라 경명왕의 극진한 예우를 받았다.

고려 때인 935년(태조 18) 봉암사를 중창하고

태조·혜종·정종을 선문에 들게 하는 등 불교 중흥에 이바지했다.

79세에 입적했다.

그의 탑비는 문경 봉암사에 있다.

(聞慶鳳巖寺靜眞大師塔碑 보물 제172호)

 

20)부설(浮雪)거사

 

共把寂空雙去法(공파적공쌍거법)

同棲雲鶴一間庵(동서운학일간암)

已知不二歸無二(이지불이귀무이)

誰問前三與後三(수문전삼여후삼)

閑看庭中花艶艶(한간정중화염염)

任聆窓外鳥喃喃(님영창외조남남)

能令直入如來地(능령직입여래지)

何用區區久歷參(하용구구구력참)

 

@남남(喃喃): 혀를 빨리 돌려 알아들을 수 없게

재잘거림 이나 재잘거리는 소리.

 

공적의 오묘한 법 함께 놓아버리고

한 칸 암자에 구름과 학과 함께 사노라.

둘이 아님을 알고나니 둘이 없구나

뉘라서 전삼삼 후삼삼 물어오는가

한가로이 정원에 곱게 핀 꽃 바라보고

창밖에 재잘대는 새소리를 듣는다.

곧바로 여래지에 들 수 있는데

구구히 오래도록 무엇을 참구하랴

 

@삼국시대 신라의 부설거사로 널리 알려진 승려 생몰연대는 미상

우리 나라 대표적인 거사(居士)로 성은 진씨(陳氏),

이름은 광세(光世), 자는 의상(宜祥).

경상북도 경주 출신. 신라 선덕여왕 때 태어났으며,

어려서 출가하여 경주불국사에서 원정(圓淨)의 제자가 되었다.

그가 지었다는 계룡산 등운암, 변산 월명암,

김제 망해사, 문경 사패산 묘적암이 있다.

 

 

21)고봉(高峯)선사(1238~1295)

 

淸淨本然極玲瓏 청정한 근본은 극히 영롱하거니

山河大地絶点空 산하대지가 일점의 허공이로다

毘盧一體從何起 '비로일체'가 무엇을 따라 일어났던고

海印能仁三昧通 해인과 능인이 삼매로 통할 뿐이다

 

@대구 목골마을에서 태어난 고봉스님은

18살에 결혼하고 1년 뒤 방랑길에 나섰다.

사육신 박팽년의 후손이란 자부심과 애국심이 강했던

청년 유생 고봉은 출가를 위해 경남 양산 통도사에 가서도

양반 행세를 했다는 여러 일화가 있다.

고봉선사는 용수사에서 5년을 수행하던 어느 날 밤,

도반이 몸부림치다가 목침을 떨어뜨리는 소리에

홀연히 가슴이 활짝 열렸다. 그리고는 지은 오도송이 있다.

 

如泗州見大聖(여사주견대성)

사주(泗州)의 대성인(大聖人) 친견한 듯하고

遠客還故鄕(원객환고향)

먼 길 갔던 객이 고향에 돌아온 것 같네

元來只是舊時人(원래지시구시인)

다만 원래 그때의 사람일 뿐일 뿐

不改舊時行履處 (불개구시행이처)

옛날 그때 밟고 다니던 자리를 떠난 적이 없도다

 

 

@고봉스님은 견성 뒤 당대의 선지식 만공선사를 찾아 덕숭산으로 갔다.

고봉스님은 옷을 모두 벗어 버리고

온몸에 먹을 가득 묻히고선 백지 위에 엎드렸다.

백지엔 그의 남근이 도드라지게 찍혔다.

고봉이 조실 방에 가 종이를 내놓으니 만공스님이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네가 지금 법(진리)을 묻는 것이냐. 그렇지 않으면 장난을 하는 것이냐?”

말이 없자 만공스님이 고봉스님의 종아리를 내리쳤다.

모진 매질에도 고봉스님의 얼굴은 그 표정이 전혀 변함이 없었다.

이런 매질에도 끄달리지 않는 고봉스님을 보고

만공스님은 드디어 인가하면서 이런 법어를 내렸다.

