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원평리석조여래입상 과 삼층석탑
2022. 2. 22. 22:53ㆍ국내 명산과 사찰
충주는 우리나라 중원에 해당하며, 충청도를 대표하는 중심 고장으로
신라의 삼국통일 후 757년(경덕왕 16)에 중원경(中原京)이며,
고려 초에 충주로 개칭된 곳이다.
충주 주변에는 미륵불상이 많이 발견되었는데
특히 후삼국 중 후고구려의 건국을 꾀했던 궁예가
안성의 비뇌성(현 죽주산성)전투에서 양길에게 대승함으로써
북원, 국원, 청주까지 한반도 중부권을 제패하였는데
이 전투의 승전 기념으로 궁예를 기리는
석조미륵불이 많이 조성된 곳이기도 하다.
그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미륵불로는
안성의 쌍미륵사의 쌍미륵불과 국사암의 궁예미륵으로
역사학자들은 평하고 있는데 충주 원평리 석조여래입상도
그 시대에 조성된 불상 중 하나가 아닌가 사료된다.
원평리 석조여래입상이 발견된 이곳은
신라 성덕왕 1년(702)에 창건된 선조사(善祖寺)가 있었다고 하나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폐사되었다는 것 이외에는
자세한 사찰의 연혁이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관련 유물로 추정되는 삼층석탑,
화사석이 결실된 사각형 석등이 있다.
충주원평리석조여래입상(忠州院坪里石造如來立像)
문화재 지정: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8호
크기: 높이 6.1m
제작 시기: 통일신라말, 고려 초기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8호로 지정된 이 석조여래입상은
일명 중원원평리미륵석불로 불리며
불상은 머리 위에 팔각형의 보개(寶蓋)가 올려져 있는 거불(巨佛)이다.
복판복련(複瓣覆蓮 : 아래로 향하고 있는 겹잎의 연꽃)이 새겨진
타원형의 자연석 위에 1단의 대(臺)를 올리고 그 위에 안치되어 있다.
얼굴은 네모나며, 위엄 있지만, 전체적으로 원만한 상을 보이고 있다.
반개(半開)한 두 눈은 아래로 내리뜨고
세모꼴을 이루는 코는 우뚝한 편이다.
아래위로 크게 주름진 도톰한 입술에서는 양감이 느껴진다.
귓바퀴가 뚜렷한 장대한 두 귀는 어깨까지 닿는다.
늘어진 턱 아래로는 삼도(三道)가 둔중하게 새겨져 있다.
불신(佛身)은 딱 벌어진 어깨에 당당한 체구 각부의 균형이 적절하다.
대의는 양어깨를 감싼 통견(通肩) 형식이며,
수직으로 떨어지는 옷자락이 묵직하다.
듬성듬성 접힌 위팔의 평행 옷 주름은 팔을 타고 내려와
오른 손목을 감은 다음 천천히 아래로 흘러내린다.
그리고 깊숙이 파진 가슴 아래로는
굵은 V자형 옷 주름이 쏟아지고 있다.
발목 부위에는 홈을 파듯 거칠게 새긴 성근 수직선으로
군의(裙衣) 자락을 나타내었다.
끝단 사이로 양 발끝이 노출되어 있는데
오른발은 나중에 새로 조성한 것이다.
수인(手印)은 오른손은 손바닥을 안으로 하여
몸 앞에 대고 왼손은 앞쪽으로 비켜 내려 여원인(與願印)을 결했다.
통통한 손바닥과 길쭉한 손가락에서 둔한 양감이 느껴진다.
이 불상 조각 수법과 옷자락 무늬 형태,
당당한 체구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천안 용화사 석불입상이나 예천 동본동 석불입상과 상당히 유사하다.
#천안 용화사 석조여래입상( 충남 유형문화재 제58호)
#예천 동본리 석조여래입상(보물 제47호)
충주 원평리 석조여래입상의 조성 시기는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기로 추정된다.
또한, 이 불상은 미륵불로 전해 오고 있다.
통일신라 말부터 미륵하생 신앙(彌勒下生信仰)의 유행으로
조성된 거대한 규모의 여러 미륵존상 가운데 하나일 것으로 추측된다.
현재 절터에는 삼층석탑과 화사석이 없는 석등이 남아 있다.
