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제329호 공주 충청감영측우기와 공주 감영

2021. 6. 9. 19:49문화재

 

감영(監營)은 조선 시대 각 도의 관찰사가 거처하는 관청이다.

공주시는 옛 공주 충청감영의 일부인

관풍정, 선화당과 포정사 문루 등을 복원하여

국립공주박물관 주차장 옆 우측에 한옥가옥과 더불어 조성되어 있다.

공주시의 홍보를 박물관의 역사문물과 아울러

관광과 레져를 함께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선화당 앞마당에는 국보 제329호인

공주 충청감영측우기의 복사본이 조성되어 있다.

원본은 현재 기상청에 소장되어 있다.

 

 

 

 

 

선화당 후문

 선화당(宣化堂)

선화당(宣化堂)은 충청도 관찰사의 행정청으로 사용되었던 건물이다.

처음에는 감영지에 자리하였는데 국립공주박물관 안으로 옮겼다가

최근 다시 공주 웅진동으로 옮겨와 복원하였다.

충청도 관찰사는 처음 충청북도 충주에 있다가

1598년(선조 31)에 공주로 옮겼는데, 1646년(인조 24)에

큰 장마로 인하여 선화당이 떠내려가서 금성동 성안으로 옮겼다가

1653년(효종 4)에 당시의 관찰사 강상연이

반죽동 공주사대 부속고등학교 자리로 옮겼으며,

1910년 국치를 당한 후 충청남도청이 되어 오다가

1931년에 도청을 대전으로 옮겨가고,

건물은 1938년 중동으로 그대로 이전하여

국립공주박물관 진열실로 이용되어 왔었다.

 

건물은 정면 8칸 측면 4칸의 평면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는 초창의 건물이 정면 9칸이었던 것을 이전 복원하면서

원형이 변경되어 정면 8칸으로 변화되었다.

건물의 내부는 통칸으로 넓은 공간을 두었고

기둥은 내진칸을 두도록 배치하면서 주위에 외진 칸을 만들어

퇴칸 형식을 취하고 있다. 공포는 무출목 이익공 계통으로 시설하였고,

창방이 있는 주칸에는 운공이 있는 화반을 3구씩 배치하여

장설을 받쳐 주어 관아 건축의 장엄을 유지하고 있다

(문화재지정일 : 1980 .12. 29).

 

선화당 마당 좌측에 국보 제329호인

공주충주감영측우기가 조성되어 있다.

원본을 현재 기상청에 소장되어 있다.

 

공주 충주감영 측우기(忠淸監營 測雨器)

시대: 조선

문화재지정: 국보 제329호

크기: 높이 32㎝, 바깥지름 15㎝, 안지름 14㎝, 무게 6.2㎏

재질: 청동

제작 시기: 1837년(헌종3)

소장/전승: 국립기상박물관

 

 조선 세종 때 반포되고 영조 때 개정된 우량 관측제도에 의하면,

전국 팔도의 감영(監營)에 측우기를 설치하여

강우량을 측정, 보고하도록 했다.

충주감영측우기는 일명 금영측우기라고 불린다.

금영 측우기는 공주의 충청감영,

즉 금영(錦營)에 설치된 측우기라는 뜻이다.

 

금영 측우기는 제작된 이후부터 조선 왕조가 끝날 때까지

70여 년간 공주감영에 설치되어 우량을 측정하는 데에 사용되었다.

1910년대 초 일본의 기상학자 와다 유지[和田雄治]에 의해 수집되어

그가 귀국할 때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기상청에서 보관되어오다가,

1971년 우리나라에 반환되었다. 현재 기상청에 보관되어 있다.

 

특징

청동으로 제작된 이 측우기는 표면에 새겨진

“도광정유제(道光丁酉製)”라는 글귀를 통해

1837년(헌종 3)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높이 32㎝, 바깥지름 15㎝, 안지름 14㎝, 무게 6.2㎏이며,

상·중·하단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세 단을 분해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사용할 때에는 꼭 맞게 조정하여 쓰게 되어 있다.

상·중·하단의 길이는 각각 10.6㎝, 10.5㎝, 10.3㎝이며,

조립하였을 때 그릇의 깊이는 31.5㎝이다.

 

현황

조선 시대의 측우기 관련 유물로

측우기를 설치했던 대석(臺石)은 몇 기가 남아 있지만,

빗물을 담는 그릇으로 현존하는 것은 금영 측우기가 유일하다.

금영 측우기를 이용한 강우 관측 기록도 상당히 많이 남아 있다.

현존하는 『충청감영계록(忠淸監營啓錄)』에는

금영 측우기가 제작되기 1년 전인 1836년에서 1895년까지

약 300건의 측우기 관측 기록이 담겨 있다.

또한, 공주박물관에는 이 측우기를 받쳤던 것으로 전해지는

정사각형의 받침돌이 남아 있다.

 

<세계적인 우리 문화의 유산 측우기(測雨器)>

농경시대에 홍수와 가뭄을 미리 대비하고 국가 행사가 있을 때

일기 예보 등을 미리 알기 위해

강우량을 과학적으로 측정할 필요성이 커짐으로써

1441년 세종 23년 8월에 서운관(書雲觀)에서 측우기를 제작하고

전국적으로 시행하였다. 이 당시의 측우기는 높이 32㎝,

지름 15㎝가량의 철제 원통이고, 주척의 길이는 약 21㎝이다.

이후 100여 년 동안은 측정이 제대로 시행되었지만,

임진왜란으로 강우량 측정의 전통이 단절되고

세종 때 만든 측우기는 모두 유실되었다. 현재 보존된 것은 다음과 같다.

 

1)보물 제843호 관상감 측우대 (觀象監 測雨臺)1441년(세종23) 기상청

2)국보 제331호 창덕궁 이문원 측우대(昌德宮 摛文院 測雨臺)

1442년(세종24) 국립고궁박물관

 

3)국보 제330호 대구 경상감영 측우대 (大邱 慶尙監營 測雨臺)

1770년(영조46)국립기상박물관

4)국보 제329 공주 충주감영 측우기(忠淸監營 測雨器)

1837년(헌종3) 기상청

 

 

〈세종실록〉에 측우기라는 이름이 등장하며 측정 방법이 기록되어 있다.

강우량은 비가 그쳤을 때 주척을 써서 자·치·푼까지 정확하게 재고,

비가 내리기 시작한 일시와 갠 일시를 기록하여

전국단위의 강우량이 정확히 기록·보존되었다.

 

@ 측우기 역사를 살펴보면 1639년

로마에서 이탈리아의 B. 가스텔리가 처음으로 측우기로 강우량을 관측하였고,

프랑스 파리에서는 1658년부터, 영국에서는 1677년부터 관측을 하였다고 한다.

조선 세종 23년 1441년 서운관에서 제작된 관상감측우기는

세계 최초라는 이탈리아 측우기보다 약 200년이 앞선 것으로

우리 문화의 자랑이라 할 수 있다.

 

포정사문루

 

포정사는 공주 감영에 부속되었던 건물로

감영이 철회되면서 구 공주군청 곁으로 옮겨 세웠다.

한동안 공주제일감리교회로 사용되다가,

다시 군 보건소로 이용하였다.

그 후, 1980년대에 교동으로 옮겨 중수하였으나

1985년 화재로 전소하였다.

지금은 무령왕릉과 금강 사이의 곰나루에 있다.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익공식팔작지붕이다.