‘법은 꾸밈이 없는 것, 조작된 마음을 갖지 마라.’

 

고봉스님은 열반 때

‘다만 알지 못할 것인 줄 알면 그것이 곧 견성’이라는 말을 남겼다.

2004년 11월 30일에 열반한 그의 제자 숭산 선사는

이를 ‘오직 모를 뿐’이라는 말로 바꿔 세계에 선을 알렸다.

 

22)혜근 나옹(懶翁)선사 (1320~1376) 오도송(悟道頌)

 

選佛場中坐 선불장 가운데 앉아서

惺惺着眠着 성성히 눈여겨 잘 보니

見聞非他物 보고 듣는 것 다른 것이 아니라

元是舊主人 다만 본래의 옛 주인일세

 

혜근(惠勤: 1320년 2월 ~1376년 6월)은 고려의 승려이다.

속명은 아원혜(牙元惠), 초명 원혜(元慧), 호는 나옹(懶翁),

법호는 보제 존자(普濟尊者)이며 법명 혜근(惠勤).

시호는 선각(禪覺). 영해부(寧海府: 현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출신이다.

 

1320년(충숙왕 7년) 음력 1월 15일에 아버지 아서구(牙瑞具)와

영산군(靈山郡) 출신의 어머니 정씨(鄭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1339년(충숙왕 후 8년) 20세에 출가했으며,

묘적암(妙寂庵)의 요연(了然)에게 득도했다.

1344년(충목왕 즉위년)에 회암사에서

4년 동안 밤낮으로 홀로 앉아 정진하던 중에 갑자기 깨달음을 얻었다.

 

1347년(충목왕 3년)에 원나라의 연경(燕京: 현 베이징)으로 건너가

이름난 승려들을 찾아 가르침을 받고

인도의 지공선사(地空禪師)의 법을 이어받았다.

그 후 1351년(충정왕 3년)부터 1354년(공민왕 3년)까지

중국 여러 지역을 돌아다녔다.

1355년(공민왕 4년)에 광제선사(廣濟禪寺)의 주지(住持)로 있었다.

1358년(공민왕 7년)에 고려로 귀국했으며,

1360년(공민왕 9년)에 오대산에 머물렀다.

1361년(공민왕 10년)에 왕과 태후의 청으로

신광사에 잠시 머물렀으며,

11월에는 홍건적의 난이 일어났을 때 사찰을 지켰다.

 

1363년(공민왕 12년)에는 구월산에 들어갔으며,

1365년(공민왕 14년)에는 물러나는 것을 허락받았으며

그 후 여러 산사(山寺)를 돌아다녔다.

1366년(공민왕 15)에 금강산에 있었고

1369년(공민왕 18년)에 오대산으로 다시 들어갔다.

1370년(공민왕 19년)에 회암사에 스승의 유골을 안치했고,

음력 9월 10일에는 공부선(功夫選)을 거행했다.

 

1371년(공민왕 20년)에 법복(法服)과 발우(鉢盂)를 하사받았으며,

왕사(王師) 대조계종사(大曹溪宗師)

선교도총섭(禪敎都摠攝)

근수본지중흥조풍복국우세보제존자

(勤修本智重興祖風福國祐世普濟尊者)로 봉했다.

그 후 송광사에 있었다가 회암사의 주지가 되었으며, 또한 절을 중축했다.

 

1376년(우왕 2년)에 낙성(落城)을 축하하는 법회를 크게 열었는데

대간(臺諫)의 탄핵으로 혜근은 밀양시의 영원사(靈源寺)로 옮기게 되었다.

이때 병이 도졌다. 한강에 이르렀을 때

호송 관원이었던 탁첨(卓詹)에게 자신의 병세가 위중해

뱃길로 갔으면 좋겠다고 말했고,

결국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 7일 만에 여흥(驪興: 현 경기도 여주시)에 도착해

신륵사에 머물렀다. 탁첨(卓詹)이 재촉해 다시 떠나자고 말했지만

떠나지 않고 음력 5월 15일 진시(辰時: 오전 7시부터 9시 사이)에

조용히 입적(入寂)했다.

