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락산 용굴암

2022. 2. 12. 17:19국내 명산과 사찰

 

수락산 용굴암은 은둔자에게는 피난처로,

수행자에게는 寂靜의 기도 도량으로 안성맞춤이다.

높지는 않은 수락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으며

사찰 안내서에는 1878년경부터 천연동굴인 이곳에 불상을 봉안하고

수행도량으로 이용되었다 하나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고,

다만 1882년 임오군란 때 명성황후가 피난처로 잠시 이용되었고

이를 인연으로 불사에 도움을 받았다는 것인데,

임오군란은 1882년(고종 19) 6월 9일 훈국병(訓局兵)들의

군료분쟁(軍料紛爭)에서 발단해 고종 친정 이후 실각한 대원군이

다시 집권하게 된 정변(政變)으로 이 정변으로

민씨척족정권의 최고 권력자인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제거하려고 찾았으나,

명성황후는 여흥부대부인(驪興府大夫人) 민씨와

무예별감(武藝別監) 홍재희(洪在羲)의 도움으로 탈출해

윤태준(尹泰駿)의 집에 은신했다가 광주(廣州)·여주를 거쳐

장호원(長湖院) 민응식(閔應植)의 집으로 피신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아마도 이때쯤이 아닌가 사료된다.

 

용굴암 가는 길은 학림사에서 오르는 길과

영원암 뒷산 언덕길을 따라 오르는 2가지 코스가 있다.

학림사에서 오르는 길은 옛적에는 상당히 힘들었지만,

지금은 나무데크 등 길을 넓혀 예전과 달리 편안히 오를 수 있다.

이번 용굴암은 설경도 즐길 겸 영원암에서 학림사로 내려오는 코스로 잡았다.

 

 

 

영원암을 지나 용굴암 가는 양지쪽 길은 눈이 다 녹았다.

 

 

 

 

 

 

학도암에서 용굴암 오르는 길은 길이 좋아 수락산 등산로 이용되고 있어

예적에 못보던 등산객이 많이 보인다.

용굴암 전경이다.

 

 

 

 

 

미륵보살

 

 

 

 

 

포대화상

 

 

나한전 옆이 대웅전이다. 대웅전 오르는 길은 계단으로 조성되어 있다.

대웅전

대웅전 수미단에는 석가모니불을 본존으로 관음보살을 좌협시로,

지장보살을 우협시로 봉안하고, 신중탱, 산신탱, 칠성탱을 조성해 놓았다.

 

 

관음불과 대세지보살을 협시로 두는 본존불은 아미타불이다.

사찰에 따라 대세지보살 대신 지장보살을 두는 경우도 있다.

이경우 아미타불을 본존으로 모시는 것이 상례인데 석가모니불을 모셨다.

그런데 수인을 보면 약사여래로 보인다.

 

산신탱

 

칠성탱

 

신중탱

 

나한전

나한전 옆 유리관 안에 봉안된 미륵보살

용굴암 나한전

나한전은 천연동굴을 이용하여 중앙에 석가모니불을 봉안하고

좌우에 홈을 파서 나한상을 배치해 놓았다.

나한은 산스크리트 'Arhan'을 음역한 아라한(阿羅漢)을 줄인 말로,

상당한 경지에 이른 부처의 덕 높은 제자를 뜻한다.

아라한은 '공양을 받을 만한 자격자',

'진리에 응하여 남을 깨우치게 하는 자', 즉 성자(聖者)를 가리키는데,

응공(應供) 응진(應眞) 살적(殺賊) 불생 무생(無生)

무학 진인(眞人) 등으로 의역된다.

 

 

경전에 나오는 기록을 보면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십송률(十誦律)』 등에는

부처님이 사위국(舍衛國)에서 500명의 아라한에게 설법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흥기행경(興起行經)』에는

“여래가 오백나한을 위하여 매월 15일을 기하여 계(戒)를 설하였다.”라고

기록하였으며, 『법화경』 오백제자수기품(五百弟子授記品)에서는

부처님이 500명의 아라한을 위하여 특별히

수기(授記)를 베푸는 인연이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나한은 십육 나한·18나한·오백나한이 있는데

십육 나한이 가장 널리 그려졌다.

 

 

 

 

 

 

 

 

우리나라에서 나한신앙이 크게 성행된 것은

고려 시대로 1051(문종 5)~1284년(충렬왕 10) 사이에

국가적인 공식 나한재(羅漢齋)가 빈번히 열렸고,

보제사 금당이 나한을 주존으로 모시는

나한보전(羅漢寶殿)이었던 것을 통해서

나한도의 제작도 활발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나한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삼국유사≫의 <가락국기 駕洛國記>에서 수로왕이 도읍을 정한 뒤

“산천이 빼어나서 가히 십육 나한이 살 만한 곳이다.”라고 한 것이다.

또한, 통일신라 시대에 보천(寶川)이 오대산에서 수행할 때

북대(北臺)의 상왕산(象王山)에 석가여래와 함께

오백 대아라한이 나타났다고 한다.

 

용굴암 탐사를 끝내고 수락산 학림사로 내려간다.

 

 

 

 

 

 

학림사 전경(학림사는 따로 후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