전해 오는 이야기로는 이곳이 신라 성덕왕 1년에 창건된
선조사(善祖寺)라는 사찰 터라고 한다.
그러나 현존 유물의 조성 시기는 통일신라
말 고려 초엽이라고 생각된다.
@화사석이 멸실된 석등, 상대석, 간주석(중대석), 하대석만 남아 있다.
상대석은 마모가 심하지만, 하트모양의 복련이 부조되어 있고,
중대석은 원래의 것인지는 모를 정도로 마모되어 형체만 유지하고 있다.
하대석은 사각형 기단에 마모가 되었지만 복련이 부조된 것 같다.
충주 원평리 삼층석탑(忠州院坪里三層石塔)
문화재 지정: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35호
건립 시기: 고려 시대 전반기
크기: 높이 2.95m
소재지: 충청북도 충주시 신니면 원평리
원평리의 일명 미륵댕이 마을에 있는 단층 기단의 삼층석탑으로,
2004년 4월 2일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35호로 지정되었다.
이 삼층석탑은 불상 옆 우측으로 약 7m 지점에 있는데,
이 탑 이외에도 1930년대에 다른 곳으로 이전한
삼층석탑 1기가 더 있었다고 한다.
불상은 고려 시대 전반기 유물임이 확인되었으며,
탑신은 이 불상과 같은 석재임을 확인할 수 있다.
탑의 높이는 2.95m이며, 지대석 폭은 1.88m이다.
탑은 결손 부분이 많으며 기단과 탑신의 풍화 정도가 큰 차이를 보인다.
사각형의 자연 암반을 지대석으로 삼았는데,
단층 기단이 놓이는 부분은 면석을 집어넣을 수 있게 안쪽을 약간 깎았다.
기단은 두 장의 동·서 면석 사이에 다른 두 장의 판석을 끼워 만들었으며,
동·서 판석 면이 남·북 면의 우주를 겸비하고
동·서 면의 우주는 얕게 모각하였다.
기단과 각 층의 우주는 지나치게 좁게 표현되어
건물 기둥의 의미를 상실하였다.
끼워져 있는 기단 면석의 하나가 결손되어 들여다보이는 내부에는
안쪽이 다듬어져 있지 않은 면석이 노출되어 있다.
기단 갑석은 큰 편으로 얇으며 위로 탑신 받침이 넓게 1단 각출 되었다.
동·서 면석에는 전면에 걸쳐 3개의 수형(獸形) 다리가
유려한 큰 향로가 두드러지게 면각되었으며,
조각 내부는 몇 개의 음각선으로 세부를 표현하였다.
탑신은 옥신과 옥개석이 각각 하나의 돌로 조성되었는데,
비록 3층 옥개석이 유실되었으나
각 층이 정확하게 정사각형으로 다듬어져 있어
기단부와는 달리 정치한 일면을 보인다.
옥개석 낙수면 우동마루 전각(轉角)은 투박하나
추녀 상단은 부드럽게 반전하고 있고,
3단의 낮은 옥개석 받침을 가지고 있다.
초청 탑신에 비해 2·3층의 탑신 높이는 현저하게 감축하여
삼층석탑의 전형적인 비례를 보인다.
초층 면석 각 면에는 약 5㎝가량 돌출된 입상이 조각되어 있는데,
마멸이 심하여 세부를 확인할 수 없으나
많은 탑에서 알 수 있듯이 사천왕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상륜부는 일부 손상된 노반석이 놓여 있을 뿐이다.
원형이 일부 변형되고 손실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정연한 구성과 초층 면석에 돌출된 양각의 조각이 남아 있는 3층의 탑신은
좌측의 불상과 동시대에 조성되었을 가능성도 엿보인다.
기단 면석의 향로 조각은 초층 탑신면의 조각과는 전혀 다른 수법으로
불탑에서는 일찍이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예이다.
이 삼층석탑처럼 기단부와 탑신부가
여러 면에서 다른 시대적 특성을 보이는 점과
기단부 탑신 면석에 승탑의 경우처럼
향로가 조각된 점은 연구 대상이 된다.
이 중 탑신 부분은 고려 중기를 넘지 않는 양식으로 보이며,
이 시기 석탑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자료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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