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 제536호 아산 평촌리약사여래입상

2021. 12. 5. 10:42국내 명산과 사찰

 

 

보물 제536호로 지정된 아산 평촌리 약사여래입상은

아산시 송악면 평촌리에 있는 용담사 우측

나지막한 언덕에 모셔진 5m가 넘는 거대한 고려 초기 석불입상이다.

아산 용담사는 태고종 사찰로 사찰 창건 내력은 알 수 없지만

용담사의 사적기에 의하면 신라 애장왕(788~809) 때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사적기에 대한 진위 여부는 이설이 많다.

 

용담사 가는 길은 현재 도로 공사 때문에 진입에 애로가 많았다.

마을을 돌아 돌아 굴다리를 지나면 고즈낙한 곳에

정겨운 모습으로 용담사가 나타난다.

 

용담사 중앙에 보이는 전각이 용담사 대웅전이다.

평촌리약사여래입상 찾아 가는 길은 우측 길로 접어들면 된다. 

 

 

우측 길로 접어들면 짧은 거리에 석불의 모습이 보이고

앞에는 평촌리약사여래입상에 대한 안내판이 서 있다.

 

 

 

 

아산 평촌리 석조약사여래입상(牙山坪村里石造藥師如來立像)

문화재 지정: 보물 제536호

건립 시기: 고려

크기: 높이 5.45m

소재지: 충청남도 아산시 송악면 평촌리 산1-1(용담사)

 

 

높이 5.4m의 거대한 화강암을 다듬어 용담사 우측 산 중턱 옛 절터에 조성된

아산 평촌리 석조 약사여래상은 광배는 멸실되고

좌대는 땅에 묻혀 있는지

지대석으로 보이는 사각의 석대만 노출되어 있다.

 

 

가사의 문양이 독특한 이 불상은 불두(佛頭)가 110㎝에

너비는 72㎝로 약간 길쭉한 형태로 몸체만은 442㎝

어깨 부분의 너비는 170㎝의 장방형으로

어깨가 딱 벌어진 건강한 느낌을 주고 있는 석불로

보물 제536호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불두>

머리카락은 나발(螺髮)로서 둥글고 낮은 육계(肉髻)가 표현되어 있다.

이마에는 백호(白毫)가 양각되어 있으며,

얼굴은 원만하고 가늘고 길게 선각 된 눈, 뭉툭한 코,

꽉 다문 얇은 입술 등으로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고 있어

자비롭고 위엄있는 부처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귀는 길게 늘어져 어깨에 닿아 있으며, 목은 짧지만,

목에는 삼도(三道)가 표현되어 있다.

어깨는 넓고 각이 져 당당한 느낌이 들지만,

다소 경직되고 위축된 감을 준다.

 

 

<가사>

불신은 평판적이며 양어깨에 걸쳐진 통견의 법의는

양팔과 무릎 부분에서 옷 주름이 도식적으로 처리되었는데,

이것은 고려 시대 불상의 한 특징이다.

 

통견(通肩)의 법의는 좌우대칭으로 양어깨에서 약합을 든 손에 걸치고

다시 불신(佛身) 밑에까지 사선을 그려 흘러내린다.

 

납작하고 평판적인 신체에 옷은 두꺼워 양감이 없고 평면적이다.

도드라지게 요철을 이룬 옷 주름은 평행의 띠 주름이

좁은 간격으로 일정하게 배열되어 있다.

 

군의(裙衣)는 신체 정면에서 세 가닥으로 구분되어 평행 U자형으로 조각되었다.

양 무릎에는 동심원형(同心圓形)의 옷 주름이 선각 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조각 수법은 둔중하고 옷 주름은 번잡스러우나,

균형 잡힌 장대한 신체라든지

온화한 얼굴 표현에서 사실적인 묘사력이 엿보인다.

 

 

아산평촌리석조약사여래입상이 많은 석불 중에서 회자하는 것은

이 불상의 옷 주름이 독특하기 때문이다.