 

<열반송>

生從何處來(생종하처거) 死向何處去(사향하처거)

生也一片浮雲起(생야일편부운기) 死也一片浮雲滅 (사야일편부운멸)

浮雲自體本無實(부운자체본무실) 生死去來亦如然 (생사거래역여연)

獨一物常獨露( 독일물상독로) 湛然不隨於生死 (담연불수어생사)

 

태어날 땐 어느 곳에서 와서, 죽으면 어느 그곳으로 가는가?

태어남은 한 조각 뜬구름이 일어나는 것이고

죽음이란 한 조각 뜬구름이 흩어지는 것.

뜬구름 자체가 본래 실체가 없듯이 생사 거래 또한 역시 이와 같도다.

오직 한 마음을 항상 오로지 드러내어 담연히 생사에 개의치 말게나.

 

23)태고보우(太古普愚:1301~1382)

오도송(悟道頌)

趙州古佛老, 조주에 사는 옛 조사,

坐斷千聖路 앉은 채 천성의 길을 끊었네

吹毛적面提, 칼날을 바로 눈앞에 대어도

通身無孔窺 온몸에 하나의 구멍도 없네

狐兎絶潛踪 여우나 토끼도 자취 감춘 중

번身師子露 문득 뛰어드는 사자 한 마리

打破牢關後, 철벽같은 그 관문 때려 부수니

淸風吹太古 맑은 바람이 태고를 불어버리네

 

@보우선사(普愚禪師< 1301~1382)는 법명은 보허(普虛),

호는 태고(太古), 속성은 홍(洪)씨. 고려 홍주현(현 충남 홍성군) 출신.

13세에 양주 회암사 광지선사 문하로 출가.

중국으로 건너가 임제종 19대손인 원나라 청공(淸珙)선사 문하에 들어가 수학.

 

태고보우선사(1301~1382)는

나옹 혜근선사와 백운 경한선사와 더불어

여말삼사(麗末三師)로 추앙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불교계의 최대종단인 대한불교조계종의 중흥조이다.

선사는 1301년에 태어나 1350년 이후인 공민 왕대에 활동하였으며

조선건국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위화도 회군이 일어나기 6년 전인

1382년에 입적하였다. 선사는 왕사와 국사에 책봉되면서

불교계에 대한 쇄신을 꾀하고자 하였고

선사가 진작시킨 선풍은 조선 시대를 거쳐 오늘에도 빛을 발하고 있다.

조선 중기 이후 불교계에는 선사와

그의 문도가 계통적으로 이어진다는 법맥이 설정되어 있다.

 

24)묵담(黙潭, 1896~1981) 선사

 

靑天霹靂鳴 (청천벽력명)

天地波濤起 (천지파도기)

我卽常安閑 (아즉상안한)

聊與山花笑 (료여산화소)

 

푸른 하늘에 뇌성벽력이 울릴 적에

하늘과 땅에 큰 파도가 일어나지만

나는 항상 편안하고 한가하여서

산에 꽃이 피는 것을 바라보네

 

@37세에 망월사 선원에서

정전백수자의 화두(話頭)를 참구(參究)하다가

뜰 앞에 있는 늙은 소나무를 보고 확철대오하고, 지은 오도송(悟道頌)이다.

 

@1896년 3월 8일 담양 수북면 남산리에서 출생했으며

법명은 성우, 법호는 묵담(默潭)이다.

속세의 성은 담양 국씨로 명문세족이었던 父 순국씨와

母 오씨 극락화의 맏아들이다.

1906년 장성 백양사에서 순오선사를 은사로,

내장사 종산스님을 계사로 출가 득도했다

스님은 1957년 조계종 중앙총무원 감찰원장,

1957년 조계종정(5·6·7대), 1975년 태고종정(3·4대)을 역임했으며

선(禪), 교(敎), 율(律)에 능통하신 스님은

백양사, 관음사, 증심사, 대전 심광사, 속리산 법주사 등

수많은 사원의 불사에 증사(證師)로,

법회의 법사, 회주, 금강계단의 전계화상 아사리로 대중을 교화했다.

1980년 담양 용화사 본찰에서 열반계

(저 법계를 초월한 법성이야

어찌 생사윤회 상에 걸림이 있으리오.

만일 누가 나의 오고 간 곳을 물으면

구름은 청천에 있고 물은 병에 있다 하겠노라.

