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황이 춤을 춘다는 밀양 무봉사(舞鳳寺)

2021. 8. 8. 19:09문화재

 

우리나라 삼대 누각 중 하나인 영남루 위에 위치한 가람.

봉황이 춤을 춘다는 밀양 무봉사다.

밀양 무봉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사인 통도사의 말사이다.

창건역사를 보면 원래 773년(혜공왕 9) 법조 대사가

현재의 영남루 자리에 있었던 영남사의 부속 암자로 무봉암을 세웠는데,

1359년(공민왕 8) 화재로 영남사가 소실되자 이 암자를 무봉사로 승격시켰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05년에 혜징이 새로 짓고,

1899년에 경봉이 중건했으며 1942년에 중수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 당우로는 대웅전·삼성각·종루·요사채 등이 있다.

대웅전에는 석조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봉황이 춤을 춘다는 무봉사(舞鳳寺)라는

사명(寺名)에 대해 2가지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하나는 773년(혜공왕 9) 법조(法照)가

현재의 영남루 자리에 있었던 영남사(嶺南寺)를 순례하다가

큰 봉황새가 이곳으로 날아와 앉으므로,

상서로운 성지라 생각하고 절을 창건하고 무봉사라 하였다고 한다.

둘은 고려의 고승 범률국사가 이 절에서 하안거를 하면서

봉황이 춤추는 형국이기 때문에 절 이름을 무봉사로 하였다고도 한다.

그래서 지금의 삼문동 지역에서 봉황이 알을 낳을 수 있게 하려고

밤나무를 심어 가려 주었으며, 무봉사에서 아침과 저녁으로 종소리를 울려

봉황을 날게 하였다고 한다.

 

 

<무봉사>란 편액이 걸린 일주문을 지나면 돌계단이 나오고

<無量門> 이란 편액이 걸린 해탈문이 나온다.

대웅전 좌측에는 요사채가 있고 그 옆에 종각을 두고

대웅전 우측 언덕 쪽에 삼성각을 세웠다.

 

 

범종각

 

범종은 비천상 대신 보살을 부조해 놓았다.

 

대웅전

전면 7칸 측면 2칸 주포식 팔작지붕이다.

가파른 지형을 이용하여 일자형으로 길게 전각이 자리하고 있다.

법당 안에는 통일신라 시대에 조성된 보물 제493호

석조여래좌상을 중앙에 봉안하고 양옆으로 지장보살상과 관음보살상,

신중탱과 독성, 산신, 칠성탱이 봉안되어 있다.

 

정면에는 대웅전, 출입문에는 설법전이란 편액이 걸려 있다.

 

 

@무봉사 석조여래좌상

시대: 고대/남북국/ 통일신라

문화재지정: 보물 제493호

크기: 높이96.5㎝, 무릎 폭 76.5㎝

 

무봉사는 773년(혜공왕 9) 법조대사(法照大師, ?∼777)가

현재의 영남루(嶺南樓) 자리에 있었던 영남사(嶺南寺)의 부속 암자로 세운 것이며,

1359년(공민왕 8) 화재로 영남사가 소실되자

이 암자를 무봉사로 승격시켰다고 한다.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이 불상은 원래 영남사지(嶺南寺址)에 있었던 것을

지금의 자리로 옮겨 놓은 것이다. 밀양 무봉사 석조여래좌상은

지금의 장소로 옮길 당시에 대좌(臺座)와 광배(光背)가 없었으며,

근처에서 발굴된 광배를 붙이고 대좌를 새롭게 만들어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머리 위에는 육계가 큼직하게 솟아 있으며,

머리카락은 굵고 둥근 나발(螺髮)로 표현하였다.

이렇게 육계(肉髻)가 나발(螺髮) 위에 둥글게 덮고 있는 형상은

나말여초에 조성된 석불의 특징으로

구미 해평리 석조여래좌상 보물 492호(통일신라)(소장:구미 보천사) 과

홍천 물걸리 석조여래좌상 보물 제541호/통일신라(9세기) 등에서도 볼 수 있다.

 

<구미해평리 석조여래좌상 보물492(통일신라)/소장:구미 보천사)>

 

<홍천 물걸리석조여래좌상 보물 제541호/통일신라(9세기)>

좁은 이마의 중앙에는 백호가 박혀있다.

살이 오른 통통한 얼굴에는 가늘게 치켜뜬 눈과

이중의 눈썹 선이 반듯한 콧날로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있다.