이는 통일신라 시대 불상에 유행하던 양식을

극도로 형식화시켜 표현한 것으로

특히 무릎에 표현된 동심 원문의 옷 주름은

삼화령 석미륵삼존불상의 본존이나

영주 석교리 석조여래입상(榮州石橋里石造如來立像, 보물 제116호) 등

삼국시대나 국보 제82호인 경주 감산사석조아미타불입상,

예천 동본리 석조여래입상(보물 제427호) 등

통일신라 시대의 불상에서 간혹 나타나던 특이한 수법이다.

 

이처럼 옷 주름이라든지 비교적 사실적 표현에 충실한 얼굴 등은

통일신라 시대의 요소를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좌우 대칭적이며 규칙적인 옷 주름,

짧은 목과 움츠린 듯한 어깨,

그리고 꼿꼿한 직립의 자세 등에서 부자연스럽고

도식화된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조성 연대는 고려 시대로 추정된다.

 

 

<수인>

약단지(약합)를 오른손으로 감싸고 왼손에 받치고 서 있는 모습이어서

약사여래입상임이 분명한데 손 모양과

손가락의 표현이 생동감이 있어 흥미롭다.

약합(藥盒)은 현재 10년째 용담사 주지로 있는 보성스님에 의하면

돌로 된 약합을 일본의 강점 시기에 수탈되어

움푹 팬 형태만 남은 것을 가리기 위하여

아산시 공보실에서 시멘트로 때워놓았다고 전한다.

 

 

 

<불족>

불족(佛足:발)은 5m가 넘는 거대한 불신(佛身)에 비해

빈약하게 처리되어 있다.

불상을 조성할 때 함께 만든 것이 아니라

불상을 조성한 후에 발을 만들어 끼어놓은 형상으로 보인다.

 

아산 평촌리 석조약사여래 입상은 화강암 부재를 최대한 활용하면서도

사실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볼 때,

통일신라 시대 혹은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요니 바위인가?

약사여래입상 앞에 사각형 석판과 그 석판 안에

돌절구의 밑동을 닮은 원형의 돌이 부조된 묘한 돌이 있다.

천태산 부은사의 <요니>와 같은 내력을 지닌 바위인데

이 돌은 아들 낳기를 원하는 아낙이 정성으로 불공을 드린 후

작은 돌절구를 돌판에 문지르면 돌이 쩍 달라붙으면 아들을 얻고

달라붙지 않으면 정성이 부족하여 득남(得男)하지 못한다고 한다.

원래 이 돌은 남근 모양과도 같은 둥근 원형의 돌이었는데

세월이 흘러 언제인가 깨어져서

현재는 돌판의 옆에 일부분만이 놓여 있는 것이라고 한다.

(요니는 본방 <해동제일 보은도량 천태산 보은사> 참조)

 

@ 용담사 사적비

용담사는 태고종계열의 사찰로 사찰의 내력과 관련된

사적비가 석불 옆에 있는데

내용에는 신라 애장왕 36년 사월 원효대사가 창건하고

고려 광종 때 효명선사가 중창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문화재를 담당하는 공보실에서는

동국대학교 교수 황수영 박사의 감정에 의거

비석의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시대적으로 보면 애장왕 (哀莊王, 788년 ~ 809년, 재위: 800년 ~ 809년)은

신라의 제40대 왕으로 8세기 인물인데

원효대사의 생몰은 617과 686년으로 주로 활동시기는

650년대 전후이기에 시대적인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원효대사를 등장시킨 것은 후대에

사찰의 위신력을 높이기 위해 창건주로 모신 것으로 추정된다.

또 고려 광종(재위 947∼975) 때 혜명(慧明)이 중창하였고 전하나

그 이후의 내력은 전하지 않는다.

현재 학계는 약사여래입상의 석불 형태를 보아

고려 시대 사찰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 용담사의 요사채 건물의 터에서 

고려 초기의 다양한 조합무늬의 기와 조각 등의 유물이 발견되어

이곳에 사찰이 있었음을 추측게 하는 것도 한 요인이 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