(越彼法界獨尊性 豈拘生死輪回相

若人問我來去處 雲在靑天水在甁)를 송(頌)하시고

이듬해 1월 3일 가부좌로 앉아서 입적하니 세수 86세, 법랍 75세였다.

 

묵담(默潭) 스님의 법어

마음속에 사심(私心)이 있으면

극락일지라도 가시가 돋아나고,

마음속에 사심(私心)이 없으면

지옥일지라도 연꽃이 피어나도다.

 

25)진묵(震默)대사 (1562~1633) 오도송(悟道誦)

 

天衾地席山爲枕 하늘을 이불로 땅을 자리로 산을 베개로 삼고

月燭雲屛海作樽 달을 촛불로 구름을 병풍으로 바다를 술통으로 삼아

大醉居然仍起無 크게 취해 거연히 일어나 춤을 추니

却嫌長袖掛崑崙 도리어 긴 소매가 곤륜산에 걸릴까 꺼려지네

 

@속명은 일옥(一玉), 호는 진묵(震默),

전라도 만경땅 불거촌(萬傾懸 佛居村)에서

명종(明宗) 17년(1562)에 태어났었다.

그는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7세 때에

어머니 조의씨(調意氏)의 품을 떠나 전주의 봉서사로 출가.

봉서사 및 변산 월명암, 김제 망해사에 그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26) 만해((卍海)선사 (1879~1944) 오도송(悟道頌)

男兒到處是故鄕 남아 대장부는 머무는 곳이 바로 고향인 것을

幾人長在客愁中 수많은 나그네 시름 속에서 애태웠네

一聲喝破三千界 한 소리 버럭 지르니 삼천세계가 깨지고

雪裡桃花片片紅 눈 속에 붉은 복사꽃 흩날리네

 

@만해 한용운 선사는 1879년 8월 29일

충남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서 한응준(韓應俊)과

온양 방씨(溫陽方氏)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청주이며 자(字)는 정옥(貞玉), 속명은 유천(裕天),

법명(法名)은 용운(龍雲), 법호(法號)는 만해(萬海)이다.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3 ・ 1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다.

백담사에서 불교의 기초지식을 배웠지만,

문명세계를 알고 싶은 호기심으로 세계일주를 단행하였다.

세계일주를 시베리아에서 중단한 선생은 설악산 백담사로 돌아왔다.

속세와 인연을 끊고

연곡(蓮谷)선사를 은사로 출가하여 정식으로 승려가 되었다.

불교사상을 탐구한 선생은 일본으로 들어오는

문명세계를 확인하기 위하여 1908년에는 일본유학을 단행하였다.

6개월의 짧은 유학 생활에서 선생은

불교 근대화라는 새로운 세계를 확인하였다.

승려이며, 독립운동가이며, 민족시인으로

그의 작품인 1926년 작 『님의 침묵』이 온 국민이 애창하는 명시이다.

 

27)혜월 혜명(慧月慧明:1862∼1937)선사

一切有爲法(일체유위법) 일체의 함이 있는 법은

本無眞實相(본무진실상) 본래 진실한 상이 없도다

於相義無相(어상의무상) 상에서 상 없음을 안다면

卽鳴爲見性(즉명위견성) 성품을 보았다고 하느니

 

@구한말 스님. 혜월은 혜명(慧明)의 법호이다.

경허선사의 법제자이며, 근대 선풍을 진착시키고,

불교를 중흥시킨 선사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무심도인(無心道人)이었고 천진무구, 그 자체였다고 한다.

그래서 절집에서는 그를 '천진도인'이라고도 부르고,

'개간 선사'라고도 불렀다. 1902년, 경허 선사께서는

혜명 스님에게 혜월(慧月)이라는 법호(法號)와 전법게(傳法偈)를 내리셨다.

 

혜월 혜명에게 부치노니

일체법을 요달해 깨달을 것 같으면 자성에는

있는 바가 없음이라 이와 같이 법성을 알면

곧 노사나불을 보리라 세상법을 의지해서 그릇 제창하고

문자와 도장이 없는 진리속에 청산을 새겼으며

일관된 상에다가 풀을 바름이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