눈과 위 눈썹 사이가 간격이 크고 코는 콧방울이 넓고 인중이 짧고,

입술 아래로는 입술 주머니가 도톰하게 자리 잡아 후덕한 인상을 준다.

두 귀는 턱 끝까지 늘어졌으며, 목에는 삼도가 얇게 돌려져 있다.

 

어깨는 넓고 둥글며 허리는 짧고 두터우며 무릎은 낮고 넓어

전반적으로 작달막한 체구를 보여준다.

양어깨에 걸쳐 통견으로 입은 법의(法衣)는 너무 두꺼워

신체 굴곡을 자세히 나타내지 못하고 있다.

 

왼쪽 어깨에는 삼각형 띠 주름이 넓게 자리 잡았고,

팔꿈치로는 짧고 간결한 옷 주름이 팽팽히 감겨들었고

팔뚝 위로는 주름이 둥글게 지나

가고 있다. 왼쪽 팔뚝을 덮은 소맷자락의 끝단을 S자형으로 뒤집었고,

둥글게 처리한 무릎에는 오른쪽 발목을 덮은 띠 주름과

층단을 이룬 주름이 긴장감 있게 펼쳐져 있다.

특히 왼쪽 어깨에 길게 늘어진 삼각형의 주름이나

양 팔뚝을 덮고 측면으로 둥글게 늘어진 주름,

무릎 좌우로 힘있게 펼쳐진 3단의 층단 주름 등은

예천 청룡사 석조여래좌상과 같이 9세기대에 조성된 불상들과

양식적 특징을 공유하고 있다.

 

<예천 청룡사 석조여래좌상 보물 제421호 9세기>

가슴에는 사선으로 내려오는 내의(內衣)와

리본 모양으로 묶은 띠 매듭이 보이며,

그 아래 다리 부분에는 수평으로 얇게 패인 옷 주름이 표현되었으며,

수인(手印)은 오른손을 바닥 방향으로 내리고

왼손을 하늘 방향으로 보이게 하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결하고 있다.

 

 

영남사터에 묻혀있던 것을 옮겨 놓은 광배는

새겨진 문양들이 또렷하게 남아 있다.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는 두 줄의 볼록한 선으로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을 구분하고,

그 안에 다양한 문양을 가득 새겨 놓았다.

가장 바깥 부분에는 불꽃이 활활 타오르는

불꽃무늬(火焰紋)를 촘촘히 배치하였으며,

그 안에는 5구의 작은 부처를 새겼다.

 

 

광배의 전체적인 형태나 문양, 화불의 배치와 표현 등은

홍천 물걸리 석조 광배(보물 제544호),

영주 북지리 석조여래좌상(보물 제220호) 등

9세기에 제작된 불상들과 양식적 특징을 공유하고 있다.

 

<홍천 물걸리 석조대좌 및 광배 보물 제544호 9세기작>

 

<영주 북지리석조여래좌상 보물 제220-1호 9세기작>

 

무봉사의 광배의 특징은 뒤편에 약사여래가 부조되어 있다는 데 볼 수가 없다.

우연히 某까페에서 올린 배면불의 사진을 보니

연꽃무늬 대좌 위에 앉아 있는 약사여래(藥師如來)상이

경주 남산 삼릉곡 석조약사여래좌상(중앙박물관소장)이나

경주 남산 미륵곡석조약사여래좌상의 배면불과 비슷하다.

 

<경주 남산 삼릉곡 석조여래좌상. 9세기 작. 국립중앙박물관소장>

 

이렇게 광배 뒷면에 불상이 새겨진 예로는

경주 남산 미륵곡 석조여래좌상(慶州 南山 彌勒谷 石造如來坐像, 보물 제136호)를

비롯하여 남원 만복사지 석조여래입상(보물 제43호),

청주 용화사 석조 불상 군(보물 제985호) 등 매우 드문 예에 속하며,

당시 불상을 돌며 예불하던 건물의 구조적 특성 및

신앙적 배경이 주불상(主佛像)의 뒷면에도

보조적 성격의 불상을 새기게 된 이유로 생각된다.

 

<남원 만복사지 석조여래입상 보물 제43호 광배 배면불 관음보살>

<경주 남산 보리사 미륵골석조여래좌상 보물 제136/ 광배배면불 약사여래>

<청주 용화사 석조불상군 보물 제985/석가모니 광배 배면불 유등보살>

신중탱
지장보살
관음보살
칠성탱
독성(나반존자)
산신

 

 

위 전각은 삼성각 아래는 석탑2기를 조성했다.
무봉사 창건비와 공덕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